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언제 벌떡 일어났냐는 듯 에리히가 다시 잽싸게 앉았다.
“알아 왔다며. 말해 봐.”
이렇게 말하고 나니 에리히한테는 어렵겠다 싶었다. 주제 없이 그림 그리라는 게 가장 골치 아픈 것처럼.
“영식이 생각할 때 가장 뜨거운 화제는 뭐야?”
“그것은 바로…….”
에리히가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뭔데.”
“공녀님이십니다.”
‘예?’
나는 당황했다.
‘뭐, 모르겠지만 안 좋은 거겠지.’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
“있습니다!”
에리히가 갑자기 의욕이 넘치는지 크게 외쳤다.
조사한 결과에 뿌듯함을 느끼다니.
‘의외로 부려 먹기 아주 좋은 성격이잖아?’
앞으로 더 부려 먹어야지.
“황실 제1기사단장인 일리든 포르테 경이 휴가서를 제출했답니다.”
“…….”
“‘그’ 포르테 경이 말입니다.”
“왜?”
“그것은 아직……. 아직! 이유를 아는 이들이 없다 보니 더 화제입니다.”
내가 별일 아니라고 여겨 침묵했다고 생각했는지, 에리히는 눈동자를 굴리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 아직도 부족하십니까?”
에리히가 다섯 번째로 눈을 굴렸다.
“나머지는 서신으로 전달해 줘.”
“예, 그러겠습니다.”
“내용이 방대해 작성하려면 바쁘겠군.”
“예. 내용이 방, 방대해 시일이 꽤 소요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공녀님께 서신을 부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단축하기 위해 먼저 나가 봐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어차피 라베트 보러 온 거였어.”
“예? 예……. 그러셨군요.”
에리히는 허망한 얼굴로 응접실을 나섰다.
나는 드디어 조용해진 공간에서 생각에 잠겼다.
일리든 포르테가 휴가를 신청했다는, 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은 별것이었다.
입단한 이래 단 한 번도 휴가서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휴일에도 매일같이 나와 서너 시간은 꼭 훈련을 하고 귀가했다고 한다.
그 젊은 나이에 괜히 기사단장의 자리까지 오른 것이 아니었다.
‘공작이 황제에게 항의한 게 일주일 전쯤이었지.’
내막이 아직 퍼지지 않은 것을 보면, 네가 뒤집어쓰라며 일리든을 압박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나 보다.
[조사실에 로단테만 입실이 가능하다며 동석을 거부당했습니다.]
[사전에 고지받지 못한 사항인가?]
그야말로 정석 중 정석.
일리든 포르테가 유명한 두 번째 이유다. 연줄을 대려는 시도는 모두 묵살하고, 청빈하게 생활하는 것도 모자라 본인의 사감을 일에 절대로 섞지 않는다.
그리하여 원작에서 황후는 생각한다.
마침 잘됐다고 말이다.
‘리엔타 공녀가 후견하는 아이 있잖아요. 그 사생아요. 수도 경비대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을 때 경비대의 기사가 아니라 황실 1기사단원들이 조사했다는데 그러라고 명령하신 게 포르테 경이시래요.’
‘아, 그래서 포르테 경이 사임하신 거로군요?’
‘혹시, 의심스러운 점이 있었던 걸까요? 포르테 경이 괜히 그럴 분이 아니시잖아요.’
여기에 입김 좀 불어 넣으면 방향은 금세 이렇게 흐를 것이다.
‘실은 의심스러운 건 샤를리즈 리엔타인데 뒤에 공작이 버티고 있으니까 경비대장으로 조사시키고, 뒷배 없는 아이를 공략한 거 아니냐고 하겠지.’
나는 턱을 괴었다.
‘있는지도 모르는 내 명예, 훼손되든 말든 알 바 아닌데 이어질 사건이 문제다.’
스르르 테이블에 엎어졌다.
‘바이에르 공작가에 있는 끄나풀 잡았다고 좋아한 게 조금 전인데…….’
일 하나를 처리했더니 하나가 늘어 제자리가 되었습니다.
* * *
검지 길이의 작은 유리병은 상당한 액수를 자랑한다.
시간을 멈추는 마법이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주홍색 액체를 바라보며, 칼릭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로나터스 후작이 머무르는 장소는 라베트 로나터스가 철저하게 관리해 그녀와 가문의 집사만 출입이 가능합니다.]
[잠입해 후작의 용태를 살펴볼까요?]
일 년 전쯤 입수한 정보였다.
그때 칼릭스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때는 이상했다.
모든 일에 흥미가 없었고, 의무적으로 서류를 처리한 시기였다.
“저자에게 먹여 볼까요?”
리반이 이를 갈았다.
회상에 잠기기 적절하지 않은 장소에서, 칼릭스는 가볍게 웃었다.
“아쉽게도 양이 적어서 말이야.”
그들은 대공저의 지하 감옥과 연결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지상에 나오자, 리반이 고개까지 휙 돌려 뒤를 노려보았다.
