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알음알음 알려진 종류입니다만…….”
주치의가 말을 아꼈다.
‘확신이 없어서는 아닌 것 같군.’
주치의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분노 따위의 감정을 삼켰을 거다.
아무튼 확실히 독이 아니라면 됐다.
“혹시 이 정도, 내가 사용할 수 있을까?”
요만큼이라며 나는 엄지손톱을 검지 반 마디에 찍었다.
“얼마든지.”
칼릭스가 하는 말은 지금 믿을 수 없다!
나는 주치의와 제이의 기색을 살폈다.
“그러십시오.”
그들은 흔쾌히 수락했다.
‘좋았어.’
이제 가문의 사람들끼리만 회의할 수 있도록 응당 잽싸게 나가야 함에도 내가 눈치 없는 사람처럼 자리를 버티고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
어쩌다 보니 내 눈알은 고도로 훈련되어 종종 요긴하게 쓰곤 한다.
슬쩍 굴려 봤는데, 칼릭스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눈이 둥글게 휘어지고 입술이 말려 올라가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혹시 본인 독살이 아니라 주변인 하나 찍고 독살인 건가?’
아주 몹시 매우 많이 그럴듯했다.
왜냐하면 나는 벌써 세 번째로 인생 3회차의 관문을 건널락말락 깔짝댔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주군!”
문이 벌컥 열리고, 리반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은근슬쩍 조용히 나가기엔 실로 적기였다.
묵례하고 스르르 나가려는데, 칼릭스가 내 손끝을 잡았다.
장갑으로 가로막혀 전달될 리가 없는데도 어쩐지 뜨겁다는 감상이 일었다.
“제 할 일 하고 오겠습니다.”
우묵한 시선이 고이는 듯했으나 잠시였다.
칼릭스는 천천히 내 손을 놓았다.
맞닿은 손이 완전히 떨어지기 전, 나는 서로의 손가락과 손가락을 교차해 깊게 깍지를 꼈다.
“정말로 돌아올 거예요.”
그러니까, 상실 앞에서 그렇게 담담한 얼굴을 할 것 없다고.
많은 것을 가진 것 같으나 실은 모든 것을 잃어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놓아야 한다면 내가 놓을게.’
조금 이상한 기분이 되는 건, 원작의 샤를리즈가 꼭 이런 마음으로 죽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 *
“미끄러우니 조심하십시오. 공녀님.”
지하 감옥 생김새는 다 비슷비슷한가 보다.
리엔타의 구조와 엇비슷했다.
푸른빛이 도는 어스름한 사위 속에서 나는 흉흉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인영을 발견했다.
그 순간 든 생각은 하나였다.
‘기가 덜 죽었네.’
얼굴도 말랐을 뿐, 멀쩡했다.
‘이래서 바이에르로 보내려고 했던 건데.’
나는 코를 찡그렸다.
귀족은 오직 귀족 재판을 통해서만 처벌받을 수 있다는 법률이 있다.
물론 다들 암암리에 어기고 있으며, 칼릭스는 치외 법권의 영역에 속하는 사람이니 애초 상관없다.
문제는 황제가 건수 잡았다며 어떻게든 걸고넘어질 게 뻔했다.
‘사샤가 성년이 되기까지 황위 보전하려면 칼릭스 공격해서 섭정을 못 하도록 막는 수밖에 없으니 귀족 목숨을 파리처럼 여긴다고 부풀릴걸.’
그러니 사샤를 황실에 빼앗길 가능성 때문에라도 엘루이든은 강도 높은 고신을 못 한다.
‘바이에르는 영지의 특수성 때문에 설령 적발되더라도 이리저리 빠져나갈 변명이 많아서 고신을 결코 망설이지 않았을 텐데.’
짧게 한숨을 내쉬며 나는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문득 눈을 깜빡였다.
헤레스 베론이 여기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생각했다.
‘요새 일이 바빠서 저놈에게 미처 신경이 닿지 못했네.’ ‘바쁘긴 엄청 바빴지.’
조금 더 나아가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건 아닌데도 칼릭스가 놈을 내어주기를 바이에르 공작이 기다리고만 있던 걸 보면 나한테 고맙다는 게 정말이었나?’ ‘아무튼 공작 속이 새까맣게 탔겠는데.’ 정도쯤 되겠다.
