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01) (101/232)

101화

나는 일단 일어났다.

내 동작을 따라 칼릭스의 얼굴이 젖혀졌다.

“벌써 가려고, 샤를리즈?”

조르듯 하는 질문에 냉큼 다시 앉고 싶은 마음을 애써 꾹꾹 눌렀다.

“예. 내일 또 뵙죠.”

“오늘도 아니고?”

“예. 어렵겠습니다. 점심도 저녁도 다른 데서 먹고 올 생각이에요.”

“그래…….”

내리뜬 속눈썹은 자못 처연한 구석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같이 식사하실래요? 사실 약속도 미리 안 해둬서 다음에 찾아가도 되거든요!’하고 싶어지는 얼굴이었다.

‘아, 아, 아, 안 돼!’

다시 정신을 빡 차리는 데 겨우 성공한 나는 빠르게 스르르 이동해 집무실을 탈출했다.

* * *

눈을 질끈 감아 견뎌 낸 끝에 도착한 침실에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간 느낀 묘한 위화감이 진득한 질감의 밀랍처럼 뇌리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푸른 백합.’

제목 진짜 못되게 지었다며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 이리도 찝찝한 이유는 하나였다.

‘무언가의 안내서.’

이 책이 도무지 단순한 소설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로나터스 후작의 머리카락 끝이 푸르게 변색된 이유를 튜베롯 독약과 다른 물질을 조합해 생긴 부수 작용이라고 생각했다.

필리엄 백작의 손녀와 로나터스 후작의 증세가 같기도 하니, 백작의 손녀 역시 혼합된 독약을 주기적으로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정도면 애초에 나한테 거짓말했던 걸 수도 있겠군. 증거를 남기지 않는 독살이 가능하다고.’

그놈 역시 리엔타 공작의 면책권이 회수되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수하를 손에 꽉 쥐고 굴리기 위해 튜베롯 독약을 사용할 정도라면, 이 독약에 그놈은 분명 깊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칼릭스한테 튜베롯의 주요 자생지가 신전인 이유, 그냥 모양 때문에 신관들이 가꾸는 건지, 아니면 특수한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인지 물어보고 나올걸!’

아쉬워하며 힐끔힐끔 방문을 쳐다보다가 나는 마음을 접었다.

“그래. 내일 물어보자.”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없어.’

칼릭스는 그냥 가만히 있을 뿐인데도 그에게 안 넘어갈 자신이 없다.

“…….”

나는 슬픈 숙명을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왼손등을 꾹 눌렀다.

‘얍.’

피부 위로 육망성이 흰색으로 그려지고, 야트막한 빛이 시야를 밝혔다.

그렇다. 나는 신수한테 물어볼 생각이다.

힘이 약해 비실거려도 이 세계의 신과 비슷하니 뭐 알고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현신하자마자 신수는 귀찮다는 투로 물었다.

―또 무슨 일이냐.

‘바쁜 일 있으십니까?’

―없다.

‘아하.’

나는 이 세상이 소설 속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두 주인공과 제목에 얽힌 위화감도 밝혔다.

무슨 일인지 가만히 경청하던 신수가 툭 말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소설은 아니다. 세계를 엿본 누군가가 옮겨둔 것일 테지.

“예에, 뭐.”

정신 승리 같다는 말은 하지 않으며 나는 흐려진 눈을 또랑또랑하게 떴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백합이 혹시 저를 말하는, 아, 아니야! 아냐. 저 아니에요!”

―아주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나는 이마를 부여잡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서글프다.’

내가 무슨 자기애 넘쳐서 스스로 백합이라고 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백합이라고 하는 것일 뿐인데.

그것도 라베트랑 비교해서 낄낄거리려고 그런 별칭 붙인 건데!

나는 침울하게 물었다.

“그럼 뭡니까.”

-난들 알겠느냐? 간다.

신수는 그러고 정말로 쌩하니 사라졌다.

나는 아직도 뜨끈한 이마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어깨를 축 내리뜨렸다.

‘폭력 신수.’

아는 거 정말 하나도 없어!

