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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84) (84/232)

84화

―뭐?!

자기애 강한 신수가 펄펄 날뛰기 전, 나는 잽싸게 덧붙였다.

“신수 님께서는 사샤랑 계약하고 싶어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제가 불러내서 죄송해요.”

―너 왜 갑자기 이리도 공손해진 게야? 징그럽다. 원래대로 해라.

그러기를 원한다면야.

“계속 사샤를 노리는 세력이 있잖습니까. 그래서 사샤가 신수 님과 계약하는 게 최선이지만, 아직 방도를 찾지 못했어요.”

―지금처럼 피를 내면 돼.

“사샤 일곱 살입니다.”

너무 정색했나 보다.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나는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일단은 저와 계약해 사샤를 지켜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나는 한 번에 둘은 못 지켜.

“제 목숨 제가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네가 위험한 상황이 온다면 내 최우선 순위는 네가 된다.

“위험해지지 않도록 운신을 조심하겠습니다.”

―그래. 그 약속 두 가지, 꼭 지켜라.

하기 싫다고 마구 뻗댈 줄 알았더니 의외로 순조로웠다.

나는 손등의 육망성 표식을 얼떨떨하게 내려다보았다.

푸른빛이 완전히 잦아들자 표식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이곳이 책 속의 세계 같군.’

내 몸에 꾹 누르면 신수를 부를 수 있는 버튼이 생기다니.

신기하다.

아무튼, 이것으로 신수는 신성력에 구애받게 되는 일 몇 가지에서 해방된 셈이었다.

이튿날.

나는 헉헉대며 연병장을 돌았다. 오늘의 러닝메이트는 노아였다.

‘로단테는 어때?’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엔젤도 옆에서 같이 책을 읽더군요.”

‘엔젤도 아카데미 가고 싶대?’

“엔젤은…….”

노아가 묘한 얼굴을 했다.

“가고 싶지 않다더군요.”

벌써 다섯 바퀴째였다.

인간의 한계를 매분 매초 경험하는 나와 달리 노아는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아이들을 보고 가실 겁니까?”

‘그럴까 해.’

“기뻐하겠군요.”

‘노아. 그대는 아주 대단한 사람이야.’

“과찬이십니다.”

노아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렸다.

* * *

리엔타 기사단의 기사들에게 가장 아끼는 동료를 꼽으라면 단 한 표를 제외하고 몰표가 나올 것이다.

“노아야. 오늘도 고생했다!”

“아가씨께서 대답 안 해 주시던데 계속 대화하느라 고생 많았지?”

“이거 오늘 간식으로 나온 딸기. 우리가 하나씩 모았어!”

꼭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꼬깃꼬깃한 선물을 건네는 것 같았다.

‘이건 처음 며칠만 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노아는 아직도 다소 어색한 기분이 되어 수북하게 쌓인 빨간 딸기를 바라보았다.

기사단원들은 누가 봐도 샤를리즈와 함께 연병장을 도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아는 기사단에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닌 샛길로 들어온 막내로서, 기사단원들이 하기 싫어하는 건 당연히 제 몫이라고 생각했다.

비단 노아뿐 아니라, 다른 기사단의 기사들은 모두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

“우리 막둥이. 여기 떠나면 안 된다?”

“맞아, 맞아! 혹시 봉급이 불만이라면 노아가 원하는 만큼 우리가 맞춰 줄 수도 있어!”

노아는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리엔타의 봉급은 아주 만족하고 있고, 다른 기사단으로 가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좋아!”

기사들이 ‘와와’거리며 손뼉을 쳤다. 그중에는 에반스도 있었다.

노아는 살며시 웃었다.

* * *

“나다.”

문을 똑똑 두드리며 말하자, 문이 빼꼼 열렸다.

“공녀님이에요?”

“그래.”

엔젤이 문을 더 크게 열었다.

로단테는 의자에서 일어나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공녀님?”

“이리 와. 로단테.”

나는 두 작은 꼬마를 맞은편에 앉혀 두고 선언했다.

“타티스 후작이 너희들을 데려가려고 할지도 몰라. 하지만 계급이 깡패지.”

엔젤이 눈을 빛냈다.

“공작님께서 막아 주시는 거예요?”

“그래. 아버지께서는 한 말은 모두 지키시니 믿어도 좋아.”

로단테의 오른 손날은 목탄으로 새까맸다.

“그리고 엔젤. 너도 로단테랑 같이 아카데미 가.”

“나는 안 가요. 저는 글자도 아직 못 읽어요.”

“너는 기부금 전형으로 넣어 줄게. 일단 글자만 떼. 가서 꼴찌 해도 뭐라 안 할게.”

“……공녀님도 기부금으로 들어갔어요?”

“아니. 나는 가서 일등만 해 봤는데.”

엔젤이 입을 삐죽거렸다.

“어차피 혼자 지내면 심심하잖아. 가서 오빠랑 놀고 다른 친구들도 사귀어.”

그리고 나는 엔젤에게만 들리도록 은밀히 속삭였다.

“사실 네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그래.”

“뭔데요?”

“가서 로단테를 괴롭히는 놈들이 있으면 내게 다 알려 줘. 로단테는 분명 나한테 숨길 테니까.”

나는 심술궂게 웃었다.

