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오후의 해가 아직 선명한 시간.
나는 사샤와 함께 엘루이든 대공저로 돌아왔다.
“경쟁자가 한 명 늘지 않았더라면, 오늘은 제 차례일 수 있었을까요……?”
리반은 사샤의 손을 잡고 가는 집사의 뒷모습을 부럽게 쳐다봤다.
나는 리반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리반이 울컥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엔젤 양은 대공저에 오지 않으시겠지요?”
“엔젤은 아카데미 갈 거야.”
“다행입니다. 출결을 신경 쓰는 훌륭한 학생이 되면 좋겠군요.”
“그보다 리반. 대공 전하는 어디에 계셔?”
“아마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응. 있었어.”
리반이 놀라기 전, 나는 빠르게 덧붙였다.
“성물을 하나 더 찾았거든.”
그러나 내 노력은 보람을 얻지 못했다.
리반이 몹시도 놀라 눈을 크게 홉떴기 때문이다.
* * *
‘너구리가 진화하면 토끼…….’
칼릭스에게 곧장 갈까 하다가 말았다.
어차피 오후 다섯 시에 만나러 가야 하는 데다 급하게 만나야만 하는 사안도 아니었다.
‘문 잠갔고. 커튼 내렸고.’
됐다.
[로단테. 신성력은 어떻게 사용해?]
[사용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어요.]
‘좋아.’
나는 생각했다. 사용하고 싶다.
잠잠했다.
“뭐지? 나는 초보라서 다른 사람이 필요한 건가?”
고민하다가 주전자에 든 물을 모두 해치웠다.
손등으로 입을 쓱 훔치며 종을 울렸다.
“네, 공녀님. 부르셨어요?”
“레아. 물이 부족해.”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세 돌아온 레아가 컵에 물을 따라 주었다.
“고마워.”
“아니에요. 어머. 왜 이렇게 어둡지?”
프로페셔널한 시녀인 레아는 어둠의 소굴을 순식간에 갱생시켰다.
겨울용이라 두꺼운 커튼을 솜씨 좋게 매듭을 묶어 고정하고, 아까 내가 커튼 내리다가 창문턱에서 떨어뜨린 쿠션도 다시 제 위치에 놓았다.
냉철하게 돌아선 레아가 눈을 깜빡였다.
“고, 공녀님?”
“레아. 늘 고마워.”
나는 레아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뿌리치면 뿌리쳐질 생각으로 살짝 잡았는데, 레아는 “어머, 어머.” 하면서도 손을 내주었다.
‘레아에게 축복을 주고 싶어.’
“…….”
‘어라?’
“레아. 따뜻했어?”
“네. 따뜻했어요.”
“손이 따뜻했어?”
“아니요. 마음이요.”
시무룩하게 손을 떨어뜨리는데, 레아가 확인 사살을 했다.
“공녀님 손이 차가워요. 차를 우려 드릴까요?”
“아니야. 괜찮아…….”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달라며 레아가 나간 후.
나는 조용히 커튼을 내리고, 찻잔에 물을 따랐다.
왼 손등을 꾹 누르자마자 까칠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 안 떠 놔도 된다지 않았느냐!
“아, 죄송합니다. 버릇이 되어서 그만.”
신수가 씩씩거리며 꼬리로 내 뺨을 두어 번 날렸다.
나는 얼얼한 볼을 우울하게 문지르며 질문했다.
‘신수님. 신성력은 어떻게 쓸 수 있는 겁니까?’
―그냥 쓰면 된다.
신수가 천재 교수 같은 발언을 했다.
열등생은 희망을 놓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그래도 어떤 생각을 하면서 하실 거 아닙니까.’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너는 숨을 쉴 때 숨을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하나?
‘……가십시오.’
나는 비척비척 걸어가 다시 커튼을 걷었다.
쏟아지는 햇살을 눈부시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내가 무슨 신성력이냐.’
치유 능력이 있다고 해도 나한테 치유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니.
납득한 나는 스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 * *
이제는 익숙해진 정원을 빠르게 걸었다.
가문의 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에 낯선 타인이 기웃거리면 수상할 테니 찾은 궁여지책이었다.
저택 근처만 돌아다니다가 얼마 전부터는 자신감이 붙은 차였다.
‘길, 안 잃을 것 같다!’
그렇게 매 순간 새롭게 발견하는 기분으로 발을 디디고는 했다.
겨울에도 여러 종류의 꽃이 만발한 정원을 어느새 나는 산책하듯 걷고 있었다.
‘푸른색. 노란색. 주황색. 보라색.’
흰색을 싫어한다더니 역시 흰색 꽃잎은 없었다.
‘주인의 취향이 아주 뚜렷하군.’
그러다 생각보다 깊게 들어오고 말았나 보다.
그래야 내가 보고 있는 장면이 설명됐다.
바람이 불었다.
드레스 자락이 흩날리고, 들꽃이 살랑거리며 발목을 간질였다.
남자의 옆모습이었다.
타앙―
근처에 마도구가 있는지 작았으나 분명한 총성이었다.
결론적으로 리반의 추측은 틀렸다. 칼릭스는 집무실이 아니라 이곳에 있었다.
