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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06) (106/232)

106화

나는 칼릭스를 유심히 관찰했다.

벌써 시간이 한참 늦어 밤이 깊었고, 군데군데 배치된 마법등은 조도 낮아 은은한 빛깔이었으나 어렵지 않게 보였다.

그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흠…….’

“공녀?”

‘아, 괜찮아졌구나.’

다행이었다.

걸으면서 생각해봤는데, 놈들이 뿌린 가루의 정체는 아마도 사람을 말랑하게 만드는 것 같다.

‘맹하다’ 대신 저 표현을 선택한 데에 내 사감이 들어갔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다.

칼릭스가 우미한 눈매를 살짝 일그러뜨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무슨 일은 전하께 있었습니다.”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몸은 괜찮으세요?”

꼬치 구경하느라 홀리지만 않았어도 칼릭스 옆에 딱 붙어 있어서 같이 마차를 피했을 테고 그럼 가짜 놈이 접근하지 못했을 테니 습격도 없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나야말로 미안해. 그대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와 둘이 있게 만들어 버렸어.”

“둘은 아니었습니다. 제이가 저 멀리 있어 줬어요.”

그리고 다시 침울해졌다.

“아니에요. 제가 꼬치에 정신만 덜 팔렸어도…….”

“그렇게 맛있었어?”

음.

사실 대답은 고민할 것도 없었다.

오늘 본 꼬치 가게에 파리만 날렸던 이유가 있다.

고기 질은 별로였고, 그걸 감추기 위해 소스는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아마 리엔타 공작은 거리의 꼬치는 먹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건 아니고요. 그냥 제가 그런 걸, 음…….”

간혹 이전 생의 기억 혹은 아쉬움이 뇌리를 스칠 때가 있었고, 저 때 잠시 그러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어떤 말을 해도 이상해서 나는 그냥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먹는 거라면 모두 환장합니다.”

“그럼 가자.”

“꼬치에게요?”

벽안에 웃음기가 스몄다.

“안타깝지만, 샤를리즈. 이미 문을 모두 닫았을 거야.”

“…….”

지금 칼릭스에게 나는 정말로 꼬치 집착광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정말로 아닌데!

‘……진짠데…….’

구차하게만 들릴 변명을 속으로 서글프게 되뇌며, 나는 칼릭스를 터벅터벅 따라갔다.

* * *

잠시 뒤.

나는 반쯤 넋을 놓고 포크를 움직였다.

“아주 맛있습니다.”

“여기 우유도 먹어. 그러다 체하겠어.”

“보들보들 퐁실퐁실…….”

위대한 만찬을 감히 단어로 규정해 찬양했다.

“이것이 프렌치토스트입니까?”

“응.”

칼릭스가 만드는 것을 옆에서 구경해 조리 과정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믿기지가 않았다. 빵과 우유와 설탕만 들어갔을 뿐인데 이리도 섬세한 맛이 된다니.

미식의 세계는 무궁무진하고…….

모르고 산 세월이 한스러웠다!

울컥 차오른 눈물을 우유와 함께 삼키는데, 칼릭스가 접시를 바꿔 주었다.

그가 손도 대지 않은 프렌치토스트를 나이프로 정갈하게 잘랐다.

“저어, 괜찮습니다. 전하도 드세요.”

몰캉하고 보드라운 질감이 아니라 마치 케이크를 자르듯 손쉽게 움직이던 손이 문득 멈췄다.

짧게 웃은 칼릭스가 동작을 재개했다.

“이쪽이 더 보람 있어서 말이야.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사양은 한 번이면 충분하지.

나는 히히 웃으며 빵을 해치웠다.

그러던 중, 뒤늦게 속으로 이마를 쾅 때렸다.

‘사람을 앞에 두고 너무 먹기만 했잖아!’

“프렌치토스트를 자주 드셨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도 쉽게 양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이 시간을 잠과 맞바꾸었다!

“음. 그랬어.”

“이 요리법은 어쩌다 터득하신 겁니까?”

“이러면 빵이 부드러워지더군.”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칼릭스가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다.

어느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 칼릭스 엘루이든이라는 사람의 과거 한 자락을 목격한 기분이 되었다.

그건, 조금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기분은 괜찮아졌어?”

오른손등에 왼손을 겹치고 턱을 괸 칼릭스가 느슨하게 웃었다.

“……티가 났습니까?”

“아주 조금.”

얼버무릴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시간을 들여 음식을 차려주기까지 했는데 두 번이나 그러기는 은혜도 모르는 금수 같았다.

나는 포크를 스르르 내려놓았다.

“그놈 있잖아요. 바이에르 공자를 괴롭힌 가정 교사요.”

“응.”

“저는 걔를 생각도 안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루카스에게 미안해요.”

“어째서?”

“루카스랑 나름 친한 사이가 되었는데, 그 애에게 상처를 준 놈을 잊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대가 공자와 나름 친한 사이가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 아닌가?”

