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00) (100/232)

100화

‘왜 나를 구했던 거야?’

어째서 샤를리즈 리엔타를 외면하지 않았느냐고. 그것은 한 소설의 남자 주인공으로서 가져 마땅한 정의감이었냐고.

[알려 줘, 샤를리즈.]

무엇이 알고 싶었던 거야.

그리고 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척 손등으로 볼을 가볍게 훔쳤다.

따뜻한 물기가 동그랗게 추락한 지점이었다.

* * *

시곗바늘을 조금 되감은 시각.

칼릭스의 근처는 원래도 사람이 적기는 했다.

물밑에서 치열한 경쟁 끝에 승리한 자만이 거머쥘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번은 비슷한 듯 달랐다.

황제가 칼릭스에게 명백히 도발을 한 직후인지라 다들 아쉽게 힐끔힐끔 훔쳐보면서도 다가올 용기는 품지 못한 것이다.

다른 도발이었다면 그럼에도 용기 내는 귀족들이 결코 적지 않았을 테지만, 비참하게 죽은 황비가 언급된 탓이 컸다.

정작 당사자인 칼릭스에게는 잦은 언급으로 익숙해져 아무렇지도 않은 발언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

계속,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는 느낌은 있었다.

차근차근 나아가야 하는 길을 이대로라면 제 욕심껏 마구잡이로 밟을 것만 같다는 위화감.

그래서 줄곧 망설였는지도 몰랐다.

넘쳐흐르는 것은 아무리 막아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서, 흘러넘친 감정을 도저히 단어로 정립하지 않을 수가 없는 순간이 있었다.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있는 듯. 이 정도면 족하다는 것처럼.

실은 그럴 수 있던 적이 없었는데도.

눈꺼풀을 내려 가린 서늘한 벽안에 묘한 웃음기가 스몄다.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다.

‘그래.’

그녀가 힘껏 부딪쳐 했던 일을 이토록 쉽게 바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칼릭스는 불현듯 눈꺼풀을 올렸다.

성큼성큼 발을 내디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엘루이든 대공.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소.”

바로 벨리악 리엔타였다.

* * *

건국제 기념 무도회가 끝난 후.

퍽 늦은 시간이었으나 리엔타 공작저 가주의 침실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쿠흥.”

“크훙.”

리엔타 공작은 집사와 마주 보고 앉아 술잔을 넘겼다.

“멜리사 부인은 대단합니다.”

“내 그렇다지 않았어.”

[샤를리즈 아가씨께서 언제나 품속의 아이일 수는 없는 법이지요.]

공작이 소심하게 꿍얼거렸다.

“하지만 상대가 무엇보다도 엘루이든 대공이지 않은가. 게다가 샤를리즈는 아직 스물한 살밖에 되지 않았단 말일세.”

“마님이 가주님과 혼인하셨을 때가 스물다섯이셨지요.”

“그래. 내 딸은 아직 너무 어려!”

그때 공작의 나이가 스물이었다는 말은, 둘 다 약속한 것처럼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 년간 못 보았으니 스무 살로 쳐도 돼.”

“맞습니다!”

내심 마음에 걸리던 점마저 깨끗하게 해치운 두 사람이 다시금 술잔을 넘겼다.

도수 낮은 과실주로도 얼굴이 벌겋게 되어 집사는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고, 공작은 술을 더 마실 자신이 없어 안주만 깨작거렸다.

우울한 얼굴로 리엔타 공작은 무도회에서의 일을 회상했다.

[엘루이든 대공.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소.]

용감하게 다가가 물어본 후 돌아온 답에 꼴사납게 다리가 떨리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저 혼자 공녀를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절대 말하지 말아야지.’

[제가 그만 대공 전하를 다시 마음에 담고 만 것 같습니다.]

벌벌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샤를리즈가 언제나처럼 뚱한 얼굴로 그에게 인사했다.

[아버지. 저 먼저 갑니다.]

[어디를! 어디를 가는데!]

[흥이 떨어졌습니다.]

[아. 그, 그거였……. 내가 재미있게 해줄 수 있다!]

다른 이들은 무척 재미있어했거늘…….’

[사과가 웃으면 무엇인 줄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풋사과란다!]

[다음에 뵙죠.]

그리고 샤를리즈는 정말로 돌아서 멀어졌다.

‘그래도 다음 것은 정말로 재미있을 터이니.’

공작이 어깨를 축 내려뜨렸다.

집사와 머리를 맞대 고심한 끝에 찾아낸 이야기로도 유쾌해질 수 없을 만큼 당장은 침울했다.

* * *

이튿날.

나는 날이 밝자마자 집무실에 쳐들어갔다.

“아. 또 오셨습니까?”

시큰둥하게 대꾸한 리반은 누구보다 빠르게 복도로 빠져나갔다.

누가 보면 마치 은밀한 대화를 편히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는 배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만, 나는 안다.

저건 그저 본인의 휴식 시간을 챙기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했다!

‘저번에 이렇게 농땡이 피울 시간에 일하는 게 더 빨리 퇴근할 수 있지 않냐고 물어봤더니 이렇게 답했었지.’

[노, 노, 농땡이라니.]

화드득 반응한 리반은 나를 쏘아보면서도 그래도 대꾸는 해 줬다.

[일곱 시에 퇴근할 수 있다면 열심히 하는 게 맞지요. 하지만 일을 해도 아홉 시에 퇴근할 수밖에 없다면요?]

아홉 시는 일이 아무리 많이 밀려 있어도 쉬러 가라며 칼릭스가 내보내는 시간이라고 했다.

아무튼 나는 쓸데없는 생각은 이만 접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금…….

……아니.

솔직히 말하겠다.

아주 매우 몹시 많이 놀라고 말았다!

“왔어, 샤를리즈?”

칼릭스가 사르르 웃었다.

나는 근처에 있는 의자를 꾹 잡아 자세를 유지했다.

‘……세상아.’

내가 힐끔힐끔 훔쳐보고는 했던 부분이 모두 합쳐진 결과물이 이리도 위대했다.

반쯤 얼이 빠졌지만 괜찮았다.

칼릭스를 볼 때 대체로 나는 이랬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대단하기는 했으나 이미 겪었던 일의 연장선이었다.

그래서 나는 머릿속으로 마구 세상을 찾으면서도 침착하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바로 보는 게 낫겠지?”

칼릭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손마디에 턱을 괸 얼굴의 거리가 유독 가까웠다.

그래서 좋았다! 아니다. 싫었다!

‘세상님…….’

다행히도 칼릭스의 동공에 비치는 나는 흉물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진 않았다.

커튼을 걷는 손은 주름져 있었다.

필리엄 백작의 굳은 눈은 몸을 돌린 즉시 부드럽게 풀렸다.

“아리아.”

벌써 오 년째 잠든 손녀를 바라보는 눈이 깊고도 다정했다.

같은 증상으로 결국 죽고 만 하나뿐인 자식이 남긴 소중한 존재. 유일한 가족.

한때는 정도만 걸었던 사내의 더럽혀진 손이 아리아의 머리카락에 차마 닿지 못하고 허공을 매만졌다.

어여쁘던 검은 머리카락은 긴 투병 생활 때문에 색이 바라 푸른빛까지 돌 정도가 되었다.

과거의 건강했던 모습을 찾기 어려운 지금도 모두 다 괜찮았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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