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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86) (86/232)

86화

‘그렇군.’

나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하는 일이 정신 건강에 얼마나 좋지 않은지, 나는 뼈저리게 알고 있다.

‘다음에는 나도 이렇게 대응해야지.’

좋은 깨달음을 얻었다.

칼릭스와 저녁 인사를 마치고 나는 내 방에 도착했다.

커튼을 내려 창문을 꼭꼭 가린 후 손등을 꾹 눌렀다.

‘이제 사샤한테 가세요.’

돌아보지도 않고 바삐 갈 줄 알았는데 신수는 그 자리에 있었다.

‘뭐예요?’

―……아이는 어떤 동물을 좋아할까 궁금해서.

‘이거 말 돌린 거죠?’

나는 눈을 좁혀 신수를 바라봤다.

‘그래도 답은 해 드리겠습니다. 사샤는 다람쥐를 좋아해요.’

―너는 눈치가 없는 것 같다가도 눈치가 빠른 이상한 인간이다.

‘욕하실 거면 질문에 답이나 해 주십시오.’

―이만 가겠다.

‘잠시만. 조금만!’

―……휴. 어쩔 수 없지. 뭐냐?

‘저, 신성력 왜 있는 겁니까?’

신수는 ‘양심이 없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쌩하니 사라졌다.

‘대놓고 물어보면 안 되나 보다.’

나는 저번, 사샤가 신수와 수호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하고자 칼릭스와 머리를 맞댔던 때를 반추했다.

[조건은 세 가지 중 하나만 충족하면 돼. 그중 두 가지는 직계 황족만 가능한 방법이야.]

기준치 이상의 신성력.

피로 직계 황족임을 증명하는 것.

신탁과도 같은 구절에 성립되는 상황.

하지만 실은 세 가지 모두 직계 황족만 가능한 방법이라고 보는 게 맞다.

‘정도 이상의 신성력은 황족 말고 가질 수 없으니까.’

그런데 나한테 그게 있었습니다.

‘교황 이야기 꺼내니까 공작이 엄청나게 당황하던데, 교황을 만나 보긴 해야겠군.’

[리엔타 공작비의 죽음에 대해 파헤쳐라. 도저히 알 수 없으면 공작에게 약이라도 먹여 실토하게 만들어!]

놈이 이런 명령을 내렸던 것을 보면 나도 알아야만 할 것 같다.

‘원작 끝날 때까지 영지에 박혀 있다가 게으른 부자가 되려고 했는데…….’

과장 조금 보태 내가 황제보다도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다.

어깨가 축 처졌다.

‘……직면한 일부터 하나씩 처리하면 언젠가 끝이 나겠지.’

일단은 바이에르에 있는 끄나풀부터 잡아내는 게 먼저였다.

* * *

오늘도 바이에르 공작저를 찾았다. 이번에는 사샤도 함께였다.

사샤 앞에서 이 나이 먹고 루카스랑 티격태격하는 꼴 보이기는 멋쩍었다.

바이에르 공작에게 미리 방문을 허가받았지만, 루카스에게도 따로 서신을 보낸 후 방문했다.

‘그런데 왜 안 오지?’

오늘도 공부에 열중했나.

얌전히 앉아 응접실을 눈으로만 구경하고 있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샤를 님. 매번 혼자 오셨어요?”

“응.”

“다음에는 저도 함께 와요.”

“왜?”

‘설마……!’

벌써 또래 친구가 더 좋은 나이가 되어 버린 건가.

아주 먼 훗날일 줄 알았는데.

충격받아 슬퍼져 있는데, 작은 온기가 내 손등을 덮었다.

“이곳 굉장히…….”

사샤가 자그마하게 중얼거렸다.

“쓸쓸한 느낌이 들어요.”

제국의 3대 공작가답게도 바이에르의 응접실엔 테이블과 의자 말고도 다른 것들이 많았다.

은회색 매가 그려진 붉은색 태피스트리. 교차한 쌍검. 이국의 도자기와 그 밖의 온갖 진귀한 물건들.

사용인들의 손길이 매일같이 닿았을 공간은, 그래, 외로워 보였다.

나는 손을 뒤집어 아이의 작은 손을 꼭 맞잡았다.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녀가 조심스러운 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도련님께서 갑자기 열이 오르셔서 오늘 만남은 어렵겠다는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또 열이 올랐다고.’

“루카스가 많이 아파?”

“많이 편찮으신 것은 아니지만…….”

시녀는 조금 머뭇거렸다.

나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혹 전염성이 있을까 봐 염려되니 병문안은 정중히 거절하겠다고도 하셨습니다.”

사샤가 눈을 깜빡였다.

“그럼 아이 대신 내가 쾌유를 빌어 주고 오고 싶은데, 그것도 안 될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돌아온 시녀는 안내하겠다며 앞장섰다. 나는 제이 경에게 사샤를 맡기고 그녀를 따라갔다.

* * *

“도련님. 리엔타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

두꺼운 커튼을 내려 침실 내부는 꽤 어두웠다. 커다란 침대 귀퉁이가 볼록 솟아 있는 것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이제 오지 말라는 말 하려고 들어와도 된다고 했어.”

