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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03) (103/232)

103화

마치 중요한 시험을 앞둔 사람처럼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난 강해졌다.

무릇 매사 빈틈없이 완벽한 사람의 흐트러진 부분은 새롭고 짜릿한 감각을 선사하기 마련이지만.

그렇지만.

‘……나는 강해졌는데.’

하지만 완벽에 완벽이 더해져 일정 수준을 넘어선다면, 대체로 통용되는 진리는 통할 수 없는 법이 아닐까?

‘강…….’

……강렬한 자극이었다.

내 머리는 결국 파업을 선언했다.

이럴 거면 눈도 동참해야 마땅하건만, 이놈은 지금도 아주 매우 몹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과하지 않게 손질한 머리카락과 단정한 크라바트를 착용한 칼릭스는 어딘지 금욕적인 느낌이 흘렀다.

선이 곧은 콧대에 걸쳐진 은테 안경은 분명 업무를 위한 도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외모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였다.

그는 고개를 조금 기울인 채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정적인 얼굴에서 움직이는 유일한 것이었다.

규칙적이고도 섬세한 작업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무의식적으로 바라보고 있던 나는 이제라도 정신을 빡 차리고 매몰차게 눈동자를 돌렸다.

“튜베롯은 신전이 꽤 의미를 두고 있는 꽃이야. 허가 없이 반출하면 막대한 벌금을 물릴 수 있다는 법안을 통과시켰을 정도로.”

“…….”

저 실례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사람이 바로 나일 것이다.

조금 숙연해져 있는데, 칼릭스가 덧붙였다.

“로나터스 후작저에 옮겨 심은 튜베롯은 워낙 소량이었던 데다 상태도 좋지 못했으니 그 경우로 추론하기는 힘들 것 같고…….”

“제가 가져와 보겠습니다.”

나는 검지로 나를 가리켰다.

칼릭스가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저는 이미 전적이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대공저 정원의 화원 중 한 곳이 흰 꽃들로 꾸며지기도 했고요.”

나와 비슷한 또래의 귀족을 붙잡고 ‘튜베롯 꽃 색이 뭐냐?’ 한다면 ‘은회색이지.’보다는 ‘흰색 아닌가?’라는 답을 더 많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칼릭스가 샤를리즈의 꽃 선물을 대놓고 거절한 일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다 쓸 데가 있나 봐.’

고개를 작게 주억이던 때였다.

“그리고 추문은 이번에도 그대 홀로 감당하고.”

말투는 여전히 담담한데, 어딘지 날카로운 미소가 눈에 박혀 들었다.

“샤를리즈 그대가 어째서 일리든 포르테를 신경 써주는지 그 이유는 묻지 않겠어. 하지만…….”

차가우리라고 생각해 조심성 없이 손을 대고 말 빛깔은, 도리어 화상을 입을 만큼 몹시도 뜨거울 때가 있다.

지금 마주한 벽안이 그러했다.

“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 안부 인사처럼 공녀를 아무렇지도 않게 화두에 올리는 일, 역시 싫어.”

나는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되어 눈을 깜빡이다가 말했다.

“제가 포르테 경을 끌고 다녔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졌긴 하지만, 기껏해야 제가 질투 작전을 펼친다니 뭐니 하는 이야기로 끝일 겁니다.”

추문에 추문을 더하면 내가 되고, 여기에 추문 더해져봤자 티도 안 난다.

그리고 이 정도면 ‘샤를리즈 리엔타’치고 굉장히 온건한 추문이었다!

“저와 포르테 경이 전하 몰래 은밀히 밀회를 가진다는 소문보다는 이쪽이 낫기도 하고요. 제게도 전하께도 타격이 없을 겁니다.”

“타격은…… 벌써 있는 것 같아, 샤를리즈.”

‘헉.’

코피가 나진 않았는지 확인하려던 손이 엉겁결에 이마를 훔쳤다. 식은땀은 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든 수습해보겠다고 말하고자 입을 떼려던 순간, 칼릭스가 뒤늦게 웃었다.

보기 드문 종류의 미소였기 때문일까. 그 입술이 불현듯 눈에 박혀 들었다.

반 뼘이 채 되지 않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선명한 점이 문득 기억났고, 이상하게도 목 안쪽이 간지러워졌다.

‘……공작의 헛기침은 집안 내력이었던 것인가.’

얕은 충격에 빠져 있는데,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떼어두고 만나러 간 사람이 포르테 경이었어?”

“예. 그랬습니다.”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칼릭스가 눈을 접어 웃은 것도 같았다.

“공녀가 붙잡는 나를 버리고 가서 만난 포르테 경과 석찬을 함께 하고, 의상실과 무기 상점을 방문해 경에게 어울리는 물품들을 선물해줬다는 이야기가 사실이었군…….”

‘어라…….’

맞는데, 맞다고 수긍하기엔 뭔가 묘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이 이런 걸까.”

칼릭스가 중얼거렸다.

그가 한 말을 듣자면 정말 서운할 만하기는 했다.

돈독한 사이가 되자마자 꼭 손에 쥔 수집품 취급하며 다른 인맥 쌓기에 혈안인 것 같았다…….

“그건 그저 포르테 경이 복귀할 수 있도록……. 애초에 저는 포르테 경과 친하지 않습니다.”

“응.”

처연한 얼굴로도 성실하게 대답해 주는데 그럴수록 이상하게 미안해졌다.

나는 열과 성을 다해 변명했다.

“이제 얼굴 볼 일도 없을걸요.”

“응. 샤를리즈.”

있지도 않은 말재주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사샤가 화술 수업 들을 때 나도 끼워달라고 부탁해봐야겠다.’

황망하게 다짐한 것도 잠시.

