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여어, 에리히.”
다트 핀을 고르던 남자가 손을 들었다.
에리히는 그 손에 제 손을 부딪쳐 성의 없이 인사했다.
“왜 이렇게 죽상이야? 어제 공녀 이야기 듣고 이런 얼굴로 후다닥 가더니.”
“공녀 이야기 좀 그만하면 안 되나?”
에리히가 질색했다.
“야, 나도 그 얘기 하기 싫은 사람이야.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남자가 핀을 던졌다.
“에리히. 봤냐? 명중했……. 뭐야, 어디 갔어.”
어깨를 으쓱한 남자는 김이 새 투덜거리다가 다시 다트 판에 집중했다.
한편, 에리히는 정말로 딱 죽을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내용이 방대해 작성하려면 바쁘겠군.]
하나도 안 방대했다.
공녀가 이런 일 두 번 맡길까 봐 대충해서 넘길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 사이 에리히는 필사적으로 됐다.
방금도 그는 샤를리즈가 없는 자리에서마저 그녀를 ‘공녀님’이라고 칭할 뻔했다.
우아한 선율을 들으며 얻어터지는 지독한 기억을 간직하고 싶지 않았다!
‘미치겠군. 하는 이야기가 다 거기서 거기인 것을.’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빠르게 걷는 에리히의 어깨를 누군가 두드렸다.
“뭐……. 아, 오랜만이군.”
* * *
“어라…….”
초대장을 집어 들어 대수롭지 않게 뒤집은 내가 낸 소리였다.
로제타, 이리안, 라베트, 아니면 카타리나 황후밖에 더 되겠냐며 확인한 위치에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는 로단테의 손을 잡아 주었다.
참고로 로단테도 나랑 같이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사샤를 안아 내렸다.
“엔젤이 다음에 또 만나자고 했어요.”
마치 배를 꾹 누르면 특정 단어를 말하는 인형처럼 사샤는 가만히 있다가 저 말을 불쑥하고는 했다.
그렇다.
이틀 전, 엔젤까지 넷이서 만나 공작저에서 티타임을 가졌다.
[아카데미에 가기 전에 벨, 아니 사샤 님을 만나 뵙고 싶어요. 가능할까요?]
바람이 제법 추워 유리 온실에서 따끈한 차를 마셨다. 나는 케이크를 공략했고, 아이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에, 엔젤?]
로단테는 드물게 당황했다.
갑자기 엔젤이 사샤의 손목을 잡고 저 멀리 갔기 때문이다.
[괜찮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보지.]
나는 팔랑팔랑 끌려가는 사샤의 뒷모습을 보며 로단테를 안심시켰다.
그 이후로 사샤는 이 상태였다.
“엔젤이 제 점을 밤하늘에서 오려 붙인 것 같다고 했어요.”
‘그거 내가 했던 말이기는 한데…….’
엔젤이 한 거라고 치자.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미리 만날 수 있도록 해볼걸.’
나는 사샤의 손을 단단하게 잡았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 이름을 소개한 데칸드 백작가의 집사가 부드럽게 웃으며 우리를 안내했다.
저런 따뜻한 미소, 몹시 낯선 것이어서 나는 어색하게 그를 따라갔다.
“가주님. 리엔타 공녀님과 로단테 님, 그리고 선황자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무언가 튀어나와 내 다리를 잡았다.
“곤녀님!”
“도련님. 공녀님께서 놀라셨겠습니다.”
“원 녀석도.”
데칸드 백작이 아이를 안았다. 그간 품에서 떨어뜨려 놓지를 않았는지 매우 능숙한 자세였다.
“공녀는 그간 잘 지냈소?”
“예.”
“아. 아이의 이름은 아인스요. 아인스 데칸드.”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그렇지? 우리 딸아이가 많이 고심해서 지었어.”
아인스가 조부의 품에 안긴 채로 내게 팔을 뻗었다. 마치 수영을 하는 것처럼 짧은 팔이 허공에서 휘적거렸다.
“이놈아. 떨어지겠다.”
밉지 않게 타박한 백작이 아이를 더 단단히 고쳐 안으며 응접실로 들어가자는 눈짓을 했다.
테이블 위에는 찻잔과 티 푸드 대신 다른 것들이 놓여 있었다.
“저것은…….”
로단테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린아이가 보기에도 신기한가? 괜찮은 유물들이 들어와서 내 리엔타 공녀에게 보여 주고 싶어서 말일세.”
백작이 허리를 굽혀 가며 소파에 소중히 내려놓은 아인스는 쪼르르 달려와 내 다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로단테 군이 궁금했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로당떼!”
백작이 웃었다.
데칸드 백작이 손자와 극적으로 해후했다는 이야기는 한때 수도 사교계를 휩쓸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금세 식었다.
사교계의 모든 이야기는 본래 금세 온도를 잃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달랐다.
데칸드 백작이 칩거해 더는 새로운 이야기가 흘러나오지 않아서 변두리로 밀려난 화제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이랑 대화를 많이 했나 보다.’
“공녀를 귀찮게 하면 안 되지.”
