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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98) (98/232)

98화

건국제를 꼭 일주일 앞두고, 기념 무도회는 황성의 그리니티 홀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는 시선을 던지는 곳마다 눈을 즐겁게 하고, 오케스트라의 선율은 묘하게 들뜬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황제 폐하께서 리엔타 공녀에게 보석을 하사하셨다는 이야기, 들으셨어요?”

“그럼요. 오늘 착용하고 오겠죠?”

“선황자 전하를 구한 대가이니, 파트너는 당연히 대공 전하이시겠고요.”

“어머.”

귀부인들이 자그맣게 웃었다.

“결국은 해내시네요.”

“아직은 모를 일이지요. 약혼식이 아직이니까요.”

“사실 로나터스 후작 영애가 더 가능성이 있…….”

그때였다. 황성 시종이 칼릭스와 샤를리즈의 입장을 소리 높여 알렸다.

“아…….”

일시에 시선이 고정됐다.

누군가는 감탄을 흘리기도 했다.

“겉으로만 보면 더없이 잘 어울리네요.”

파괴적인 수준의 미모를 가진 대공 옆에서 빛이 바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무심한 눈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샤를리즈는 미색의 드레스 차림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물품이 귀걸이였군요…….”

반만 묶은 은발은 장식 하나 없었으나 그 자체로 화려했다.

샤를리즈가 전체적으로 수수한 차림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정말 얼굴 하나는…….”

“쉿! 들어요.”

무도회가 묘하게 술렁이고 있던 즈음.

아닌 척 흘긋 열심히 훔쳐보기는 해도 정작 다가가는 사람은 없던 불가침의 영역에 누군가 발을 디뎠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유르겐 리닉스. 황후가 아끼는 남동생으로 올해 스물다섯의 차기 리닉스 공작이자, 시한폭탄 같은 주둥이로 유명했다.

제법 잘생긴 얼굴이 샤를리즈를 감상하듯 훑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리닉스의 유르겐입니다.”

칼릭스가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선황자 전하를 드디어 찾으셨다지요. 축하드립니다. 저에게도 먼 조카뻘 되시는 분이다 보니 가슴이 뭉클하군요.”

유르겐이 심장 부근에 오른손을 가져다 대었다.

“작고하신 선황제 전하께서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셨을 겁니다.”

무도회에 순간 정적이 찾아왔으나, 아주 짧았다.

선황제의 죽음은 의문점이 많았다.

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전쟁에서 활약한 기사가 젊은 나이에 이유 모를 병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부디 그러셨으면 좋겠군.”

“선황자 전하께서도 대공 전하처럼 훌륭하게 자라신다면……, 아, 걱정할 필요 없겠군요. 당연히 그러실 테니 말입니다.”

묘한 울림이 있는 말이었다.

‘리닉스 공자가 대체 왜 저러시는 거죠?’

‘부인. 공자를 처음 보셨나요? 원래 저러신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멀쩡…….’

‘그야 황후 폐하께서 리닉스 공자를 애틋하게 여기시니 그렇지요. 공자는 모친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자라셨잖아요.’

한껏 소리 낮춘 목소리를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유르겐이 느물느물하게 웃었다.

* * *

나는 생각했다.

‘머저리.’

황후는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동생을 아꼈다.

정확히는 아끼는 척을 했다.

유르겐을 앞세워 그녀가 알고 있는 정보로 돈을 불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칼릭스에게마저 종종 저따위로 구니, 그녀로서는 칼릭스의 출신을 주기적으로 상기시키는 동생의 멍청함을 교정할 필요가 없기도 했을 것이다.

‘황위에 다른 대안이 없어서 남동생이 난리 치고 다닌다고 한들 황후에게 크게 피해가 될 것도 없고.’

현 황제는 즉위 자체는 순조로운 케이스였다.

칼릭스가 있지만, 그에게는 출신 모를 무희의 피가 흘러 황위에 적합하지 않다는 평이 당시 우세했던 데다 나이도 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사샤가 나타났지.’

유르겐 저놈. 입 잘못 털고 다니다가 언제고 황후한테 한 소리 듣겠군.

공작 영식인데다 제법 괜찮은 얼굴과 적당히 젊은 나이에도 좋아하는 독자가 거의 없던 캐릭터스럽다.

“선황자 전하께서도 대공 전하처럼 훌륭하게 자라신다면……, 아, 걱정할 필요 없겠군요. 당연히 그러실 테니 말입니다.”

“그렇겠지.”

칼릭스가 여상하게 대답했다.

“대공 전하는 그 점이 가장 근사합니다. 무릇 스스로에 대해 파악하고 있기는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매번 느낍니다만, 정말 멋지시군요.”

유르겐이 하하 웃었다.

비슷한 나이임에도 가문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상대에게 품은 열등감이 이렇게 못나게 표출되었다.

칼릭스는 아마 이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생각일 것이다.

‘아, 안 돼.’

양심이 쑤셨다.

원래 이 장면에서 나서는 사람은 이리안이다.