나는 끙끙거리다 눈을 번뜩 빛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음?”

어떤 말에든 반응해주는 다정한 습관의 일부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을 내 제안에 관심이 생겨 하는 물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제가 전하의 마음에 상처를 내버렸으니 전하께서도 저한테 상처를 주시는 겁니다.”

곧은 자세로 앉아 있던 칼릭스가 문득 오른손을 움직였다. 턱을 쓸어내리는 것도 같았고, 입술을 가리는 것도 같았다.

“그건 하고 싶지 않아.”

그냥 다 싫다고 했으면 나도 뚱해졌을 거다.

칼릭스는 바로 대안을 제시했다.

“그보다는 소원을 들어주면 안 될까?”

“소원이요?”

대공 전하의 소원을 제가 들어드릴 수 있을까요……?

그래도 일단 고개는 끄덕여 보였다.

칼릭스는 그도 모르는 사이 내게 준 도움이 많았다.

그러니 나도 칼릭스가 모르는 사이 도움을 줘야 마땅하건만, 오히려 그의 여린 마음에 상처를 낸 나쁜 놈이 바로 나였다.

‘뭐든 도전해보자!’

최대한 해결해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럼…….”

칼릭스가 눈꺼풀을 올렸다.

“공녀의 내일을 내게 줘.”

* * *

‘……엄청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

저녁을 먹고 돌아가는 길. 나는 어깨를 축 내리뜨린 채 복도를 걸었다.

‘어어?’

또 이상한 버릇이 든 모양이다.

내가 걷고 있는 장소는 칼릭스의 집무실이 위치한 그 복도였다.

후다닥 내려가려는데, 복도에 워낙 자주 출몰해 이제는 안 보이면 주변을 기웃거리며 찾아보게 되는 존재를 이번에도 맞닥뜨렸다.

마주치지 않으면 그게 더 생경한 사람이 먼저 인사했다.

“좋은 저녁입니다. 공녀님.”

“얼굴이 왜 그래.”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연 나는 돌연 눈매를 구겼다.

“제 얼굴이 왜요? 뭐가 묻었습니까?”

“응. 아주아주 커다란 게 묻었어.”

“무엇인데요?”

리반이 손등으로 얼굴을 벅벅 닦았다.

나는 여전히 심각하게 그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행복함. 기대감. 그런 것들.”

“티가 납니까?”

리반이 주먹을 입가에 대고 헛기침하며 웃었다.

“그리고 하나 더 생겼어. 긍정적인 기운이야.”

“그만 놀리십시오. 공녀님.”

오르골 틀어놓고 사람을 팬다는 또라이에게도 어금니를 꽉 깨물던 깡다구는 어디 가고 허허실실 웃고 있다.

경계하며 한 발짝 물러섰다.

“내일 휴가입니다.”

“……휴가?”

“예. 휴가 말입니다.”

그리고 리반은 휴식이 방해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는지 한층 예민해진 얼굴로 느리게 멀어져 갔다.

나는 오도카니 선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오늘 밤 사샤의 온기가 필요해.’

혹독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대도 그 순간의 온기로 나는 버틸 수 있었다.

‘얼마나 부려 먹으려고 리반까지 보내고.’

그래도 내가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칼릭스에게는 있나 보다. 뭐든 도움이 된다면 됐다.

눈물을 찔끔 훔치며 신속하게 복도를 탈출한 나는 사샤의 방문을 처량하게 두드렸다.

“사샤.”

침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리고, 도도도 통통 튀는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샤를 님!”

저번에 내가 뒤로 나동그라져서 그런지 아이는 안기는 대신 내 손을 꼭 붙잡고 흔들었다.

아이를 한 손으로 안아 올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 무거워졌어.”

“내, 내려 주세요.”

“좋은 신호야. 키가 금세 쑥쑥 클지도 모르겠군.”

“……정말이요?”

“그래. 십 년 뒤에는 어쩌면 대공 전하보다도 훤칠한 형님이 되어 있을 수도 있겠는걸.”

“그럴까요?”

기대감 어린 목소리였다.

미래가 기대된다니 이것도 아주 좋은 신호였다.

말랑한 볼에 마구 입 맞추는 주책맞은 어른이 되지 않고자 흐트러지려는 정신머리에 힘을 빡 주고 버텼다.

이런 것도 학습이 되는지 나는 아이를 침대에 무사히 내려 줄 수 있었다.

“오늘은 무슨 동화책을 읽어 줄까.”

늘 이런 말로 시작해 아기 용사님 시리즈를 손에 잡는 걸로 끝나지만 이번에도 그냥 해 봤다.

그런데 사샤의 어깨가 움찔움찔했다.

‘어라?’

“이번에는 샤를 님께 제가 읽어드리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좋아.”

나는 사샤의 옆구리에 베개를 두고 벌러덩 누웠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어 앉은 사샤가 내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정돈해 주었다.

‘이것도 집안 내력인가.’

칼릭스가 자주 이러던 게 불현듯 생각났다.

말랑말랑한 손가락이 얼굴에서 거둬지고, 아이가 베개 밑에서 동화책을 꺼냈다.

‘어? 저거…….’

칼릭스가 사샤의 생일 선물로 주었던, 아기 용사님과 씩씩한 왕녀님의 작가가 오직 사샤만을 위해 집필한 바로 그 동화책이었다.

* * *

그리고 그 이튿날.

나는 몇 가지를 깨닫게 됐다.

그중 하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군.’이었다.

건국제 기념 무도회를 앞두었던 어느 날.

흑마법으로 칼릭스의 얼굴을 흉내 낸 인물의 등장을 대비하고자 칼릭스와 머리를 맞대 수신호를 고안해 냈던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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