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다행이다. 다행이야.’
속으로 히히 웃으며 나는 주린 배를 부여잡고 마차에 올랐다.
로제타와의 대화가 예상보다 길어져 이미 석찬을 끝냈으면 어떡하나 긴장됐는데 다행히 아직이었다.
“미리 말씀해 주셨다면 식사 준비를 더 열심히 했을 텐데요.”
말만 보자면 ‘그러길래 너 왜 연락도 없이 왔냐’ 같지만 일리든은 정말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흠.’
청빈하고 훈련에 진심인 기사의 식탁답게도 내 사랑 흰 빵은 보이지 않고 풀과 고기 한 덩이뿐이긴 했다.
‘채소를 먹으면 깨작거리는 것 같겠지……?’
이전 생의 기억이 더 뚜렷한 내겐 고기보다 싱싱한 채소가 더 강렬한 존재이지만 말이다.
나는 고민하다가 스테이크를 크게 한 조각 자르고 입에 넣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맛있어.”
굳이 연기할 필요는 없었다. 정말로 맛있었기 때문이다.
일리든이 다행이라는 듯 얼굴 근육을 이완시켰다.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 요리, 경이 만든 건가? 식사 준비라고 말하길래.”
“예. 식사는 제가 준비하고 있습니다.”
완전 이등 신랑감이었다.
일등이 되기에는 안타깝게도 그의 부모가 그랬다…….
“곧 휴가가 끝나는데 어떡할 생각이지?”
휴가를 한번 쓰고 한번 연장했다고 해도 아직도 휴가로 낼 수 있는 일수가 석 달은 남았을 거다.
나 같으면 단비처럼 내려온 휴가를 흠뻑 맞으며 팽팽 놀기나 했을 텐데 일리든은 고심하는 얼굴이었다.
“복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채소를 빠르고 신속하게 입에 밀어 넣고 나도 잠시 생각했다.
‘그럼 슬슬 시작해야겠어.’
리엔타의 줄은 잡았지만, 황제가 기회를 엿보다 일리든을 기사단장직에서 쳐 내지는 않을 정도.
그 정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에 없다.
‘일리든이 기사직에 진심이라는 말이 파다해서 다행이다.’
일리든 포르테는 ‘얼마나 절박했으면…….’ 리엔타 공작은 ‘얼마나 패악을 부려댔길래…….’의 말을 들을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일단 밥부터 다 먹고 말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식사에 열중하고 있을 뿐이다.
절대 이 대화보다 밥이 우선이기 때문이 아니다.
후식으로 나온 따끈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는 맞은편을 슬쩍 보았다.
남자는 본연의 화려한 색채와 달리 곧고 단정했다. 한 번도 느슨하게 웃은 적 없을 것만 같은 얼굴로 찻잔을 기울이는 동작이 유려하다.
이번에는 코밑을 슥 훔치지 않았다.
난 강해졌다.
“경. 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어.”
……어째 밥부터 열심히 먹긴 했지만 그건 인간의 본능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경은 황실 1기사단의 단장이며, 리엔타는 중립파지. 그래서 앞으로 경의 행보는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할 거야.”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정치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하자.”
일리든의 자안이 나를 향했다.
“대신 ‘포르테 경이 안타깝다, 불쌍하다’. 어쩌면 ‘자존심도 없다’ 이런 말을 듣게 될 수도 있어. 괜찮겠어?”
일리든이 야트막하게 웃었다.
“익숙한 말이로군요.”
“좋아.”
나는 지체하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원래는 네 시에 찾아와 석찬을 함께 할 생각이었는데, 다섯 시에 온 바람에 벌써 여섯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외출 준비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하지.”
* * *
수도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의상실은 늘 손님이 끊이지 않지만, 요 근래는 한층 붐볐다.
마담 프리지아는 조금 어설프게 웃었다.
‘……공녀의 미색 드레스 덕택이지.’
성격은 말도 못 할 만큼 엉망이나, 얼굴 하나 특출나게 예쁜 건 사실이었다.
유사한 드레스를 입는다면 공녀가 본인 따라 했다며 머리채 잡을까 봐 걱정됐는지 모티브만 딴 정도로 유행했지만 말이다.
그때,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돈이 들어오는 소리는 언제나 아름답다. 환하게 웃으며 돌아본 마담은 그만 웃는 얼굴 그대로 굳고 말았다.
샤를리즈 리엔타였다.
은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올렸기 때문인지 냉막한 얼굴이 유독 도드라졌다.
착용한 액세서리라고는 두 영애와 맞췄다는 소문이 파다한 목걸이뿐이었는데도 화려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정말…… 얼굴만 보면 영감이 떠오르기는 하네.’
마담은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 다가갔다.
직원이 안내한 자리에 앉은 샤를리즈는 카탈로그를 보고 있었다.
관심 없다는 듯 보던 무표정한 얼굴이 마담을 향했다.
순간 찔끔한 마담이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일전에 저희 의상실에서 제작하신 드레스가 다행히도 공녀님의 심미안을 만족한 걸까요? 또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어…….
마담은 입을 두어 번 뻐끔거렸다.
공녀의 존재감이 워낙 강렬해 시선이 미처 가지 못했는데, 당연히 염두에 두고 있던 엘루이든 대공이 아니라 일리든 포르테가 그 옆에 있었다.
“오늘은 내가 아니라 경의 의상을 맞추러 왔어.”
샤를리즈가 카탈로그를 테이블에 툭 놓았다.
의상실의 직원들은 이미 다른 고객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사람들 내보낼 필요도 없고.”
