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모처럼 햇살이 따듯한 겨울날이었다.
사샤는 주먹 절반쯤 되는 크기의 동그란 케이크를 조금씩 떼어먹으며 눈꺼풀을 팔랑였다.
‘샤를 님은 여전하셔.’
말을 먼저 붙여주셨고, 칠칠치 못하게 뺨에 묻힌 생크림을 닦아 주셨고, 오늘도 케이크를 이등분해 드셨다.
‘……미움받고 싶지 않아.’
아픈 아이는 짐 덩어리다.
하물며 자신은 이미 너무 자주 아팠다.
그때마다 숙부님은 곁을 지켜 주셨지만, 실은 무척 귀찮으셨을지도 몰랐다.
아이는 그 시간이 칼릭스가 휴식 시간을 빼서 만든 시간임을 영민하게 눈치챘다.
‘그런데 어제 소리를 내고 말았어…….’
이틀은 정말로 잘 참았다. 이불도 꼭꼭 뒤집어쓰고,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질 수 있도록 침대 가장자리에서 잠을 청했다.
[그럼 기사들을 배치하는 건 허락해줄 수 있겠니. 사샤?]
기사님들도 몰랐었는데.
하필 어제 갑자기 유독 가슴이 콕콕 쑤셨을 때 샤를 님이 지나가셨다.
“사샤.”
“네? 네에.”
어깨를 흠칫하며 아이가 얼른 대답했다.
창문 너머를 바라보던 샤를리즈가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다.
닿아 온 시선은 유달리 따듯하진 않았으나, 단 한 번도 차가운 적 없던 그것이었다.
“산책하고 싶은데, 같이 있어 줄 수 있을까?”
“네.”
샤를에게 필요하다면, 사샤는 무엇이든 기꺼이 할 수 있었다.
* * *
나는 옷을 여러 겹 껴입혀 동그래진 사샤의 손을 잡고 정원을 산책했다.
“꽃이 예뻐요.”
저번에 칼릭스와 지나쳤던 그 장소는 아니었다. 저택 가까운 정원에 위치해 아이의 몸으로도 어렵지 않게 자주 찾을 수 있는 그곳이었다.
“그렇지? 그런데 화원의 꽃들이 곧 달라진대.”
“정말이요?”
아이가 나를 올려다봤다.
“그래. ……어, 저기 마침 대공 전하께서 오시는군.”
이번에도 나는 연기를 훌륭하게 해냈다!
눈이 마주치자 칼릭스가 아주 살짝 웃었다.
꼭 반가운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얼굴이어서 순간 ‘어어?’ 할 법도 하건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내 옆에는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우며 세상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흐뭇하게 있는데, 돌연 떠오른 말이 있었다.
[샤를리즈. 리반에게 물들었군.]
‘아, 아니야.’
이건 사샤를 보면 누구든 이렇게 생각할 게 틀림없단 말이다.
얕은 충격에 빠져 있던 사이, 아이가 반갑게 말했다.
“숙부님!”
예상치 못한 만남에 신이 났는지 ‘수뿌님’에 가까운 발음이었다.
칼릭스도 그 극상의 사랑스러움을 이기지 못했는지 안으려는 듯 손을 뻗어서, 나는 얼른 팔을 교차해 엑스 표시를 해 보였다.
‘형님을 꿈꾸는 아이란 말입니다!’
“아…….”
칼릭스가 아쉬운 탄성을 흘리며 대신 사샤의 머리를 매만졌다.
“어제는 좋은 꿈을 꾸었어?”
“네에.”
“‘아기 용사님과 씩씩한 왕녀님’의 4권이 발매되었는데, 언제쯤 사샤에게 읽어 줄 수 있을까…….”
칼릭스가 애처롭게 속눈썹을 떨궜다.
아이가 어깨를 움찔움찔거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좋았어!’
이럴 때, 얼굴값 하는 사람이 필요해 리반을 부를까 하다가 말았던 과거의 나를 칭찬하고 싶다.
의식해서 행동하지 않아도 저절로 미인계를 쓰는 칼릭스를 회유하길 잘한 듯했다.
[이건 그저 제 생각입니다만, 사샤 님께서는 본인이 성가신 존재가 될까 봐 걱정이신 것 같습니다.]
[마음을 보여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 마침 그 성물이 제게 있습니다!]
나는 저번에 데칸드 백작에게서 받아 온 성물의 용도를 말했다.
[그런데 걱정이 있습니다.]
[나도 그랬는데. 혹시 같은 걱정일까?]
“숙부님. 화원이 바뀐다고 들었어요. 정말 바뀌어요?”
“그래. 꽃들이 모두 지면 바꿀 거란다.”
“다행이다…….”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꽃 가족들이 끝까지 함께였으면 좋겠어요.”
쪼그려 앉은 몸이 좌우로 가볍게 흔들흔들거렸다.
