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그렇게 도착한 곳은 응접실이었다.
“…….”
바이에르 공작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마찰이라더니 일방적이었나 보군.’
샤를리즈는 뚱한 얼굴이었고, 헤레스는 광대에 멍이 든 채로 코 밑에 손수건을 대고 있었다.
“공녀부터 말해 보게.”
“맞을 짓 해서 때렸습니다.”
“……보다 상세하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건 선생이 해 봐.”
“2층 복도에서 리엔타 공녀님을 마주쳤습니다. 제가 주제넘게 행동한 것이 맞습니다. 루카스 도련님과의 만남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바이에르 공작이 눈매를 좁혔다.
그녀는 본인이 말한 대로 주제넘게 행동한 사용인을 질책하는 대신 일단은 질문했다.
“선생은 어째서 공녀에게 그런 말을 했나? 내가 공녀의 방문을 허가하였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을 텐데.”
헤레스 베론.
바이에르의 가신 가문인 베론 자작가의 삼남으로, 루카스가 크게 다칠 뻔했을 때 몸을 날려 아이를 구하고 영구적인 부상을 입어 다시는 검을 들 수 없게 된 비운의 기사였다.
“……루카스 도련님이 걱정되었습니다.”
“루카스가?”
헤레스가 머뭇거렸다.
“말해 보게.”
“……루카스 도련님께서 리엔타 공녀님을 만나고 오시면 늘 울적한 얼굴을 하셨습니다.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시고, 딴생각에 잠겨 있느라 저번에는 검술 수업 때 하마터면 다치실 뻔한 적도 있으셨고요.”
바이에르 공작이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공녀. 그대의 기분이 상했을 수도 있다는 점은 알겠어. 나도 선생에게 실망스럽군. 선생답지 않게 경솔했어.”
“죄송합니다. 각하.”
“공녀. 기분이 풀릴 만큼은 아니어도 선생을 용서해 주게. 루카스를 많이 걱정해서 그랬던 모양이야. 그 점은 내가 대신 사과하지.”
“아닙니다. 공작 각하께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공작은 헤레스에게도 사과하라며 샤를리즈더러 넌지시 눈빛을 주지 않았다.
친자식도 냉정하게 판단하는 그녀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이 일은 명백히 헤레스의 잘못으로 촉발된 것이 맞았다.
“리사. 신전에 연락해 성수를 받아 오게.”
아무리 후계의 가정교사라곤 해도 일개 피고용인에게 선뜻 주기에는 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한 공작도, 명을 받들기 위해 응접실을 나서는 시녀도, 당사자마저도 당연하게 여겼다.
“죄송합니다. 각하.”
“아니야. 루카스가 선생의 얼굴을 보면 놀랄 테니.”
헤레스가 면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줄곧 잠잠히 있던 샤를리즈가 입을 연 것은 그 순간이었다.
“루카스가 선생을 많이 따릅니까?”
“그래. 그래서 헤레스가 고생이지. 루카스가 새로운 선생들을 거부해서 헤레스 혼자 모든 교육을 전담하고 있어.”
공작이 나직하게 혀를 찼다.
“신기하네요.”
샤를리즈가 고개를 기울였다.
“저는 선생이 여럿인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샤를리즈의 시선이 스르르 미끄러져 헤레스에게 닿았다.
“이렇게 온유해 보이는데, 루카스가 종종 하는 말은 너무도 신랄해서 말이에요.”
“그건 무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대화를 끊고 울렸다.
“루카스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
* * *
이쯤 올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도 더 타이밍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졌다.
“루카스. 공녀가 기별하고 방문했는데 어째서 침실에 있던…….”
바이에르 공작은 루카스의 얼굴을 목격하고 말을 멈췄다.
아이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 밑이 발갛게 부어 있었고,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채였다.
“몰골이 왜 그런 게야?”
걱정되니까 왜 울었는지 얼른 말하라는 뜻이다.
“도련님!”
성격 파탄자가 단숨에 루카스에게 달려갔다. 무릎을 굽히고는 벌벌 떨리는 손을 아이에게 뻗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것입니까? 예?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인성이 출가한 놈이 어느 순간 나를 돌아보았다.
“혹시…….”
“루카스. 왜 가만히만 있어. 직접 말해 보아라.”
“……그것보다 선생님 얼굴은 왜 그런 거예요?”
“아, 이런.”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놈이 펼치는 연기를 응시했다.
‘손수건도 일부러 두고 간 거겠지.’
그가 황급히 오른손으로 코 아래를 가렸다.
“내가 때렸어.”
“왜요?”
“맞을 만해서.”
루카스는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 시선이 어찌나 강렬한지, 꼭 노려보는 것도 같았다.
“도련님. 이건……. 제가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리엔타 공녀님께 뭐라 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상하네.”
루카스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나한테 그런 종자와 연이 이어져 봤자 쓸모없이 감정 소모만 하게 될 뿐이라고 했으면서 왜 공녀를 두둔하는 거야?”