정중앙이 오래된 레이스처럼 너덜너덜해진 과녁을 무심하게 확인한 그가 그만큼의 온도 낮은 시선을 돌렸다.
“……공녀?”
칼릭스가 조금 놀란 얼굴로 웃었다.
나는 머쓱하게 말했다.
“이런 우연도 있네요.”
“우연보다는 이왕이면 만나야 했을 인연이라고 해 줘. 그게 더 낭만적이지 않아?”
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어, 이 말…….’
[운이나 우연보다는 이왕이면 만나야 했을 인연이라고 해 줘. 그게 더 낭만적이잖아.]
언젠가 내가 엔젤에게 했던 말이었다.
‘내가 했던 말을 칼릭스가 할 리가 없고, 칼릭스가 나한테 저런 말을 할 리도 없는데.’
혹시…….
‘아카데미 교수의 말버릇이었나?!’
월반을 거듭해 학년을 따라잡자마자 칼릭스와 동일한 수업만 들었으니 차라리 이게 그럴듯했다.
“……총탄을 회수하는 건 제게 맡겨 주십시오.”
숙연한 기분으로 나는 노동을 준비했다.
“응? 괜찮아. 마법이 걸린 총탄이거든.”
어쩐지 총탄 대신 다른 단어가 들어가야 할 것 같은 문장은 의도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장난스럽게 입매를 풀어 웃은 칼릭스가 마도구를 작동시켰다.
나는 황실에 버금가는 거부의 돈 씀씀이에 감탄했다.
“혹여 사고가 날까 봐 그랬어.”
“……그러셨군요.”
“장소를 갖췄다면 일반적인 총탄을 사용할 수 있었겠지만 여기는 아니니까.”
황위를 욕심낸 적 없던 원작의 남자 주인공이 반역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원작에서는 그가 지켜야 하는 것들 때문이라고 두루뭉술하게 서술하고 넘어가 끝까지 알 수 없던 것이었다.
총기를 정돈한 칼릭스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곧 해가 지겠어. 돌아가자, 공녀.”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은 고요했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그리 오래 걸은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꽃밭이 보였다.
“꽃이 예쁘더군요.”
“고마워. 정원사들이 고생을 했지.”
정원사 고생시키기로는 내게 범접하기 힘들 것이다.
‘……미안했어. 리엔타의 정원사들…….’
먼 산을 바라보았다.
나긋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또 부탁을 했어.”
“보너스와 함께라면 괜찮을 겁니다.”
“샤를리즈. 리반에게 물들었군.”
칼릭스가 눈매를 접어 웃었다.
일단 충격은 받았는데, 저 망발 때문인지 아니면 그 얼굴 때문인지 헷갈렸다.
“이번에는 한 가지 색으로 꾸며 볼까 해.”
“푸른색이요?”
“아니. 흰색.”
나는 멈칫했다.
“흰색을 좋아하게 되었거든.”
나른한 목소리에 5년 전의 곤혹스러움이 묻어나던 음성이 겹쳐졌다.
[미안해. 공녀. 나는 흰색을 좋아하지 않아.]
“공녀, 저기 봐. 다람쥐야.”
“사샤가 좋아하겠습니다. 다람쥐가 서식하는 장소를 기억해야겠군요. 저번에는 청설모와 다람쥐를 구별하는 놀라운 면모를 보이셨습니다.”
칼릭스가 걸음을 멈췄다.
“이번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몇 걸음 더 걸어간 나는 뒤늦게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웃는 얼굴이 보였다.
벌써 해가 꽤나 저물었다.
청명한 겨울 하늘에 주홍색이 번지고, 구름은 그보다 옅은 색으로 물들어 유유히 흘러갔다.
그 아래, 그림 같은 풍경보다도 더 아름다운 남자가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맞춰 보세요.”
“음.”
칼릭스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것만으로도 거리는 제법 좁혀졌다.
상체를 조금 숙여 가까워진 얼굴은 내가 발꿈치를 든다면 닿을 것도 같았다.
버티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몰랐다.
‘그런 마음이 될 때 그렇게 하겠지.’ 하고 넘겼던 의문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전하께서 저를 언제 공녀라고 부르고, 언제 이름을 부르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
칼릭스가 웃었다. 꼭 꽃망울이 터지는 순간을 닮은 미소였다.
“맞춰 봐, 샤를리즈.”
입술 끝을 올려 웃은 칼릭스가 가까워졌던 거리를 단숨에 벌렸다.
저는 답을 알려 드렸는데, 이러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분명 그 말을 하고자 벌린 입술을 나는 다시 맞물었다.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해가 곧 지겠습니다.”
이전에는 몰랐던 사실을 지금은 알고 있다. 내 보폭에 맞춰 걸으며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공녀. 오늘 디저트도 레몬 셔벗이야.”
“사흘 연속은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한데요.”
“그럴 것 같아서 다른 디저트도 준비하라고 했어.”
“……무엇입니까?”
“그대에겐 둘 다 제공하라고 말했으니 조금 있다가 확인해 봐, 샤를리즈.”
“초콜릿이면 좋겠습니다.”
“응, 초콜릿이면 좋겠네.”
느긋한 한담을 나누면서도 나는 머리 한편으로는 줄곧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석찬이 끝난 후 제공된 디저트는, 레몬 셔벗과 코코아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