그녀는 오목조목 따지며 제 남자를 보호했고, 칼릭스는 모두가 ‘리닉스 공자는 앞뒤 가리는 법이 없다니까. 쯧쯧.’ 정도쯤으로 넘기며 아무도 그를 편들어주지 않았던 상황에 진지하게 화를 내는 이리안을 보고 동요한다.

‘미안하잖아…….’

같은 상처를 여러 번 받아 더는 실감하지 못한다고 해도 진짜로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속으로 이마를 빡빡 때리며 입을 열었다.

“리닉스 공자…….”

나는 눈을 치켜떴다.

그간 몇 번의 실전 연기 경험에다 나 역시 그를 싫어하는 무수한 독자 중 하나였으므로 퍽 자연스러운 싸가지 말투가 장착됐다.

“그대도 대공 전하를 마음에 담고 만 겁니까?”

“뭐, 뭐요?”

“이렇게 보는 이들이 많은 자리에서, 그것도 제 면전에서 저런 절절한 고백을 하다니.”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영식에게 결투를 신―.”

칼릭스가 내 손가락 끝을 가볍게 잡았다.

‘이 김에 손 보려고 했더니 이것까진 안 되나 보군.’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신청하고 싶은 마음입니다만,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공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신청할까요?”

들뜬 마음으로 유르겐을 쳐다봤다. 그가 난데없이 광대를 붉히더니 큼 헛기침했다.

“결투라니 연약한 여인과 어찌 할 수 있겠소.”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인데 성별이 뭐가 중요합니까.”

“그거 아니라고 하지를 않아!”

“그럼 무엇입니까!”

“그, 그야…….”

유르겐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나는 인상 못 찌푸리는 줄 아나. 그런 걸로 치면 나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안면 근육이 기억하고 있는지 ‘그 표정’을 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을 뿐인데 절로 그 얼굴이 됐다.

“아, 아무튼 그런 거 아니요!”

어깨를 찔끔 떤 유르겐이 씩씩거리며 사라졌다.

‘찌질한 놈.’

그 뒷모습을 매섭게 노려보다가, 내 볼에 닿는 시선을 뒤늦게 느꼈다.

칼릭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묘한 시선이었다.

‘……어라?’

나는 조금 당황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리닉스 공자를 엿 먹이려고 하는 걸로 보이겠지만, 내가 하면 정말이지 진심으로 보일 게 분명하다.

‘아, 알아챌 줄 알았는데.’

나는 칼릭스에게 얼굴을 숙여 달라는 제스처를 얼른 취했다.

“사실, 저 리닉스 공자가 대공 전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감히 전하께 저러는 게 싫어서 이랬을 뿐이에요.”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눈에 야트막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칼릭스가 말했다.

“응. 나도 알았어.”

‘다행이다!’

“왜냐하면, 공녀는 내게 관심 있는 사람에게 이 정도로 끝낸 적이 없었으니까.”

“…….”

나는 금세 숙연해졌다.

그래서 다짐하듯 결연하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저 전하를 다시는 안 좋아할 겁니다.”

“…….”

칼릭스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입술이 웃을 듯 말 듯 조금 올라가고, 어떤 말을 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황족의 입장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

* * *

황제, 안토니오는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그게 정말이오?]

[예, 그렇답니다.]

[이리도 큰 경사가 찾아오다니!]

황비를 들여야 하나 진지하게 고심을 할 즈음. 황후가 드디어 회임을 한 것이다.

그리고 황손이 안정되었다는 확언을 받아 내어 오늘 그 기쁜 소식을 밝힐 생각이었다.

황제의 눈에 늘 탐탁지 않았던, 동생이라고 하기도 수치스러운 것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조카를 앞세워 섭정을 하고 싶었을 테지.’

비죽 조소를 삼키며 황제는 결코 잃지 않겠다고 다짐한 권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두 이렇게 참석해 주어 기쁘군.”

축사가 끝을 향해 달려가던 그때. 황제는 다시 칼릭스를 찾았다.

동생은 언제나처럼 무심한 눈이었으나, 안토니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기쁜 소식이 있어.”

서두만 뗀 말에 귀족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느긋하게 그 순간을 만끽하며 황제는 황후를 바라보았다.

카타리나 황후가 조금 볼록한 배를 손바닥으로 감싸며 눈꺼풀을 내렸다.

“황후가 황손을 회임하였다네.”

정적은 아주 짧았다.

“경하드립니다. 폐하!”

앞다퉈 쏟아 내는 축하에 황제는 턱을 조금 올렸다.

“내 동생께서도 조카가 무사히 탄생할 수 있도록 축하 한마디 해주겠어?”

그가 갖지 못해 증오스럽던 벽안이 이 순간만큼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자리에서, 칼릭스 네가 해주는 축하보다 안심될 게 없을 것 같거든.”

그 말에 내포된 바는 분명했다.

산파도 없이 홀로 출산한 이름뿐인 황비를 비웃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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