“감히 내가 후견하는 피후견인을 막 대하는 놈들, 못 참아.”

엔젤이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 툭 말했다.

“그거 사실 위험할까 봐 나도 아카데미로 보내려는 거죠? 노아 기사님이 말해 줬어요. 아카데미 학생은 안전하다고요.”

“그런 목적도 없진 않아.”

“저는 제가 운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공녀님을 만난 걸 보면 운이 없진 않은가 봐요.”

“운이나 우연보다는 이왕이면 만나야 했을 인연이라고 해 줘. 그게 더 낭만적이잖아.”

엔젤이 질겁하라고 한 말이었는데, 아이는 이번에도 조용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안 친한데 너, 너무 그랬나.’

소심하게 쪼그라든 나는 방문을 닫고는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않겠노라 이불을 팡팡 차며 다짐했다.

* * *

며칠 뒤.

샤를리즈는 바이에르 공작저를 찾았다.

1층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통통한 볼을 부풀린 루카스가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공녀님. 약속하고 찾아오셨는데 기다리시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야?”

“너 잘 있나 보려고. 오늘은 안 아프네?”

루카스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내가 아팠으면 좋겠어?”

“아니. 다행이라는 뜻이었어.”

샤를리즈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루카스는 댕그란 눈을 의아하게 들었다.

“저택 구경시켜 줘.”

“뭐?”

아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공녀님은 어른인데 왜 그렇게 참을성이 없어. 나 다리 아파서 못 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집사한테 하라고 해.”

“흠. 집사가 구경시켜 주는 거랑 주인이 시켜 주는 거랑 다른데. 아, 이러면 되겠군.”

루카스가 쿠키를 씹으며 ‘뭘?’ 하는 얼굴을 했다.

“내가 루카스를 안고 다니면 되는 거 아닌가?”

“시, 시, 싫어! 난 누구 품에 아이처럼 안겨 있는 거 질색이야.”

“그럼 루카스의 다리가 안 아플 때 또 오는 수밖에 없겠네.”

“누가 공녀님처럼 한가한 줄 알아? 후계 교육을 받느라 지금도 시간 겨우 뺀 거야.”

“그래? 열심히 사는구나.”

정말로 남 이야기하듯 하는 말에, 루카스의 머리를 스친 의문이 있었다.

“사샤 님은 공부 안 해?”

“사샤도 해.”

“어떤 거? 나는 벌써 세법도 배우고 있어.”

“인생을 즐겁게 사는 방법.”

“뭐야. 논다는 거잖아.”

푸시시 식었다.

분명 제가 사샤보다 앞서 달리고 있는 게 맞는데, 루카스는 이상하게 기분이 저조해졌다.

“다음에 엘루이든에 놀러 와.”

“꼭 대공저가 공녀님 집인 것처럼 말하네?”

“내가 사는 곳이 내 집이지.”

“틀려!”

“뭐가 틀린데?”

“집은 내가 주인인 곳이야. 주인이 아닐 때는 주인의 마음에 들도록 눈치 보면서 머물러야 하니까 그렇게 마음대로 초대하면 안 돼.”

루카스가 볼을 부루퉁이 부풀렸다.

“공녀님은 그것도 몰라?”

“응. 몰랐어. 루카스는 똑똑하구나.”

“벼, 별것 아냐.”

루카스는 애써 볼에 바람을 넣고 뾰로통한 척했다.

‘공녀랑 친해지지 말라고 했어.’

친해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미움받는 것이다.

송곳처럼 뾰족하게 굴 것을 다짐하며 루카스가 눈을 세모나게 떴다.

“루카스는 왜 본인을 그렇게 과소평가해?”

“내가? 아닌데.”

샤를리즈의 녹색 눈과 마주쳤다. 또 숲에서의 일이 떠오르고 말았다.

루카스는 눈을 꾹 감았다.

“아니. 과소평가하는 거 맞는데. 벌써 세법도 공부하고, 유일한 후계인데도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잖아.”

“후계 공부는, 이 나이에 벌써 다들 한다고 했어.”

“나는 안 그랬는데.”

‘자랑이야?’ 하고 톡 쏠 말까지 준비했는데, 루카스는 정작 입을 우물거렸다.

“아, 그리고 또 있어. 숲에서 내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나와 줘서 날 살려 줬잖아. 공작 각하께서는 내가 공자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정말 나를 가만 안 두셨을 것 같았거든.”

“나, 나 갈래.”

루카스가 벌떡 일어났다.

“조심히 들어가. 배웅은 못 한다.”

휙 돌아선 아이가 응접실을 나섰다.

* * *

밤.

늦은 시간이지만 나는 며칠 전 노아에게 전달받은 문건을 확인했다.

제법 섬세하게 얼굴이 묘사되어 있기까지 한 상세한 보고서였다.

[바이에르 공자를 주시했던 적이 있어 조사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황후가 바이에르 공작도 아니고 공자를?]

[예. 당시 황후가 회임했다고 착각한 시기였던지라,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을 세력가의 아이들을 조사해 볼 것을 명했었습니다.]

원작에서 한 줄로 스쳐 간 시기였다. 저 상상 임신으로 황후는 본인이 불임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놈의 끄나풀 정체는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있다.

“생긴 건 멀쩡한데 인성이 개판 났네.”

영 이상한 놈이 애 옆에 붙어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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