“그런데 꽃은 왜 바꾸시는 거예요? 지금도 아주 예뻐요.”
“세상에는 좋아할 수 있는 게 많아. 비슷해도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들이.”
사샤가 눈을 깜빡였다.
“그걸 네게 보여 주고 싶어.”
칼릭스가 사샤의 코를 가볍게 두드렸다.
“정원사들도 다행히 동의해 주었고.”
“다행이에요.”
“응. 다행이지. 모두 사샤가 예쁜 화원을 보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나 봐.”
꽃잎을 조심스레 매만지던 작은 손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이 겨울에 하는 일인데도 선뜻 수락한 것이겠지.”
“그뿐만이 아닙니다. 파티시에는 유명한 제과점에 직접 찾아가 어린아이들에게 인기 많은 디저트를 물색해 매일매일 공부하고 있습니다.”
“기사들은 사샤를 경호하는 일을 하고 싶다며 앞다퉈 신청하고 있고.”
아이가 눈을 깜빡였다.
[확신을 심어주고 싶어.]
때로는 간편하고 쉬운 길을 빙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그 사람을 아끼고 있기 때문일 터다.
‘네가 확신했으면 좋겠어.’
그때그때 성물로 증명하지 않아도 너는 아주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게다가 저는 리반이 배부했던 가사를 모두 외웠습니다.”
“공녀도?”
“저는 지금 다시 부를 수도 있습니다. 해볼까요?”
“흐음.”
칼릭스가 짙게 웃었다.
“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렇게 결투의 막이 오르려던 때였다.
귀가 발긋하게 달아오른 아이가 화드득 몸을 돌리며 뒤뚱뒤뚱 뛰어갔다.
“아, 아니에요. 하지 마세요.”
따라가서 노래를 불러 줄까 하다가 말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어느새 진심이 되어버려 나는 아쉽게 입을 꾹 닫았다.
칼릭스도 마찬가지일까. 문득 궁금해져 뚝 떨어뜨린 시선을 올렸다.
그는 엷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같이 웃었다.
그런데 또 엄청나게 사악한 미소를 짓고 만 모양이었다.
미려한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점차 걷히고, 동공이 조금 부풀었다.
‘어, 어라.’
얼른 표정 정돈을 하려던 때. 칼릭스가 다시 웃었다.
그건, 조금 다른 미소였다.
“샤를리즈. 그대가 신경 쓰여.”
완연한 오후, 그 눈은 유독 짙었다.
느릿한 목소리가 진득한 질감을 가진 유형물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좋아한다는 말이야.”
* * *
나는 서둘러 서점으로 달려갔다.
‘버리긴 했는데, 불태워졌을 줄은 몰랐어!’
어린 시절 읽은 동화책부터 시작해서 아카데미를 다니던 시절 공부한 책까지 모두 따로 보관되어 있다고 해서 그곳에 있을 줄 알았더니…….
[그 책, 소각한 지 오래다.]
리엔타 공작이 커흠커흠거리며 말했다.
그러다 갑자기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그 책은 그런데 왜 갑자기 찾는 게냐?]
[필요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그게 어째서 필요하다는, 아……. 그래. 그랬었지…….]
공작은 갑자기 아련해졌다.
나는 눈치를 보며 복도로 나갔다.
나를 배웅해주러 같이 가던 집사가 이런 말을 해줬다.
[아가씨께서 이해해 주세요. 애써 잊고 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마셨나 봅니다…….]
‘저런.’
아무튼 나는 서점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어서 오, 오, 오…….”
갑자기 ‘오’ 소리만 내뱉는 점원은 솔직히 조금 믿음직스럽지 못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이것만 읽으면 당신도 그 사람의 유일무이한 친구가 될 수 있다》라는 제목을 가진 책은 어디에 있지?”
“예?”
“저 책, 어디에 있어?”
“예?”
계속해서 ‘예?’만 반복하는 점원을 원망스레 바라보곤 몸을 돌렸다.
‘이. 이……. 아, 여기 있다!’
서둘러 책값을 계산하고 내부 한 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다.
목차부터 확인하고 있는데, 갑자기 찻잔이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아,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공녀님. 제가 그만 공녀님을 직접 뵙는 영광스러운 순간에 압도되어 버, 버려서 그만. 사죄의 표시로 드리는 것입니다.”
거절하면 울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대체 어떤 소문이 퍼진 거지?’
에리히 자식한테 편지는 부쳤는데 답은 아직이었다.
“고마워.”
“히, 히익.”
“……용서해 주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나는 씁쓸하게 차를 한 모금 넘겼다.
그리고 다시 책에 몰두했다.
마침내 찾아낸 문장이 보였다.
‘좋아한다’라는 말의 진실. 그건 당신을 마음이 잘 맞는 친구 정도로 생각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