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발현열은 아니다.
아이는 이미 그것을 성물을 통해 무난하게 넘긴 적이 있다.
모든 것을 생각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신에게든 무엇에게든 나는 바랐다.
‘사샤의 고통을 거둬 줘.’
내 능력으로 아직 그걸 할 수 없다면, 대신 내가 아프게라도 해 줘.
속으로 몇 번을 되풀이했을까. 맞닿은 부위가 따듯해졌다.
그래서였는지도 몰랐다.
아이는 팔이 닿았던 순간보다도 지금 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샤, 샤를 님?”
사샤가 손을 뒤로 황급히 빼내었다.
아이가 소중히 여기는 동화책이 떨어져 나뒹굴기 전, 책을 허공에서 붙잡는 데 성공했다.
“아, 죄,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뿌리친 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차마 닿지는 못하고, 내 손 주변을 다급히 배회하는 자그마한 손이 떨렸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 괜찮아.”
“정말 죄송해요. 어, 어떡해…….”
열이 올라서 마음이 약해졌는지 아이가 울먹였다.
문을 더 열어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을 나는 억눌렀다.
나는 아이에게 있어 마음이 약해져 있을 때 감히 파고들어도 괜찮은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대화 주제를 돌렸다.
“그보다 사샤. 네 손이 뜨거웠던 것 같은데.”
“이불을 꼭 덮고 있어서 그런가 봐요.”
내가 대답이 없자, 여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게다가 베개 밑에 손을 넣고 있었어요. 그, 그리고.”
“사샤 얼굴이 보고 싶어.”
“…….”
“안 될까?”
“안 돼요…….”
“정말 안 돼?”
아이는 망설이다가 떨리는 목소리를 흘렸다.
“내일 만나요. 샤를 님. 좋은 꿈 꾸세요.”
“알겠어. 사샤도 포근한 꿈을 꿔.”
“네에…….”
닫힌 문 앞에서, 나는 눈꺼풀을 내렸다.
기어코 입술을 짓물었다.
사샤의 고통이 해소되었음을 확신하자 생각은 뻗어나갔다.
‘이거, 각성열 같은데?’
낮에는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으니 단순한 열감기는 아닐 것이다.
‘원작에서는 각성열을 앓지 않았어.’
원작의 칼릭스도 의아하게 여긴 지점이었다. 그도 이리안도 아이가 혹시 꼭꼭 참고 있을까 봐 신경을 기울였지만, 정말로 각성열은 없었다.
‘그때 신수와 수호 계약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생략된 과정이었던 건가.’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고민은 이 이상 의미가 없다.
곧장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별관의 서고였다.
* * *
이튿날.
나는 아홉 시가 되자마자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 공녀님?”
문을 연 리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제 사샤 테라피를 받은 덕택인지 리반의 다크서클은 조금 옅었다.
축하의 말을 건네는 대신, 나는 간략히 용건만 말했다.
“전하께서 계셔?”
“예. 안쪽에…….”
그러다가 돌연 리반이 눈을 굴렸다.
“아차차!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잠시 어디를 가 보아야겠군요. 쭉 들어가시면 계실 겁니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이만.”
이상한 말도 모자라 희한한 연기를 펼치더니 사라졌다.
‘이김에 얼마나 쉬고 싶었으면…….’
리반의 엄청난 봉급을 알고 있지만 절로 짠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연기, 언젠가 도움을 주고 싶어졌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연기를 좀 한다.
집무실 내부는 이른 오전의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다. 그야말로 정신 번쩍 차리고 일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나는 어젯밤 서고에서 발견한 서적을 옆구리에 끼고 걸어갔다.
인기척을 느낀 듯 칼릭스가 반응했다.
“공녀?”
안경 너머로 시선이 맞부딪히고, 시간이 흐름을 달리했다.
“신전에서 신관들을 보낼 수 없다고 합니다.”
리반이 주먹을 꾹 쥐었다.
만약 앞에 있는 사람이 칼릭스가 아니었다면 책상을 쾅쾅 두드리며 울분을 토해냈을 것이다.
“각성열을 앓은 황족을 겪은 적이 없어 능력이 불민하기 때문이라지만, 아예 보내지도 않을 이유로는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교황을 만나야겠군.”
칼릭스가 날카롭게 입술을 올렸다.
“신전에 연락을 취해 놓을까요?”
“아니.”
칼릭스는 어떤 상황에서든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자랐다.
습관적으로 흘린 낮은 웃음소리에는 선명한 분노가 새겨져 있었다.
“교황을 만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야. 내 조카님을 위해서 그 정도도 못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