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루카스는 펜을 쥔 주먹을 열심히 움직였다.
[아, 그리고 또 있어. 숲에서 내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나와 줘서 날 살려 줬잖아. 공작 각하께서는 내가 공자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정말 나를 가만 안 두셨을 것 같았거든.]
어깨가 움찔 떨렸다.
[키우는 개가 아파도 걱정하는 게 사람입니다.]
[잘하셔야지요.]
다시 열심히 펜을 움직이던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누구신데?”
“리엔타 공녀님이십니다.”
“뭐? 왜 또?”
루카스는 툴툴거리며 의자에서 내려왔다.
아이가 팔을 위로 뻗지 않아도 잡는 위치에 설계된 문고리를 돌리고 밀자 커다란 문이 가볍게 열렸다.
“약속 안 했으니까 가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자, 잠깐만! 내가 직접 가서 말할게. 다시 이렇게 오는 일 없도록.”
그런 소년이 귀엽다는 듯 시녀가 소리 없이 웃었다.
“예, 도련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도 그 응접실이었다.
루카스는 대충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온 겨울 햇살을 맞고 있는 공녀에게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쉽게 말을 걸 수 없는 분위기. 고압적인 성격이 당연한 분위기. 아무리 깎아내려도 결국은 태생부터 다른 분위기.
루카스는 그것이 부러웠다.
“왔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야?”
“저번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잖아.”
“동의한 적 없어.”
“그럼 다음에는 공자가 와. 이건 사샤에게 허락받고 하는 초대야.”
“……사샤 님이 나 오라고 했어?”
“친구 사이잖아?”
“그, 그렇긴 한데.”
그러다가 루카스는 화드득 고개를 들었다.
‘또 말려들었어. 또!’
“그럼 오늘은 이만 가. 나 공부하느라 바빠. 그리고 이렇게 찾아오지도 말고.”
“왜? 공부해야 해서?”
“그래.”
“루카스는 정말 공부를 좋아하는구나.”
바보 공녀님.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루카스가 속으로 툴툴거렸다.
“공작 각하께서도 루카스가 공부만 하느라 걱정이라고 하셨어.”
“……진짜?”
“내가 감히 공작 각하를 언급하며 거짓말을 할 수 있겠니?”
샤를리즈가 픽 웃었다.
“엘루이든에서 사샤와 시간을 보낼 때는 놀게만 하라고 그러셨거든.”
“그러셨다고……?”
“정확히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루카스가 공부만 해서 선황자 전하를 즐겁게 해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군.]
“……뭐야. 아니잖아.”
“저건 루카스는 열심히 공부하는 착실한 아이이고, 이렇게 미리 말해 두기까지 했으니 행여나 루카스랑 노는 것 재미없다고 상처 주지 말라는 뜻이야.”
“저 말이?”
“그리고 이런 말씀도 하셨지.”
[루카스는 갑자기 불평을 쏟아 낼 수도 있어. 타고난 성정이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겠지.]
루카스는 통통한 입술을 깨물며 샤를리즈의 해석을 기다렸다.
“루카스는 모든 걸 너무 잘 참는 어린이라서 정말 힘들 때까지 버티느라 드러내지 않으니 잘 챙기라는 의미야.”
“거짓말 같아…….”
“루카스. 말이 아니라 행동을 봐. 공작 각하께서는 정치가가 아니라 기사시잖아?”
샤를리즈가 루카스 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말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그러니 말뿐인 진심을 믿지 마.”
* * *
비슷한 시각. 황후궁.
카타리나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리엔타 공녀의 피후견인도 경비대에서 조사하기로 했는데 막상 황실 제1기사단의 기사 둘이 취조했다고 합니다.]
[기사단장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개는 어디에나 있었다.
그러니 황제를 최우선으로 호위하는 황실 제1기사단에도, 수도 경비대에도 그녀의 귀가 있는 것은 대단할 일도 아니었다.
‘황제겠지.’
카타리나가 혀를 찼다.
‘면책권을 돌려받으면 모두 끝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근시안적으로 행동하는지.’
칼릭스는 상관없다. 샤를리즈가 약혼녀이니 나서기는 했다지만, 애초에 샤를리즈를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도 않을 터.
‘약혼은 공녀가 분명 대공의 약점을 잡아서 진행하는 것이겠지.’
더군다나 면책권을 빼앗기는 것은 리엔타 공작이지 본인도 아니니 적극적으로 나설 이유도 없을 터다.
문제는 리엔타 공작이었다.
황제는 공작의 부정父情을 딸아이를 위해 면책권도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카타리나는 그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공녀가 죽는다면 모든 권력을 다 훌훌 털어 버리고 영지에 처박혀 평생을 썩을 수준이야.’
카타리나가 엄지와 검지를 짜증스럽게 마찰했다.
황제가 공녀의 명예를 훼손한 순간을, 그는 절대로 잊지 않을 거다.
리엔타 공작은 몸집이 크다. 움직이는 과정에서 여러 가문이 휩쓸릴 것이다.
‘자칫했다가는 칼릭스에게만 좋은 일이 될지도 모르거늘!’
붉은 눈이 섬광처럼 짧은 순간 선득하게 빛났다.
카타리나는 엷게 웃으며 찻잔을 손에서 놓았다.
‘황제가 더 일을 벌이기 전에 기사단장의 독단으로 덮어씌워서 끝내야겠군.’
그녀의 실행력은 언제나 빨랐다.
* * *
“황후 폐하께서 속이 많이 상하셨겠어.”
어느덧 시간이 흘러 늦은 오후.
내가 목격한 진짜 미래의 조각은 정말로 내게만 중요한 것이었다.
“공녀에게 레몬 셔벗을 더 줘.”
칼릭스가 짧게 웃었다.
“셔벗을 이리 좋아하는 줄 알았다면 주방장에게 자주 부탁할 것을. 달리 좋아하는 음식은 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