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저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러지 마.]
샤를리즈가 눈매를 찌푸렸다.
[나는 나랑 같이 일하는 사람이 죽음을 감수하며 사는 거, 싫어해.]
그저 넘어가면 됐을 말에 굳이 이런 질문을 하고 만 이유는 몰랐다.
[어째서 말입니까?]
[나는 오래오래 살고 싶거든. 그런데 주변 사람이 저런 생각하며 살면 나한테 불똥 튈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반드시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해.]
선명한 녹색 눈동자가 그의 목을 향했다가 위로 올라왔다.
[나도 그럴 수 있도록 도울 테니까.]
그렇게 지금 상황이다.
창문과 문 양쪽에서 은밀히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일리든은 검을 쥐었다.
사정 범위 내로 다가올 때까지 눈을 감은 채 기감을 끌어올리고 있던 기사는 돌연 눈꺼풀을 올렸다.
누구보다 절박하게 실력을 쌓았던 기사는 금세 상황을 판단했다.
다섯의 암살자를 다섯 명의 기사가 막고 있었다.
암살자 중 하나가 성급히 움직였고, 일리든은 망설임 없이 검을 직선으로 찔러 넣었다.
“셋은 살려야 한다!”
분명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음이 귀를 울리고 있는데, 왜인지 아득한 기분이 되었다.
일리든 포르테는 아무에게도 도움받지 않고 살았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야 하는 삶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는 삶이었다.
분명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섯 번째 암살자의 무릎이 꺾이고, 기사가 씩 크게 웃으며 그를 돌아봤다.
“리엔타 공녀님의 명으로 왔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대해 말한다면 공녀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았다.
[봐. 내가 경이 반드시 살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지?]
* * *
“공녀님의 말씀대로 이틀 차에 왔더군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찍기를 좀 잘해.”
알쏭달쏭한 얼굴을 하고 있던 제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긴……. 그러셨지요.”
이쯤에서 나는 두 번째로 생각했다. XX도 약에 쓸 수 있다더니 어설픈 변명으로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처음부터 묻고 싶었습니다만, 얼굴이 왜 이러십니까?”
“많이 아파 보여?”
그렇다며 제이가 눈매를 구겼다.
“별일 아니야. 수고했어. 푹 쉬기 전에 이거 가져가도록 해.”
나는 마도구 주머니를 쓱 꺼냈다. 저번에 일리든을 만날 때 잊지 않고 야무지게 다시 챙겨온 그것이었다.
“받아.”
“돈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돈 아니야.”
세상에 노아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나는 혹시 몰라 금화가 아니라 이걸 준비해 두었다.
“기사들이랑 맛있는 거 먹어. 미리 결제해 놨어.”
“……그렇게 말씀하시면 거절을 할 수 없겠군요.”
영수증을 받아 든 제이가 피식피식거리더니 이내 소리 내어 웃었다.
“공녀님은 정말 예상 밖이십니다. 그래서 주군도 공녀님을 좋…….”
돌연 말을 끊더니 어색하게 웃는다.
“잘 받겠습니다. 그럼 휴식을 더 방해하지 않고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잘가라며 손을 휘휘 흔들고, 나는 손거울을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너무 초췌한가?”
냉수마찰을 몇 시간 했더니 몸이 으슬거렸다. 내일이면 확실히 감기에 걸릴 것 같다.
[그래서 주군도 공녀님을 좋…….]
며칠 전의 나였다면 저 말 뒤에 나올 것을 ‘―같다고 생각한다는 건가!’하고 좌절했겠지만, 지금은 안다.
“후후후.”
사샤의 손을 미리 잡아두는 건 잊지 않았다. 오늘도 순조롭게 각성열의 고통을 막은 차다.
‘신수의 힘이 약해졌을 때 각성열이 찾아오는 거니까, 신성력을 흘러가게 하면 괜찮은가 봐.’
그래도 혹시 몰라 신수더러 사샤 옆을 지켜달라고도 했다.
‘각성열은 일주일 정도라고 했으니까, 며칠 안 남았네.’