그 정도 생각, 그 정도 감상으로 찾아왔을 뿐인데.
‘…….’
저놈이 몹시도 싫었다.
그건, 루카스가 더는 바이에르 공자로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사샤 없이는 마주 보지도 않을 관계이기는 해도 툴툴대고 입을 삐쭉이는 솔직하지 못한 꼬맹이와 나는 조금은 친밀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아이를 제 손에서 굴리고자 독한 말도 서슴지 않은 쓰레기의 낯짝이 너무도 멀쩡해서, 나는 철창을 발로 쾅 걷어찼다.
“뭘 잘했다고 아직도 그런 눈이지?”
둔탁한 소리가 커다란 공간을 공명하듯 울렸다.
“말해 봐. 도대체 뭐가 그리도 억울해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느냐고.”
* * *
‘드디어!’
샤를리즈 리엔타가 나타났을 때, 헤레스는 전율했다.
흑마법의 대가는 오직 그분만이 준비할 수 있다. 감옥에 갇힌 채로는 연락도 불가했다.
탈력감에 분노를 곱씹기를 한참.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
어차피 남은 생은 비참할 게 틀림없다. 대의를 이룩하기 위해 협조하는 데 실패했으니 폐기처분당할 몸이었다.
비록 조건을 모두 맞출 수 없어 단발성 공격에 그치겠지만, 공녀에게 영구적인 손상을 남기는 정도는 성공할 수 있다.
‘더 가까이 와라.’
콰앙―
철창을 발로 걷어차는 감정적인 모습에 헤레스는 속으로 웃었다.
이대로라면 잠긴 문을 열고 들어올 터.
그의 예상대로 샤를리즈는 기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열쇠를 가져왔다.
달칵. 자물쇠가 돌아가고, 문이 열렸다.
포박되지 않은 사람을 상대로도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은 고생 모르고 산 흔적이 엿보였다.
마침내 샤를리즈가 그의 머리채를 붙들어 시선을 맞추었을 때.
헤레스는 최상의 적기를 흘려보내지 않고, 흑마법을 발동했다.
그러나 희열로 물든 눈이 혼란으로 잠식되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 는데.”
허망하게 열린 입술 사이로 흐르는 피는 흑마법이 중간에 강제로 중단되었음을 알렸다.
“뭐야.”
샤를리즈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하려고 눈을 그렇게 반짝반짝 빛내는지 궁금했는데 이거였어? 혀 깨물어서 사람 놀라게 하기?”
헤레스는 혼란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마구 중얼거리는데, 샤를리즈가 그의 고개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
“발목 인대를 끊고 광산에 보낼 생각이었는데…….”
선득한 온도의 눈동자가 문득 휘어졌다.
“그럼 바이에르 공작 각하께 죄송한 일이겠지.”
헤레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는 바이에르 공작의 잔인함을 알았다.
그럼에도 괜찮다며 위안할 수 있었던 것도, 감옥에 갇힌 신세로도 입을 줄곧 굳게 다물었던 것도.
모두 오로지 흑마법 덕택이었다.
당장 운용이 어렵다고 한들 급박한 상황에 몰린다면 힘이 폭발할 가능성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무릇, 막대한 힘을 가진 존재란 그러하니까.
다시 그분에게 돌아갈 생각으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무섭니?”
샤를리즈가 사근사근하게 질문했다.
헤레스는 애써 얼굴을 더 구기며 그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럼 내가 하는 질문의 대답 여하에 따라 내 선택이 달라질 수도 있어.”
뜻밖의 제안에 머리를 굴릴 새는 없었다.
샤를리즈가 예고 없이 그의 뺨을 내리쳤다.
“방금 흑마법 발동하려다가 실패했지?”
“무, 무…….”
처음부터 치고 들어온 물음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흑마법사냐고 묻는 정도만 되었어도 동요하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흑마법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었다.
당황해 더듬거리자, 샤를리즈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
그건 탄식과도 닮아 있었다.
헤레스는 허겁지겁 말했다.
“틀렸어. 공녀. 흑마법이라니 우스운 책이라도 읽은…….”
