81화
타앙―
눈이 마주쳤다.
푸르른 녹음을 한가득 담은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세상이 샤를리즈가 있는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느낌이었다.
있는 힘껏 저항해도 끌려가고 마는 힘처럼 칼릭스는 움직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기꺼워졌다. 마치 가야 할 길을 이제야 찾은 기분이 되었다.
“공녀, 손을 잡아.”
이미 훨씬 전부터 한계였다.
샤를리즈가 손을 잡아 주기까지 기다릴 잠시의 여유도 없었다.
마침내 닿은 손은 따뜻했다. 그래서 안도했다.
그 안도가, 더는 생경하지 않았다.
어째서 몰랐을까.
나는 공녀를…….
* * *
나는 침대에 몸을 날렸다.
[바이에르 공에게서 곧 초대장이 도착할 거야.]
외부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공작이 그녀가 초대하는 모양새를 수락한 것을 보면 얼추 나눈 것도 있는 듯했다.
[바이에르 공자의 환경을 그대가 한 번 더 보고 싶어 한다고 전했어.]
칼릭스와 사전에 합의한 내용이었다.
‘저걸로 수락한 걸 보면 공작은 역시 아들을 좋…….’
[왜일 것 같아?]
‘에비, 에비.’
사라지라고! 침대를 마구 주먹으로 때리며 나는 안정을 찾았다.
사람은 역시 약간의 운동을 해야…….
“후.”
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빡 때리고 눈을 감았다 떴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다른 얼굴을 봐야겠어…….”
다른과 얼굴 사이에 묵음 처리한 단어가 있다. ‘잘생긴’이다.
‘고단한 하루였다.’
신체와 정신 모두 피곤에 절어 눈을 꾹 감자마자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 * *
전체적으로 얄팍한 인상의 인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선황자 건은 다행입니다. 오랜만에 제대로 잘하셨어요.”
드물게 주어지는 칭찬이었다. 안 그래도 들떴던 루카스는 허공에 붕 떠오른 듯했다.
“그리고 저번에, 저번에 나 아팠을 때 어머니가 나 걱정했다고 하셨…….”
“도련님.”
인영이 안타깝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키우는 개가 아파도 걱정하는 게 사람입니다.”
“…….”
“잘하셔야지요. 학업과 검술로는 각하께서 다섯 살에 이룩하신 수준도 따라가지 못하시는데 이리 마음도 물러서 어떡한답니까. 이게 다 제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아니야. 내가, 내가…… 부족해서 그래.”
“발전은 인정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오늘 도련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도련님은 한 보 정진할 수 있게 되신 겁니다.”
“응.”
루카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뒤, 리엔타 공녀가 저택을 방문한다지요.”
“맞아.”
“리엔타 공녀가 도착하면 아프다고 하시고 방에 계세요. 엮이지 않도록 거리를 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종자와 연이 이어져 봤자 쓸모없이 감정 소모만 하게 될 뿐이니까요.”
“하지만 리엔타 공녀는 나를 구해 줬어. 고맙다고 제대로 인사는 해야 해.”
“그건 구한 게 아닙니다. 애초에 도련님께서 숲에 들어가지 않으셨다면 그런 빌미도 주지 않을 수 있던 것 아닙니까?”
냉정한 눈빛에 루카스는 아랫입술을 말아 먹었다.
* * *
애석하게도 나는 외출할 수 없었다.
‘내가 아직 아프다면서 조사를 반대하고 있는데 시가지 나다닐 수는 없겠지…….’
그리하여 바이에르 공작은 엘루이든 대공저를 방문하게 됐다.
“마중 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닐세. 다른 이들의 눈에 띄면 곤란하지 않겠어.”
피식 웃은 바이에르 공작이 앉았다.
“실제로는 괜찮은 것 맞겠지?”
“튼튼합니다. 그보다 공자님의 상태는 괜찮으십니까?”
본디 함께 방문하기로 했던 루카스는 갑자기 열이 올랐다고 한다.
“단순한 열 감기라고 하더군. 그 나이에 아이들은 종종 이유 없이 아프니까.”
대수롭지 않게 넘긴 공작이 문득 나를 바라봤다. 아이홀이 깊은 고전적인 얼굴을 나도 빤히 쳐다봤다.
“공녀에게는 그대가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가늠하며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군.”
차를 한 모금 마신 공작이 찻잔을 소서에 놓았다.
“나는 루카스의 저주를 흑마법이라고 의심하고 있어.”
“흑마법이라…….”
적당한 타이밍이 흐른 후 덧붙였다.
“실은 저도 흑마법으로 추정되는 공격을 최근에 겪은 적 있습니다.”
“그대가?”
공작이 눈매를 찌푸렸다.
“확실히 이상하군.”
공작이 생각에 잠긴 듯 테이블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흑마법은 대외적으로는 사장되었다고 알려져 있지. 공녀도 알다시피 북부는 새로운 신분을 구하지 못한 범죄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그중에는 흑마법사들도 있었거든. 마지막 기록이 3대 전이었던가.”