“그렇기는 한데요. 그래도 마음이 그냥 그렇습니다.”

말하면서도 이해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칼릭스처럼 어린 나이부터 한 가문을 이끌며 냉정하고도 실리적인 판단만 했을 사람에게는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러더라고요.” 하며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나도 그 마음을 알고 있어.”

프렌치토스트를 우울하게 씹다가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 순간과 지금은 다르고, 현재의 감정으로 당시를 재단하는 건 분명 비합리적이지만…….”

칼릭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모든 일에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면 감정이란 존재의 이유가 없겠지.”

무심코 닿은 시선이 미려한 얼굴을 헤매었다.

“그래서 나도 샤를리즈 그대에게 미안한 게 많아. 하지만 이런 말을 하면 그대는 더 미안하다고 할 사람이니까.”

그건…….

‘제가 당연히 그렇게 말해야 하는 건데요!’

어버버거리고 있자니 칼릭스가 눈웃음을 지었다.

“한 번만 봐줘. 이렇게 계속 기회를 노리다가 겨우 말할 수 있었어.”

나는 입을 여닫다가 끝내 프렌치토스트 한 조각을 밀어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칼릭스가 빙긋 웃었다.

어쩐지 착한 사람 등쳐 먹는 못된 놈이 된 기분이다.

나는 한때 노아를 보았던 심정으로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이 너무 좋은 사람 같으니라고.’

계급이 깡패인 세상에서 대공이라 다행이었다.

프렌치토스트는 금세 동이 났다.

각자의 침실로 향하는 길.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던 끝에 이런 말을 하고 만 이유는, 글쎄 모르겠다.

방금 먹은 프렌치토스트가 마음을 말랑하게 만든 것일 수도 있고.

멋대로 동질감을 느껴 우리가 가까워졌다는 착각이 달빛을 타고 흘러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오늘 그가 보여 주었던 상냥함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애초 다정했다.

“떠올랐어, 샤를리즈.”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가까운 관계의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걱정인데, 얼마나 가까워야 걱정되는지 모르겠다는 거잖아?”

“예…….”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더 빨리 헤레스를 족치고 바이에르로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 절대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 사람과 가까워지며 가늠해 보는 건 어때?”

마치 손을 내밀 듯 그가 말했다.

“오늘,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 그대의 짐을 나도 나눌 수 있게 허락해 줘. 혼자 감당하는 모습, 보고만 있고 싶지 않아.”

느릿하고도 분명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공녀가 걱정하는 무슨 일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있는 힘껏 노력할게.”

그것을 기꺼이 맞잡고 싶어졌다.

* * *

나는 침대에 엎드려 주먹을 날렸다.

지난 짝사랑 일대기가 내게 외쳐대고 있었다.

‘야. 너 진짜 위험해!’ 하고 말이다.

거기에 나는 대답했다. ‘벌써 알아! 한참 전에 알았다!’

내 사랑은 속도가 남달라 교차한 적은 없지만, 이전 생의 환경이 환경이었던 만큼 내가 잠깐이나마 사랑에 빠졌던 사람들은 거의 쓰레기였다.

사랑에 빠진다고 쓰레기가 꽃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유효 기간이 짧은 사랑이 더 짧아진 덕택에 안 그래도 꼬인 인생 더 꼬이는 불상사는 없었다.

“뭐, 결국 그렇게 죽었지만.”

아무튼 혹시 몰라 로제타를 찾아가기를 잘했다.

[……대공 전하를 사랑하게 될까 봐 걱정이시라고요?]

[정확히는 내가 대공 전하를 사랑하는 걸 들킬까 봐 걱정이야. 한번은 좋아하게 될 거야. 분명해.]

[‘한번은’은 아니죠. 두 번, 아니지. 일 년을 한 번으로 쳐도 여섯……번이던가요?]

[그렇게 치면 애석하게도 여덟 번이로군.]

[그럼 그냥 포기하세요. 여덟 번이나 아홉 번이나 대공 전하께는 똑같을걸요?]

[내 마음은 달라. 그게 문제란 말이야…….]

그때처럼 침울한 얼굴로 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이 몸으로는 조금 빨리 가려다가 정말 일찍 가게 될 수 있으므로 2층에서 뛰어내리는 대신 발소리를 죽여 대공저를 벗어났다.

내 두 다리만으로 움직이는 슬픈 비극은 더는 일어나지 않았다.

노아가 말 두 필을 준비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덕택이다.

* * *

비슷한 시각.

“샤를리즈는 무사히 도착했나?”

“예. 주군.”

“그래…….”

심해의 빛깔처럼 깊게 침잠한 눈이 고요했다.

“수고했어.”

기사는 신속하게 퇴장했다.

창문 너머를 응시하던 벽안이 어느 순간 문득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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