음울하게 외출 준비를 하던 도중, 그러고 보니 신수가 힘을 되찾을 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샤의 각성열이 지나갔으니 정말로 금세였다.

‘크게 뜯어내야지.’

언제 침울했냐는 듯 음흉하게 웃은 나는 방문을 힘차게 열었다.

* * *

“공녀님이잖아?”

나가기 전에 사샤 보고 갈랬더니 루카스가 있었다.

내가 얼빵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지 루카스가 알아서 설명해 주었다.

“오늘 선황자님 만나겠다고 서신도 보냈어. 그것도 일주일이나 전에. 나는 공녀님과 다르다고.”

루카스가 뻐기듯 말했다.

“그랬군.”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사샤의 손을 조물조물 만졌다. 심란해진 마음을 안정시키고자 집중하고 있는데, 꼬마가 자꾸 말을 걸었다.

“그런데 어디 외출하나 봐?”

“응. 점심이랑 저녁 다 밖에서 해결할 생각이야.”

사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상체를 조금 굽혀 작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도 내 첫 번째 친구는 언제나 사샤야.”

분홍색 물이 조그마한 얼굴에 번지고, 아이가 엷게 웃었다.

두 손으로 내 귀를 야무지게 감싸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숨이 잔뜩 섞여 있었다.

“저도요. 저도 그래요.”

속으로 히히 웃은 나는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사샤의 손을 잡았다.

“방금 한 이야기, 나는 사샤랑 가장 친하다는 거였어.”

“비밀 얘기 아니었어?”

“모르면 너 심심하잖아.”

“뭐, 몰라도 됐거든?”

부루퉁하게 팔짱을 앞으로 낀 루카스가 새침하게 고개를 조금 돌렸다.

“그럼 나는 몇 번째야?”

‘엉?’

“나 그렇게 귀찮게 했던 거 잊었어? 하도 찾아와서 궁금해서 그래!”

“기다려 봐.”

나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었다. 사샤. 리엔타 공작. 멜리사 부인. 집사. 노아. 이리안. 에반스 경. 라베트. 로제타. 로르 경…….

“됐어! 안 궁금했어!”

루카스가 얼굴을 구겼다.

꼬맹이의 감정 변화는 정말 모르겠다.

열심히 세고 있던 손을 허망하게 펼쳤다.

냉차를 꿀꺽꿀꺽 넘긴 루카스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그런데 공녀님 의외로 친구가 많네?”

“사용인들도 포함돼 있거든.”

“뭐야. 친구 없잖아.”

나는 쭈그러졌다.

“간다.”

절뚝절뚝 일어난 뒤 응접실을 나가서 미처 몰랐다.

“그러고 보니, 선황자님. 내가 아는 다른 애가 말해줬는데 건국제 기념 무도회에서…….”

루카스가 사샤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그리고 그 말이 불러올 후폭풍을 말이다.

* * *

마차를 타고 가며 나는 그놈을 잠시 돌이켜보았다.

황위 교체 바라지 않고. 카타리나 황후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고. 흑마법사를 다루고. 귀족파 수하들을 두었고. 골수 황제파인 로나터스의 손발을 자르려고 했고. 까칠한 수염을 가진 걸 보면 수염을 기르는 것 같진 않고. 예정대로라면 고위 신관이 되었을 로단테와 합착 관계였고…….

‘이렇게만 보면 귀족파일 것 같은데 말이지.’

나는 턱을 쓸었다.

‘로브로 얼굴이랑 체형 다 가리고 에프홀 모양 성물 챙겨서 야밤에 필리엄 백작저 담 넘을까.’

그리고 필리엄 백작이 계속 말을 하게 시키며 성물이 반응할 때까지 어깨를 후려치는 거다.

‘괜찮은데?’

순간 혹했다가 마음을 접었다.

‘그놈은 아무것도 발설 못 하도록 흑마법을 강제할 만큼 신중한 성격인데 본인 정체가 밝혀지는 상황에서 어떤 주술이 발동될지 몰라.’

만일의 경우 놈이 흑마법사를 이용해서 잠적하면 잡을 도리가 없다.

작정하고 숨은 흑마법사는 황실도 못 잡는다.