마침 바이에르에 흑마법사가 실존했다는 기록이 있어 다행인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단번에 연상 짓기 어려웠을 테니까.
“덕분에 루카스가 저주의 매개로 이용된 오르골을 폴든 백작가에서 선물받았다고 착각했다는 것으로 흑마법을 의심할 수 있었어.”
“공자님의 저주가 흑마법이라고 하더라도 파훼는 확실히 되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맙다는 것처럼 입꼬리를 올려 웃은 공작의 얼굴이 다시 딱딱해졌다.
“하나 문제가 있어. 그 매개, 어디서 흘러들었는지 추적이 계속 끊겨.”
“…….”
“다각도로 접근해도 모두 중간에서 잘려 짧은 실을 한 묶음 쥐고 있는 기분이야.”
“적이 내부에 있군요.”
“그래서 더 우습게 되었지. 수도 저택과 영지성 모두 가신 일가로만 꾸렸거든.”
공작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특히 수도 저택의 사용인들을 면밀하게 조사했는데 아무것도 찾지 못했지 뭔가.”
‘흠…….’
바이에르 공작은 칼릭스와 내 예상보다도 더 알아낸 정보가 없었다.
그녀의 의심대로 가문 내부에 적과 결탁한 배신자가 있어 조사를 사사건건 방해하기 때문일 터다.
‘이대로 잠자코 더 기다려 보기에는 시간이 아까운데.’
원작에서 루카스는 저주의 여파로 어린 나이에 죽었다.
‘루카스가 죽고 난 후 바이에르 내부 사정은 서술되지 않았지만, 공작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철저하게 조사했겠지.’
아마 고신도 동반되었을 것이다.
지켜야 하는 선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다.
최소한 지금 공작은 루카스가 유대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되도록 온전하게 두고 싶을 테니까.
이 정도 조사는 당연하며 그저 험한 일을 겪은 도련님이 안쓰럽게만 여겨질 선.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루카스는 죽었을 테고…….’
후사는 루카스뿐이니 아이가 사망한다면 더는 공작저에서 필요로 하지 않을 인력.
가정교사. 유모. 놀이 시녀나 시종 정도.
‘그런데 공작은 그들을 왜 다른 사용인들 정도로만 조사하고 말았지?’
바이에르 공작은 선이 굉장히 명확한 인물이다.
약소한 도움 좀 줬다고 가문에 대해 사정 질문했다가는 금세 싸늘해져 나한테 벽을 세울지도 몰랐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바이에르 공작저에 방문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문제 될 것 없지. 다만, 공녀는 현재 운신하기 어려운 상황이 아니던가?”
“계속 대공저에만 있을 수도 없으니까요. 여러모로 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글쎄, 별로 폐가 아닐 것 같은데.”
바이에르 공작이 한쪽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말만 그렇지 공작저 오는 거 달갑지 않다는 뜻인가?’
이렇게 벽이 높다니……!
앉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일어서 있었더라면 스르르 흘러내려 일전에 멜리사 부인이 놀랐던 좌절 자세를 취하고 말았을 것이다.
“일주일 후에 초대하면 되겠나?”
‘?’
그런데 바이에르 공작은 명확한 날짜까지 협의하고 갔다.
‘???’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고개를 한번 끄덕인 나는 리엔타 공작에게 조사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서신을 부쳤다.
* * *
“로단테, 길은 이쪽이야.”
공기는 적당히 서늘하고, 하늘은 맑은 이 좋은 날. 나는 수도 경비대의 초소를 방문했다.
‘황실 기사단장에게 쪼일 각오도 했었는데.’
아무래도 공작이 시간을 끌며 손을 쓴 것 같았다.
비록 용의선상에 오른 게 아니라고는 하더라도 기사단에서 조사받은 것과 경비대에서 조사받은 것은 받아들여지는 게 다르니까.
특히 그 사람이 나라면 더 그렇다.
‘황실 기사단은 진짜로 큰일 같잖아.’
서쪽 숲도 일단 수도에 있기는 있으니 기사단으로 고집하진 못했나 보다.
“와 보셨어요?”
“응.”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이번이 두 번째야.”
“저번에도 아가씨께서 무슨 잘못을 하셔서 온 건 아니었다. 지금처럼 참고인 신분이셨지.”
에반스 경이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나는 속으로 ‘에반스 경, 좋은 타이밍이었어!’ 하고 외치고는 그간 향상된 사회성을 발휘해 말을 붙였다.
“에반스 경도 두 번째겠어.”
“저는 두 번째는 아닙니다.”
나는 조금 놀랐다.
‘어쩐지 저번에 이 길 아니라고 했을 때 어떻게 길을 잘 아는지 이상하더니만!’
“몇 번 와 보았습니다. 목격자로서 말입니다…….”
에반스 경의 씁쓸한 시선이 허공을 배회했다.
나는 숙연해져 침묵했다.
‘나 때문이었군.’
또 한 번의 예리한 추억을 선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