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이번에는 로단테가 문을 열어주었다.
“엔젤은?”
“늦잠을 자고 있어요.”
로단테는 조금 웃었다.
씁쓸한 것 같기도 했고, 안도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미소였다.
엔젤은 리엔타 공작저에서도 늦잠을 자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아마 쉽게 긴장을 놓을 수 없는 환경에서 생활해 몸이 그렇게 적응을 했기 때문인 듯했다.
“다행이네. 엔젤은 많이 게을러져야 할 필요가 있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로단테는 차를 직접 우리려는 듯 물을 데웠다.
“내가 할게.”
“아니에요. 공녀님께 해 드리고 싶어요.”
“마음은 고맙지만 위험해. 손 다치는 거 금방이야.”
그러자 로단테가 빙그레 웃었다.
“저는 평범한 열네 살이 아니니까 괜찮아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말리기도 뭐했다.
“그럼, 대신 찻잔에 차를 따르는 건 내가 하겠어.”
“네. 그렇게 해요.”
로단테가 우린 차는 아주 맛있었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입에 맞으세요?”
“응. 아주 훌륭해.”
“공작 각하도 좋아하시더라고요.”
“아버지와 자주 만나?”
“가끔요. 경비대를 다녀오고, 각하께서 저를 찾아오셨어요.”
공작이 말한 적 없는 이야기였다.
“제가 원한다면 그 기사들을 벌해주겠다고 하셨어요.”
“뭐라 답했어?”
“괜찮다고요.”
나는 홀짝홀짝 마시던 찻잔을 바로 세웠다.
“벌하는 건, 나중에 제가 하고 싶어요.”
‘그랬군’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흑막의 기미가 보이는 소년이 어쩌고저쩌고할 것도 없었다.
‘남의 손 빌려서 하면 기분만 찝찝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드문드문 나누다가, 나는 전부터 마음 한편에 두고 있던 주제를 조심스레 올렸다.
“로단테. 이름은 그대로 쓸 거니?”
타티스 후작 부인과 로단테가 대화를 나눈 순간,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건 이미 보였기 때문에 돌려 말할 것 없었다.
그저 소년에게 그 순간을 되살릴까 봐, 그래서 해소될 수 없는 아쉬움을 깨닫게 될까 봐 시간을 끈 이야기였다.
“네. 그러려고 해요.”
로단테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엔젤과 제가 이미 죽은 사람 때문에 서로에게 기억된 이름을 바꿔야 하는 거, 싫었어요.”
“그래.”
“공녀님도 저를 이 이름으로 기억하시잖아요?”
“맞아. 나도 로단테를 기억하고 있어.”
로단테가 희미하게 웃었다.
“실은, 바꾸고 싶은 이름이 예전부터 있었어요.”
소년이 아주 작게 속삭였다. 나는 눈꺼풀을 반쯤 내린 채 대꾸했다.
“그 이름도 네게 아주 잘 어울리는군.”
“그렇지요?”
“나중에 이름을 바꾸고 싶다면, 나든 공작 각하에게든 말해. 반나절도 흐르기 전에 변경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공녀님.”
“그리고 다시 로단테가 되고 싶으면 또 말해. 그때도 반나절이 안 걸릴 거야.”
로단테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조금 늦게 웃는 얼굴이 앳됐다.
“그러다 헷갈리시면 어떡해요.”
“아버지에게 이름을 변경해달라고 하고, 나한테는 말을 안 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검지로 볼을 길게 매만졌다.
“그래도 늘 네 이름을 맞게 기억할 거야. 그러고 싶어.”
소년이 자신의 금발처럼 환하게 웃었다.
* * *
‘원작에 없는 이름이었어.’
로단테는 정말로 원작에 등장하지 않았던 거다.
‘하긴, 흑마법도 원작에 안 나왔는데 뭐.’
이놈의 원작 같으니라고.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흉을 보며 나는 복도를 바삐 걸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문을 두드렸다.
“사샤.”
대답이 없었다.
‘공부하러 갔나…….’
나는 침울하게 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 걷던 발이 멈춘 것은 내 방 앞에 있는 조그마한 형체를 발견했을 즈음이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샤를 님.”
그리고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나는 아이를 힘껏 안아 주었다.
“감기에 걸리셨다고 들었어요.”
“응. 그래서 무려 이틀이나 사샤를 보지 못했어…….”
“아프지 마세요.”
아이가 내 목덜미에 제 얼굴을 비볐다.
“사샤. 내가 아팠을 때, 성가셨어?”
“아니에요!”
사샤가 화드득 품에서 벗어나 시선을 맞췄다.
“다행이다. 사샤가 그랬을까 봐 걱정됐거든.”
“저는 그럴 리가 없어요.”
“나도 그래.”
작은 주먹을 옹골차게 쥐고 있던 사샤가 눈을 문득 깜빡였다.
“사샤가 아파도 하나도 성가시지 않아.”