집무실까지 용케도 침묵한 리반은 문을 닫자마자 입을 열었다.
“주재료가 튜베롯이라고 했지요.”
“로나터스 후작저에도 튜베롯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할 생각이라면 이번으로 다섯 번째야.”
“진짜 나쁜 놈들 아닙니까? 조롱하는 것이잖습니까.”
리반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나저나 튜베롯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시일이 꽤나 걸렸는지도 모르겠군요.”
“신의 날개로 조제되는 독약이라니, 낭만적이네.”
칼릭스가 유리병을 첫 번째 서랍에 넣었다.
달칵. 오래된 일기장의 열쇠를 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 * *
이제 열여섯은 되었을까 싶은 소녀의 주변은 휑했다.
이 장소가 성축일의 신전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야말로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소녀의 이름이 샤를리즈 리엔타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누구도 놀랍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예쁘게 생겼네요…….]
[쉿. 들어요.]
서늘한 시선이 닿자 그들은 필사적으로 모른 척을 했다.
휙 다시 시선을 돌리고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그제야 누군가는 감상을 말했다.
[성격이 대단하다는 말도 정말인가 봐요.]
[쉿. 이것도 들어요!]
남들이 모여 수군거리든 말든 멈춘 적 없던 발이 멈춰 섰다.
바람이 불었다.
한 방향으로 휘어지며 나풀거리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었으나, 정작 그 장면을 담은 눈은 건조했다.
[뭐야. 신기한 꽃이라더니 평범하잖아.]
그래도 남들 눈에는 예뻐 보인다니 꽃 몇 가닥을 꺾었다.
이튿날.
[받아요.]
곤란하다는 듯 칼릭스가 웃었다.
[신전의 군락에서 꺾어 온 건가?]
[벌금은 이미 냈어요.]
그러니까 어서 받으라고 꽃다발을 흔들자, 칼릭스는 “흐음.” 하는 소리를 내었다.
[미안해. 공녀. 나는 흰색을 좋아하지 않아.]
아닌 척 이쪽을 훔쳐보던 이들이 반응했다. 작은 수군거림이 왜 이리도 귀에 잘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역시 리엔타 공녀가 싫다고 돌려 말하는…….]
[공녀의 머리카락은 유독 환한 은발이니까…….]
샤를리즈가 눈을 치켜떴다.
[싫으면 말아요, 그럼.]
바닥에 던지고 꽃을 밟았다.
그리고 돌아섰다.
수군거리던 이들이 일시에 입을 닥쳤다.
그러든 말든 샤를리즈의 관심 밖이었다.
‘머리카락을 푸른색으로 물들일까?’
칼릭스는 푸른 장미를 좋아하니까.
자존심 따위 짓밟혀도 상관없을 만큼 그렇게 좋아했다.
* * *
“휴.”
나는 왼 손등을 꾹 눌렀다.
―뭐냐.
‘꿈 안 꾸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신수와 계약을 한 후. 칼릭스와 눈을 마주하지도 않았는데 종종 이렇게 꿈을 꾸고는 했다.
꿈이 워낙 생생해서 그런지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모른다.
신수는 쌩하니 사라졌다.
저번에 다시 눌렀더니 신수가 날아와 몸통으로 딱밤을 때렸던 것을 떠올리고 손을 물렸다.
“그런데 과거는 처음이네.”
놀랍게도 실제 과거와 똑같았다. 내 기억 속의 칼릭스는 아주아주 흐리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미남은 어릴 때도 잘생겼구나…….”
현실 도피를 시도했으나 무참히 실패했다.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다이어리를 펼쳤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져서 헷갈려.”
눈물을 슬쩍 훔치며 펜을 놓고, 의자에 앉아 멍을 때렸다.
‘교황 이야기에 공작이 기겁했던 걸 보면 그것도 진짜였을 테고. 그럼 다른 것들도 진짜가 맞겠군.’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꿈에서는 목소리도 들리니 이왕이면 그놈도 등장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좋을 텐데.
아주 좋을 텐데…….
그러던 중, 이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만약 칼릭스의 외모만 잊은 게 아니라 칼릭스와 관련된 기억이 없어졌다면, 나는 기억 상실증에 걸린 수준이었겠다고.
* * *
로나터스의 하인은 눈을 의심했다.
“도련님……?”
아직 열한 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각이건만, 외출복을 입은 에리히의 뒷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에리히는 바쁘게 걷고 있었다.
‘이른 시각부터 어디를 가시는 거지?’
무심코 생각한 하인은 스스로 답을 찾았다.
에리히가 갈 곳이라면 여러 군데가 있지만, 모두 공통점이 있다.
사교 클럽이라는 것이었다.
‘노는 건 정말 좋아하신다니까.’
예전이라면 추천서를 미리 받아 다른 가문의 문을 두드려 봐야 하나 밤마다 고민했겠지만, 하인은 시원하게 몸을 돌렸다.
라베트 아가씨께서 가주위를 이어받게 될 테니 그의 직장은 앞으로도 굳건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