열이 난다더니 목소리도 잠겨 있었다.

평소 성격이라면 헛기침을 하고도 남았을 루카스는 그저 말을 계속 이어 갔다.

“나는 공부할 시간도 부족해. 공녀의 헛소리 들어 줄 시간은 더 없어. 그러니까 오지 마.”

“…….”

“선황자 전하도 마찬가지야. 앞으로 다 오지 마.”

“무슨 일이 있었어?”

둔덕이 어둠 속에서 조금 흔들린 것도 같았다.

“공녀님이 미워.”

얼마간의 침묵을 깬 것은 확연히 물기가 밴 목소리였다.

“왜 기대하게 만들었어? 어머니는 아직 나를 싫어하시는데…….”

“…….”

“공녀님 때문에 나는 비참해.”

“바이에르 공작 각하가 너를 싫어한다는 거, 각하께 직접 들은 건 맞니?”

“맞아.”

“각하가 너를 싫어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해석한 것도, 네가 한 게 맞아?”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야?”

루카스가 벌떡 일어났다.

소년의 눈은 흠뻑 젖어 있었다.

“내 부친이신 리엔타 공작께서 나를 아낀다는 이야기, 들은 적 있니?”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런데 나는 네 나이 때는 전혀 몰랐어. 아버지가 나를 미워한다고 확신했거든.”

어쩌면 나는 루카스를 통해 내 과거를 보았는지도 몰랐다.

바이에르 공작에게 루카스 주변에 당신과 아이의 골을 깊게 만드는 작자가 있으니 색출하라고 하면 금방 해결될 일에 이렇게 시간을 들이는 것도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타인은 절대로 봉합할 수 없는 상처가 있다.

때로는 덧나 조금만 건드려도 진물이 흐르고, 때로는 흉터처럼 흔적만 남아 건드려도 아프지 않지만 잊을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유모가 그랬어. 아버지는 나를 싫어한다고. 그래서 전장에 가신 거라고.”

“하지만 그건…… 리엔타 공작 각하께서 그때 총사령관이셔서 그랬던 거잖아.”

거의 이십여 년 전.

루카스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의 일이지만, 면책권을 하사받은 이례적인 사안의 배경으로써 아직도 회자되는 이야기인 덕택에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런 거야.”

루카스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믿고 있는 사람이 혀를 간교하게 놀리면, 그렇게 진실을 보는 눈이 흐려지기도 해.”

숙련된 시녀는 사샤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머뭇거렸다.

루카스에게 처음 생긴 또래 친구가 멀어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것이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 저택에서 사랑받고 있다고.

“루카스. 다시 생각해 봐. 정말로 바이에르 공작 각하께서 너를 싫어하시는지. 후계로서 염려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지.”

나는 오도카니 앉아 있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뗐다.

“이만 갈게.”

* * *

아직 루카스의 침실이 있는 복도를 벗어나기 전이었다.

누군가 내게 아는 체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리엔타 공녀님.”

어깨를 조금 넘는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은 현학적인 인상의 남자였다.

“저는 바이에르 공자님의 가정교사인 헤레스 베론이라고 합니다.”

“그렇군.”

“공녀님. 죄송하지만, 혹시 도련님의 침실을 방문한 차이십니까?”

“그건 왜 묻지?”

“공녀님께서 최근에 저택을 자주 방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도련님께서는 공작 각하의 뒤를 훌륭하게 잇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열심히 수학하고 계십니다.”

나는 잠자코 말을 듣는 척했다.

“공녀님께서 방문하시고 나면, 도련님은 울적한 얼굴을 하십니다. 이튿날 공부하실 때 마음을 잘 잡지 못하시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오지 말라?”

“주제넘은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예, 그렇습니다.”

“그러게. 아주 주제넘어.”

나는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뭐라도 된 줄 알고 공자를 쥐락펴락하더니 머리가 돌아 버렸어?”

“예? 그게 당최 무슨 말씀이신지…….”

“지루하네.”

“공녀님께서 착각하신 게 아닐는지요?”

‘‘착각’에 강세를 두었군.’

의도가 보이는 선택이었다.

안경 너머 눈이 나를 비웃는 듯했다.

나도 빙긋 웃었다.

‘너 잘 걸렸다.’

퍼억―

그리고 그 얼굴을 주먹으로 갈겼다.

* * *

똑똑.

“무슨 일이지?”

바이에르 공작이 서류를 덮으며 미간을 구겼다.

마른 입술을 적신 시녀가 무겁게 고했다.

“리엔타 공녀님과 헤레스 경 사이에 마찰이 있었습니다.”

바이에르 공작이 눈썹을 꺾어 올렸다. 공녀와 아이의 가정교사 사이에 마찰이 일어날 건수 자체가 있나 싶었던 것이다.

돌연 공작의 눈이 좁혀졌다.

“루카스가 그 마찰의 이유인가?”

“아닙니다. 도련님께서는 침실에 계셨습니다.”

“공녀가 방문했는데 루카스는 왜 침실……. 되었다. 일단 안내하게.”

“예. 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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