“저는 안 아파요.”
아이가 자그마하게 말했다.
“예전부터 그랬어요.”
“응. 사샤는 씩씩한 형님이라서 건강한 거 알아. 그래도…….”
머리를 푹 숙이고 있던 아이가 주춤주춤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는 뽀얗고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얼굴은, 아직 과거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과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하며, 나는 약속하듯 말했다.
“그래도 나는 너를 언제나 걱정하고, 사랑하고, 반가울 테니까.”
아이의 시선이 내 얼굴을 하염없이 맴돌았다. 자그마한 손이 뻗어 나와 내 볼에 겨우 닿았다.
그 손등에 내 손을 겹쳐 볼에 깊이 괴고 눈을 감았다.
“잊었어, 사샤? 나는 사샤가 아니라 벨이라는 깜찍한 이름을 가진 꼬마도 좋아한 사람이야.”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려고 했는데.
다른 손으로 사샤가 내 눈가를 조심조심 매만졌다.
“맞아요. 그러셨어요.”
눈을 뜨자 보인 것은 희미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나는 기어코 눈매를 조금 구기며 아이를 꼭 안고 말았다.
“그랬는데. 그러셨는데…….”
물기 어린 목소리로, 아이는 웃었다.
* * *
‘요새 너무 자주 나가고 있어…….’
나는 마차 창문에 힘없이 머리를 기대었다.
오늘은 로제타가 건국제 기념 무도회를 이유로 만남을 요청한 날이었다.
‘드레스 가봉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텐데, 뭘까.’
고심해 봤지만, 같은 성별의 또래 친구가 없던 터라 짚이는 부분이 없었다.
‘……혹시, 아는 척하지 말자는 건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유행, 우리도 따라야죠!”
그러나 로제타의 용건은 이러했다.
이리안과 나는 시선을 교환했다.
‘무, 무슨 유행일까?’
‘공녀님. 저 두려워요…….’
“동일한 액세서리를 보석만 바꾸는 거랍니다.”
내가 체력 단련으로 다진 시간이 없었더라면,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을 선고였다.
한나절 후.
이리안과 나는 커피 하우스에 앉아 갈급하게 음료를 마셨다.
“사실 완벽하게 마음에 들지는 않아요.”
로제타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나는 청천벽력 같은 말에 입술을 떨고 말았다.
“공녀님은 푸른색이 어울리는데 분홍색을 하겠다고 하시고, 이리안은 다홍색이 어울리는데 그 색이 없어서 주황색으로 하고.”
“다, 다음에는 주문 제작을 맡기자.”
“그래야겠죠…….”
로제타가 콧잔등을 찡긋했다.
숨을 돌릴 여유가 생기자,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데 나랑 같은 디자인으로 해도 되겠어?”
“공녀님에 비해 덜 어울릴 거라는 생각은 해요.”
“그런 게 아니야. 나랑 친하다고 뒤에서 수군댈지도 몰라.”
“예전에도 그랬는데요?”
새끼손가락을 야무지게 펼쳐 찻잔을 기울인 로제타가 눈썹을 밀어 올렸다.
“그런데 이번은 더 심할 거야…….”
나는 내 캐릭터 해석에 실패한 바이에르 공작을 떠올리며 어깨를 축 내렸다.
“공녀님은 늘 비슷했어요.”
‘어어?’
“로제타의 말이 맞아요.”
이리안도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말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이 유독 심한 것도 아니랍니다. 공녀님께서 한때 내는 벌금만 웬만한 귀족가의 일 분기 예산이었던 시절도 있었는걸요.”
“…….”
나는 숙연하게 차가운 음료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 * *
으슥한 밤.
지금 난 칼릭스와 머리를 골똘히 맞대고 있다.
“이거 어떻습니까?”
서로 눈이 마주치면 따봉을 날리는 거다.
나는 시연까지 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스가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샤를리즈. 그대, 그 동작에 집착하고 있어.”
“제가요?”
“응.”
칼릭스가 여전히 웃음기가 스민 눈을 휘었다.
“처음에는 세로로 세워서 하자고 했고, 그다음은 가로, 눈에 띈다고 하니 지금은 사람들이 있는 방향은 왼손으로 가리자고 제안했지.”
“…….”
이럴 수가.
나 따봉에 집착하고 있었다.
‘데칸드 백작이 준다는 거 냉큼 받아 올 걸 그랬나.’
충격에 빠져 있는데, 칼릭스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이건 어때?”
‘오.’
굉장히 눈에 안 띄는 데다, 간결했으나 우연히 겹칠 수는 없는 특색 있는 동작이었다!
나는 감탄의 의미를 담아 따봉을 날리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 이런.’
황급히 엄지를 접어 수습했지만, 칼릭스는 눈을 접어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호강했어.’
오늘 하루는 이불을 차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 *
그렇게 건국제 기념 무도회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