“쓸데없는 말이 길어.”
곱게만 자란 아가씨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샤를리즈는 이런 일에 아주 능숙한 사람 같았다.
적절하게 조여 오고, 생각을 거듭할 시간은 결코 주지 않았다.
“이 계약을 했을 때, 만난 사람 얼굴 기억나?”
그녀가 하는 질문은 시간대가 들쭉날쭉했고, 연관성이 없었다.
거짓 답안을 미리 대비하지 않은 채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질문이 이어졌다.
“……연락은 전령새를 통해서, 큭. 하였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헤레스는 거짓을 말하기를 포기했다. 용케 전후가 맞아떨어지는 거짓을 읊어도 마치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지 샤를리즈가 족족 간파해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얻을 수 있는 건 얻는 게 낫지.’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본인만 몰랐다.
커다란 공간을 불규칙적으로 울리던 파열음이 잦아들었을 즈음.
“아프잖아.”
샤를리즈가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붉게 부푼 손바닥을 장갑에 감추며 샤를리즈는 몸을 일으켰다.
“혼자라서 외로웠을 텐데 안 됐네. 네 동기는 내일 들어올 예정이거든.”
“그게 무, 무슨.”
분명 대답을 한다면 바이에르 공작가로 보내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붉은 얼굴이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어. 생각해 보겠다고는 했군.”
“내게 죄가 있다면 명령에 따랐던 것뿐이야! 공녀는 정작 잘못한 사람을 두고 내게 화풀이하는 것 아닌가!”
분을 못 이겨 소리 지른 헤레스는 뒤늦게 굳었다.
“짜증 나지만 그놈이 사람은 잘 골랐어.”
샤를리즈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유일한 빛을 등진 채로 선명하게 드러난 녹안은 무기질적인 온도를 갖고 있었다.
“그 사람이 루카스에게 공작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라고 했나. 이 집에서 살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정확히 짚었던가? 가문의 사람들은 너를 모두 싫어한다고 말하라고도?”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곧 대답이었다.
“실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데 스스로는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머저리가 뭐라도 된 줄 알고 날뛰었잖아. 너는 권력가의 아이를 네 말로 좌지우지하는 것을 즐겼고, 지금은 너와 내가 거래를 했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금세라도 멀어질 기세였던 발을 붙잡고자 뻗었던 헤레스의 손목을 샤를리즈가 사뿐히 지르밟았다.
“네가 뭐라고 내가 거래를 해.”
“아아악!”
“엄살은.”
코웃음 치며 샤를리즈는 감옥을 빠져나갔다.
뒤로 들려오는 악담은 오히려 정다웠다.
* * *
‘알았어.’
기분이 왜 이러나 했는데, 이젠 알았다. 나는 루카스에게 미안했다.
미안할 일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기분이 그랬다.
‘다음에 만나면 주먹으로 내 다리 한 대 치라고 해야겠다…….’
다른 걸 하고 싶다 하면 그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기분이 더럽기도 했다.
‘나쁜 놈들.’
이럴 때 얼른 잠을 자서 하루를 끝내 버려야 하는데, 슬프게도 내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통하게 외출 준비를 하다가 나는 불쑥 중얼거렸다.
“아, 맞다.”
칼릭스가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는데.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한데 말이지.’
그는 현재 이상한 분말을 흡입해 중독된 상태다.
고민은 잠깐이었다.
열심히 고른 외출복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 이불로 덮었다.
‘약속했으니까.’
상황 영 아닌 것 같으면 그때 돌아와야지.
집무실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는데, 잠잠했다.
“흠.”
슬쩍 문을 열어 살펴본 내부는 고요했다.
다시 문을 닫으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안정을 취해야 하니까 수면을 돕는 약을 복용했을지도 모르겠군.’
시야가 불현듯 환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는 복도에 크게 난 창문을 돌아보았다.
새하얀 달빛이 쏟아지는 정원이 시야에 담겼다.
나는 에휴에휴 하며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어쩌면 필리엄 백작저에서 대공저로 돌아왔을 때 이미 날이 밝아 있어 오늘은 하루를 끝내지 못할 수도 있겠다…….
풀 죽어 걷던 걸음이 어느 순간 멈췄다.
그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