응접실이 죽음과도 같은 침묵에 휩싸였다.
헤레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예? 무슨 말씀을 하시…….”
“어머니. 저를 걱정하셨어요?”
아이의 얄팍한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렸다.
“키우는 개가 아플 때 걱정하는 것보다 더요?”
“베론. 설명하게.”
“아닙니다. 아닙니다. 각하! 도련님. 말씀해 주십시오. 도대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으셨…….”
“나는 선생님이 좋았어.”
힘없는 목소리였다.
“운 좋게 형제가 없어서 후계가 될 수 있었던 나를 구해 주고, 선생님이 되어 주고, 친구가 없는 나한테 친구 같은…….”
루카스가 입을 꼭 닫았다.
공작이 사납게 말했다.
“더 말할 것 없다.”
“사실은…… 사실은 선생님이 아직도 조금은 좋아.”
“루카스! 그만 말하라지 않았어!”
말이란 신기해서, 입 밖으로 낸 순간 깨닫게 된다. 언어로 규정한 감정은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 버린다.
표현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도 있었지 하고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을 순간은 마치 조각나 박힌 유리처럼 마음에 박혀 빼낼 수가 없어지는 거다.
“헤레스 베론.”
제국 최북단 설산의 깊은 바람도 이보다 싸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이가 놀랄까 봐 한껏 낮춘 목소리였으나, 짙은 분노가 새겨져 있었다.
만약 이번에도 피오니 타티스와 동일한 종류의 흑마법이 걸려 있다면, 발동될 조건을 충족한 셈이다.
바이에르 공작이 저 쓰레기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도망치면 안 되지.’
너는 이렇게 죽으면 안 돼.
나는 시녀를 쳐다봤다. 눈물이 고인 채 입술을 짓씹고 있던 그녀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한번 깜빡이더니 얼른 손을 뻗었다.
아이의 눈이 가려진 것을 확인하고 나면 거리낄 것이 없었다.
“큭!”
종아리를 걷어차 무릎을 꿇게 하고, 얼굴을 아래로 눌렀다.
[―이, 이 성물이 왜 그런 용도로 쓰이고 있는 게냐?!]
이미 한번 끄나풀을 어처구니없이 놓친 적 있다.
언제 기회가 생길지 모르니 바이에르 공작저를 방문할 때마다 항상 지참한 성물을 다른 손으로 작동시켰다.
그리고 그에게만 들릴 크기로 속삭였다.
너, 결코 편한 최후를 맞지 못할 것이라고.
* * *
[그, 그것이 사실인가?]
에리히는 오들오들 떨었다.
[나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되물었네만 영식은 나보다 더하군!]
주변을 살핀 어느 영식이 다시금 그 말을 했다.
[리엔타 공녀가 오르골을 틀어 놓고 사람을 흠씬 팼다지 뭔가.]
“아니겠지. 과장이겠지.”
누구를 쥐어 팼느냐고 묻자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야말로 과장의 증거였다!
‘저, 저게 진짜면 진짜 또, 또라…….’
에리히는 불현듯 기시감을 느꼈다.
저번에도 공녀를 떠올리다가 노크 소리가 울렸었는데.
똑똑.
에리히가 의자에서 펄쩍 튀어 올랐다.
* * *
나는 오랜만에 로나터스 후작저를 찾았다.
그놈의 끄나풀1을 생포해 시간도 났고, 칼릭스에게서 기다리던 말을 드디어 들었기 때문이다.
[공녀가 페르난 백작저에서 구한 그 독약, 실마리가 잡혔어.]
후후후.
나는 손마디를 뚜둑 꺾었다.
라베트랑 노닥거리다가 튜베롯 봐야지. 목표물을 보며 의지를 굳세게 다지는 것이다.
“공녀님.”
앗, 눈부셔.
연보랏빛이 도는 실내용 드레스를 입은 라베트는 빛이 났다.
“잘 지내셨어요?”
“응. 잘 지냈어.”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하고 보니 에리히 놈이었다.
아까 눈부셔서 눈 찡그릴 때 시야 구석에 있었나 보다.
“아,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오랜만이군.”
에리히가 또 숨을 몰아쉬었다.
“마, 마침 공녀님께 드릴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오라버니께서요?”
‘……야!’
“그래. 공녀님께서 내게 공녀님과 관련된 이야기와 현재 이슈인 이야기들을 취합해 알려 달라고 하셔서 말이다.”
라베트가 서운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제가 할 수도 있었는데요.”
“……라베트는 이런 자질구레한 일 부탁하기 아까워.”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라베트를 달랬다.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공녀님께 도움이 된다면 저는 늘 기쁠 거예요.”
라베트가 예쁘게 웃었다.
그때였다.
“아가씨. 말씀 중 죄송합니다만, 가주님께서 부르십니다.”
“가 봐. 라베트.”
“죄송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겠다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아버지께서 라베트를? 도대체 어쩐 일로 부르셨는지 너무 걱정이 되는군. 앉아 있을 수가 없겠어!”
“영식은 어딜 가? 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