공녀의 얼굴이 기울어졌다.
마담은 즉시 직원들에게 눈짓했다.
고객들이 낼 돈이 궁해 이런 건 아니었다. 샤를리즈가 하는 말은 예의상이라도 거절하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준비해 줘. 지금.”
“예?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공녀는 정말로 스무 벌이 넘는 의상을 모두 일리든이 그 자리에서 입어 보도록 시켰다.
단련된 기사는 이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듯 끝까지 힘든 내색이 없었으나, 실은 엄청나게 힘든 일이라는 걸 이 자리의 모두가 알았다!
미남자의 착장에 황홀한 눈을 했던 영애들의 눈에는 차츰 안타까움이 번졌다.
‘이 옷도 잘 어울리시고. 저 옷도 잘 어울리시고. 그냥 얼굴이 잘생기셨고…….’
‘공녀님이 구매하시는 것 같은데 돈도 부족하지 않으실 분이 왜 저리 다 입어 보도록 하시는 걸까요?’
‘그야 눈요기 아니겠어요?’
‘어머…….’
그 이야기는 샤를리즈가 무기 상점에서 “이 검은 투박해서 일리든 경의 외모와 어울리지 않아.”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정설로 굳어졌다.
그랬기에 일리든 포르테가 얼마 후 단장직에 복귀했을 때, 그 사안의 앞에 더는 ‘예상을 깨고’라는 말을 붙이는 사람은 없었다.
샤를리즈 리엔타가 대가로 손을 써 줬을 테니 말이다.
* * *
이상한 일이다.
분명 옷 갈아입고, 검 열심히 들었던 사람은 일리든인데 정작 지친 사람은 나였다.
나는 휘청이며 마차에서 내렸다.
비척비척 마구 흔들거리며 복도를 걷는데, 내 방 앞에 웬 물체가 놓여 있었다.
뭔가 하고 보니 의자였다. 그리고 거기 앉아 있는 사람은 사샤였다.
어리둥절해 있는데, 얌전히 앉아 있던 아이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샤를 님!”
그리고는 달려왔다.
이번에도 버텨 내야 했는데, 이 허약한 몸은 그만 사샤를 품에 안고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간 몇 번이나 기절해도 멀쩡했던 뒤통수는 이번에도 무사했다.
“어, 어떡……. 죄송해요!”
나는 화드득거리는 아이를 더 품에 깊이 안았다. 모진 세상을 겪은 오늘, 이제야 숨을 쉬는 기분이었다.
“괜찮아. 내 머리는 튼튼하거든.”
“정말이요?”
“만져 봐.”
나는 아이의 손에 내 손을 겹쳐 내 뒤통수를 확인하게 해 주었다.
어디 움푹 들어가진 않았는지 면밀하게 확인한 손이 멀어지고, 아이는 다행이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는 몸에 반동을 줘 상체를 일으켰다.
“나를 기다렸어, 사샤?”
“네. 기다렸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돌아올걸.
어차피 무기 상점에서는 그 대사만 치면 끝이었는데!
“드리고 싶은 질문이 있어서 기다렸어요.”
“뭔데?”
“루카스가 말해 주었는데요.”
아이의 서두가 자꾸 길어졌다.
‘엄청 신나는 말인가 보다.’
품에 안긴 몸이 계속 꼼지락거렸다.
안 봐도 어깨 역시 움찔움찔하고 있을 거다.
“건국제 기념 무도회에서요, 샤를 님이랑 숙부님이랑.”
“응.”
“서로 조, 좋아한다고.”
아이의 얼굴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랬어.”
“그럼…….”
사샤의 푸른 눈이 엄청나게 반짝거렸다.
그저 같이 얌전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아이는 숨에는 색색 소리가 섞여야 할 정도로 뺨이 상기되었다. 나는 발갛게 달아오른 아이의 뺨을 조물조물했다.
“결혼하시는 거예요?”
“응.”
“곧 하시는 거예요?”
“곧 하는 건 아니야. 오…….”
말하려다가 나는 멈칫했다.
‘사촌 아기를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아기인데.’
어차피 파혼하게 될 텐데 계속 오십 년 후라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오? 오, 오십 년이요? 아직도 오십 년…….”
봉긋 솟았던 아이의 어깨가 축 처졌다.
나는 얼른 다시 위로 솟으라며 수습했다.
“오랜 뒤라고는 결코 할 수 없는 시간이 흐르기 전에 하게 될 거야.”
나랑 파혼하면 금방 약혼할 수 있을…….
‘어, 어어?’
그러고 보니 나랑 파혼해도 금방은 힘들 것 같았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분명 칼릭스가 약혼을 파투 냈다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그럼 내가 칼릭스의 약혼녀를 엄청나게 질투하고 못살게 굴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면 파혼하고 내가 먼저 약혼해 버려야겠다.’
이번 것은 계약 약혼이라고 칭해도 될 것 같다.
내가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소설의 법칙보다 중대하고 위대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저, 정말이요?”
“그래.”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양 볼에 조그만 손을 얹고 기쁘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 우리는 오랜만에 한 침대에서 잠을 잤다.
“왕녀님의 소중한 인형이 갇힌 탑을 아기 용사님은 열심히 올랐습니다. 용의 도움을 받는다면 금세 도달할 수 있을 테지만, 도움 없이 왕녀님에게 기쁨을 주고 싶었습니다. 아기 용사님에게 왕녀님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다시 만난 아기 용사님은 이번에도 꼬질꼬질했지만, 조금은 멋진 녀석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