‘그래도 일단 필리엄 백작한테 접근은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하다.’

백작은 이십 년을 그놈에게 충성했고, 꽤나 오래전부터 회의감을 느껴온 것 같다.

‘흠. 당연히 느껴야지.’

그뿐, 필리엄 백작에게 별생각은 없다.

내가 백작에게 당한 것도 없는데 마치 피해자처럼 ‘지옥에 떨어질 놈!’ 하는 것도 이상하고, ‘자식과 손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력했다니 안타까워라.’ 하는 것도 웃기다.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바로 이클리스 백작저였다.

* * *

“안녕.”

“공녀님?”

실내용 드레스에 숄을 걸친 로제타는 희한한 것 보는 얼굴로도 나를 들여보내 주었다.

졸졸 따라가자 도착한 곳은 응접실이었다.

배고프니 밥 먹자는 말을 애써 풀어 말했다. 불청객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였다.

“점심 식사 시간에 와서 미안해. 나 때문에 밥을 굶을 필요는 없는데.”

“제 점심이에요.”

그러며 로제타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나는 충격에 빠져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지금쯤 대공 전하와 오붓한 시간 보내셔야 하지 않아요?”

‘어라?’

로제타는 조금 토라진 얼굴이었다.

나는 눈을 굴리다가 조심스레 포크를 내려놓았다.

“미리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고 서운하다는 건 아니에요. 연인 사이의 일은 모두 연인의 것이니까요. 그래도 친구 사이에 어느 정도는 이야기해 주실 수 있으시잖아요. 그거 아세요? 공녀님과 제가 나눈 서신만 보면 꼭 한 주군을 모신 충복 사이의 대화 같다구요.”

“연인?”

“네. 대공 전하와 공녀님이요.”

“어? 어어?”

나는 빠르게 케이크를 입에 밀어 넣어 기력을 보충했다.

“전혀 아니야!”

로제타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숨기시려는 거예요? 연회홀에서 그렇게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셨는데 통하겠나요. 공녀님과 대공 전하께서 정원에서 밀회를 나누는 것을 본 사람들도 있다고 하던데요.”

‘본 사람이 있다니 칼릭스랑 정원을 빙빙 돌았다는 소문은 따로 낼 필요 없어서 다행인데…….’

그랬다. 나는 저런 소문을 내려고 했다.

만약 그놈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면, 수하들이 대화를 나누는 당일 하필 연회장에서 사라진 나를 보고 의아함을 추가 적립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의심하면 어쩔 수 없지.’

저 시도로 나는 그놈의 의심을 감수할 만한 것을 얻었다.

“로제타. 생각해 봐. 만일 네가 대공 전하라면 나를 사랑할 수 있겠어?”

로제타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얼굴로 나를 주시했다.

“……그렇네요. 애초에 그것부터가 문제였어요.”

“그치?”

“그럼 왜 서로 좋아한다고 하신 거예요?”

“돈독한 사이라서 그래.”

나는 뿌듯하게 말했다.

로제타는 또 얼굴을 찡그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다면야. 제 일도 아니니까.”

그러고는 차를 우아하게 마셨다.

“그런데 왜 오신 거예요?”

“로제타.”

나는 로제타의 손을 소중하게 잡았다.

로제타는 “왜 이래요?” 하며 콧잔등을 찡긋하면서도 손을 내주었다.

“나…… 고민이 있어.”

처량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가자, 로제타도 어느새 진중한 얼굴이 되어 내 말을 경청했다.

“정말, 큰 문제네요.”

“그렇지?”

“저만 믿으세요.”

로제타가 자신의 가슴께를 오른손으로 나붓하게 두드렸다.

내 주변의 유일한 경험자를 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고마워. 로제타!”

“뭘요.”

“빛이 나. 로제타!”

“이제 아셨어요?”

멋있고, 눈부시고, 대단하고, 총명하다며 나는 손뼉을 짝짝 쳤고, 로제타는 사양 한 번 않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 자신만만한 모습에 나는 두 손을 모으고 로제타를 연호했다.

……로제타의 경험은 로맨스 소설을 통한 간접 경험뿐이었다는 걸, 그때 알았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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