“다행이군, 다행이야.” 하고 중얼거리며 혹시 자다가 이불을 끌어 덮을까 봐 침구를 소파에 날라 두었다.
‘좋았어.’
그리고 이튿날.
예정대로 감기에 걸렸다.
* * *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생각보다 너무 심했다.
‘이, 이런.’
자꾸 까먹게 되고는 하는데, 그러고 보니 내 몸은 허약했다.
‘사샤가 온다고 하면 거절해야겠는데?’
아기한테 감기를 옮길 수는 없다. 가뜩이나 사샤는 원래 지금 열감기를 심하게 앓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서글픈 코찔찔이가 되어 이불을 꼭 덮었다.
우울하게 몸을 모로 돌려 누워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공녀님. 주치의를 데려왔습니다.”
‘주치의가 도착했습니다. 가 맞는 말 아닌가?’
조금 의아했지만 나는 레아에게 들어와도 된다고 말했다.
문이 벌컥 열리고, 나는 ‘데려왔다’의 의미를 알게 되는 시간을 가졌다.
“공녀님께서 갑자기 심한 감기에 걸리셨습니다!”
레아에게 끌려 온 게릭은 왕진 가방을 내려놓을 새도 없이 고개를 여러 번 주억였다.
‘어쩐지 조금 혼이 빠진 얼굴 같……. 어?’
게릭의 볼에 찍힌 선명한 베개 자국을 발견한 나는 조금 미안해졌다.
“약을 금방 조제해오겠습니다.”
그 말대로 게릭은 정말 금방 다시 돌아와 약을 주고 후다닥 사라졌다.
레아는 게릭이 가든 말든 나만 쳐다보며 풀 죽은 목소리를 내었다.
“아침은 드셔야 해요.”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식사를 거른 적이 없다!
오늘도 밥을 해치우고,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저녁마다 먹는 약이 훨씬 써서 그런지 그냥 조금 맛없는 음료수 같네.’
“여기 사탕이에요.”
거절하지 않고 냉큼 입에 넣었다.
“아, 그리고 서신이 도착했어요.”
끝까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는 레아에게 나는 과거 그 언젠가 에반스 경이 취했던 자세를 해 보였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으시군요.”
다행이라며 안도한 레아가 나간 후. 나는 서신을 손에 쥐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에리히네?”
뺀질뺀질거리는 놈치고 의외로 빠른 답신이었다. 레터 나이프를 가지러 갈 체력도 아까워 대강 찢고 곱게 접힌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어? 어어?”
‘이게 어떻게 퍼진 겁니까?’
설마 수도 저택에 끄나풀이 더 남아 있던 걸까.
나는 서둘러 바이에르로 편지를 부쳤다.
그리고 지쳐 다시 널브러졌다.
“그래서. 이래서…….”
힘이 빠져 베개를 핏핏 치며 나는 눈물을 조금 훔쳤다.
* * *
“그래. 일리든 포르테 암살이 실패했다고.”
그가 크게 웃었다.
“온갖 똑똑한 척은 다 해도 결국 그렇지.”
무릎 한쪽을 꿇어 부복한 인영은 이어질 말을 묵묵히 기다렸다.
“그런데 이번에도 리엔타의 계집이 일리든 포르테를 찾아갔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하여 포르테의 사용인들을 포섭해 보려고 하였으나, 실패했습니다.”
“충심이 깊은 건가?”
“아닙니다. 사용인 수가 워낙 적어 특정될까 두려워 거절한 듯 보입니다.”
“샤를리즈 리엔타는 참 운이 좋아.”
그가 턱을 쓸었다. 까칠거리는 수염의 감촉이 손바닥에 남았다.
“무슨 속셈을 품고 행동하는지 늘 유추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잖나.”
“하면…….”
“곧 있을 건국제 기념 무도회에서 사람을 던져 봐. 이왕이면 대공과 비슷하게 생긴 사내면 좋겠군.”
비웃듯 입술이 크게 휘어졌다.
“칼릭스 엘루이든이 공녀의 마음에 답할 리는 없으니 그 불쌍한 여자에게 대용품이라도 쥐여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