“괜찮습니다.”
나는 무릎을 굽혀 아인스와 시선을 맞췄다.
“잘 지냈니?”
아인스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끄덕했다.
‘까, 깜짝 놀랐다!’
가뜩이나 몸에 비해 머리가 큰데 세게 흔드느라 아이의 몸이 뒤로 휘딱 넘어갈 뻔한 것이다.
아인스는 장난이라고 생각했는지 까르르 웃으며 좋아했다.
또 뒤로 넘어가는 몸을 황급히 안아 들어 집사에게 보냈다.
‘사샤 테라피가 필요해.’
[심신이 안정되고, 남은 하루를 살아갈 힘을 주고, 다음 테라피를 고대하느라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학계에 보고해도 손색없는 효능입니다.]
저 주장은 당연히 리반이 했다.
가설을 뒷받침하는 피실험자로는 나도 있었다.
‘어?’
팔을 슬쩍 뻗으면 늘 잡아 주는 작은 손이 없었다.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자, 아이는 아인스 근처에 있었다.
“안녕, 아인스? 나는 사샤야.”
“따따.”
“‘샤’ 발음이 어렵구나. 괜찮아. 곧 잘할 수 있을 거야. 나도 그랬거든.”
“따! 따!”
나이가 비슷한 아이의 귀에는 따따가 아니라 다르게 들리나 보다.
그사이, 로단테와 대화를 나누던 데칸드 백작이 나를 찾았다.
‘성물이 또 있으려나?’
“공녀는 정말로 유물을 좋아하는가 보군! 눈이 반짝거려. 나도 그렇다네.”
나는 눈을 한층 더 반짝였다.
‘여섯 점이나 되네.’
백작은 하나하나 유물을 어디서 발견했고, 본래 어디에 있었으리라고 짐작되고, 쓰임새는 무엇으로 추측되는지를 설명했다.
‘……더는 유물을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서 나를 부른 건 아닐까.’
아주 매우 몹시 많이 그럴듯했다.
세월을 정통으로 느끼고 있는데, 손끝에 온기가 닿았다.
로단테였다.
“공녀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나는 자세를 낮췄다.
양손을 둥글게 말아서, 로단테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신성력이 느껴져요.”
‘이게 웬 빵이람!’
나도 똑같이 신성력 있는데 못 느꼈다는 것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나는 열정적인 학생의 자세로 데칸드 교수, 아니 백작의 강의, 아니 아니, 설명을 경청했다.
“이번에는 독특한 모양의 유물들이 많아 공녀에게 꼭 보여 주고 싶었소.”
“구하기 힘드셨을 텐데 제게도 유물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선뜻 제공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면 나는 공녀에게 늘 고마워해야 하는 사람인 것을.”
‘고맙습니까?’
“공녀.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가져가게. 여섯 개 모두 가져가도 좋소!”
‘고맙습니다!’
“그럼 사양 안 하고 고르겠습니다.”
“공녀는 사람의 호의를 무색하게 만들지 않아서 좋아.”
넙죽 받아들이는 자세를 그렇게 봐 주다니…….
양심에 찔린다.
하나는 로단테가 짚은 성물로 하고, 하나 더 고르려던 나는 얌전히 성물만 쥐었다.
따봉 모양 유물아, 안녕.
“이걸로 하고 싶습니다.”
“호오.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물어봐도 되나?”
“꼭 바이올린의 에프 홀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듣고 보니 그렇군. 나는 이 모양이 흥미로워. 꼭 갓이 큰 버섯…….”
나는 끝까지 열정적인 자세로 강의를 듣고, 마차에 올라탔다.
“엔젤이 반짝거리는 동전을 선물해 줬어요.”
* * *
사샤는 엔젤과 노아에게 부탁하고, 나는 성물을 다각도로 바라보았다.
“로단테. 이거 어떤 성물일 것 같아?”
“잘은 모르겠지만…….”
로단테가 자신 없는 투로 의견을 제시했다.
“모양을 보니 소리를 증폭시키는 용도가 아닐까요?”
“아주 그럴듯해. 소리와 연관이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나는 데칸드 백작저에서 가졌던 의문을 입 밖으로 내었다.
“그러고 보니 로단테. 이게 성물인 줄은 어떻게 알았……. 맞다. 신성력이 느껴졌다고 했지.”
“네. 신성력을 쓸 때의 느낌이 들었어요.”
“그건 어떤 느낌이야?”
“음…….”
잠시 고민하던 로단테가 내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접촉한 부위부터 시작된 온기가 온몸으로 퍼졌다.
“이런 느낌이에요.”
“따뜻한 물로 목욕하는 느낌이로군.”
로단테가 작게 웃었다.
“네. 그런 느낌이요.”
데칸드 백작이 담아 준 주머니에 성물을 조심스럽게 넣고, 우리는 아이들이 있을 정원으로 걸어갔다.
로단테도 나도 말수가 적은 편이어서 복도는 조용했다.
그래서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혹시 나도 로단테처럼 신성력 써 보면 그 뒤로 성물을 구별할 수 있게 되려나.’
시도해 볼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