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09) (109/232)

109화

“헉…….”

“눈.”

“헛.”

“눈―.”

유원지처럼 조성해 가족 단위 입장객도 거부감 없이 휴일에 찾게끔 만든 곳이었다.

카지노는 성년이 지나야만 출입이 가능하다고 해서, 속으로 ‘왜!’하고 부르짖었는데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일말의 양심이었나 보군.’

바깥은 그나마 체면을 차린 거였다.

내부는 그야말로 휘황찬란하여, 황성의 연회홀보다도 화려한 듯싶었다.

실물 크기의 순금 사자 조각상. 사람인지 조각상인지 헷갈려 유심히 관찰하게 되는 정교한 대리석 조각은 예사 것이었다.

하물며 거대 분수도 있었다!

‘지독하다. 지독해.’

코끝에 풍기는 돈 냄새가 몹시 강렬했다.

딜러를 동원해 사기 쳐서 너네 돈 떼먹을 일 없다고 공언하듯 말이다.

적당한 위치에 도착한 나는 마치 뿌리 내린 나무처럼 단단히 섰다.

“리엔타 공녀 아닌가요?”

“공녀가 이곳에는 왜…….”

“혹시 대공 전하도 함께 계신 것 아니오?”

“들어올 때부터 봤는데 혼자였어요.”

‘……저는 에반스 경과 둘이 들어왔는데요.’

호위 기사에 대한 귀족들의 인식을 알 만하다.

도박하는 망나니가 된 김에 에반스 경이 기분 상했다면 따지러 가려고 슬쩍 눈알을 움직였다.

언제 자그마하게 감탄했냐는 듯 에반스 경은 프로페셔널 그 자체였다.

‘어어. 조금 다른데?’

무뚝뚝한 게 아니라 얼굴이 굳어진 거였다.

시선을 따라 옮기자 그 끝에 있는 것은 중년의 사내 넷이었다.

“이 사람들아. 이렇게 잘하면 나는 어떡하란 말이야.”

“그러니 우리가 간다고 할 때 빼지 말고 같이 오지 그랬나.”

껄껄대며 웃는 이들의 이름을 의외로 나는 기억했다.

페르난 백작 찾으려고 무식하게 명부 외울 때 얼떨결에 같이 외운 얼굴이었다.

‘나 생각보다 똑똑했네.’

아카데미 월반은 그냥 집념과 의지와 투지로 한 줄 알았는데.

좋은 머리 타고나 이렇게 살았다.

조금 씁쓸해져 있는데, 기다리고 있던 부름이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리엔타 공녀님.”

* * *

어느 인간의 소유도 아닌 광활한 숲.

쪼개진 햇살이 나뭇잎 틈새를 비집어 도착한 곳은 일견 평범한 동굴이었다.

그러나 그 안은 햇살의 부스러기 따위 필요 없을 만큼 반짝거렸다.

발로 아무렇게나 금화를 헤치며 걷던 소년이 허리를 숙였다.

두 동강 난 동그란 성물을 끼워 맞추려는 듯 맞대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소년이 황족도 아닌 인간과 수호 계약을 맺은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계약자의 의지로 현신할 때 그의 신성력은 소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에 더해 가끔 꼬마 황자를 만날 수 있는 정도로 만족했는데, 어쩐 일인지 말라붙은 샘에 물이 돌아오듯 신성력이 차올랐다.

황자의 안전을 확신하는 때마다 소년은 아주 오랫동안 돌보지 못한 그의 둥지를 잠깐씩 찾곤 했다.

그건 어떠한 예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결국 이렇게 발견하게 되었으니까.

“……걔는 돌아있다.”

소년이 몸을 오스스 떨었다.

[이 책의 저자를 알았습니다.]

[―책이라고 하지 말아라. 한 세계를 엿본 기록이다.]

[한 세계를 엿보고 기록을 남긴 인간을 알겠습니다.]

[―인간이라고 단언하지 말거라. 고작 인간 따위가 세계를 엿보는 게 가능하겠느냐.]

[지금 인간 앞에서 인간 욕하셨습니까?]

[―……그래서 기록을 남긴 사람이 무엇인데…….]

그 순간의 녹안은 실로 번뜩였다.

그건 분명 광기였다!

[독약 먹고 죽은 저를 제목으로 삼아 조롱한 놈입니다.]

[―뭐? 왜 갑자기? 아니, 그 이전에 어떻게 알았느냐?]

[때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누가 보면 내 손버릇이 나쁜 줄 알겠어. 알았다!]

[저는 이 세계를 책의 형태로 읽어본 적 있습니다. 아마도 저만 그런 듯한데, 그럼 우연이라기보다는 굳이 저라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외로 차분히 생각도 할……. 계속 말해 보아라.]

[저는 그 책에서 독약을 마시고 죽었는데, 그 독은 부수 작용으로 머리카락 색이 푸르게 변색됩니다. 그리고 제 별명은 ……백합이고요.]

[―……그래서 푸른 백합이 너다?]

[그리고 동일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몹쓸 놈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 동화책을 쓰고 있는데, 얘도 이상해요.]

[―무엇이 말이더냐.]

[제가 이상한 꿈, 아니, 소리를 들었는데, 그 장면을 동화책 쓴 놈도 알고 있더군요. 시간상으로 따져 보면 저보다도 더 일찍 알았습니다.]

[―혹시 아이가 좋아하는 그 동화책을 말하는 게냐? 그거라면 그 남자가 행방을 알고 있지 않겠느냐. 책까지 의뢰했다며.]

[많이 아시네요? 아무튼 저도 보좌관에게 슬쩍 물어봤는데, 칼릭스한테 거금 받고 이사했대요. 그럼 행방을 아는 게 아니라 찾는 게 되어 버립니다. 이 약삭빠른 못된 놈 같으니라고.]

여러 일이 바빠 잠시 대화 좀 안 했기로서니 갑자기 저렇게 되다니 도대체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만 안 둬…….]

뚜둑.

그때 들은 소리가 들려온 기분이라 소년이 어깨를 흠칫했다.

[어서 신성력 다 찾아요. 그때, 대가로 저번에 말했던 것 대신 저자 놈이 누군지 알려주십시오. 그놈은 그 전에 발견할 것 같고, 칼릭스나 노아에게 행방 수색해달라고 하기에는 끌어들이는 것 같아서 안 되겠어요.]

보통은 정체를 확실하게 알아내서 제대로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느냐고 묻자, 샤를리즈는 도리어 고개를 갸웃했다.

[피한다고 달라지는 것 없습니다. 그럼 기분이라도 풀어야죠.]

그는 이 세계를 엿보고, 기록하고, 그것을 타인에게 알릴 수도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건 장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터.

“제대로 미쳐 있구나.”

착잡하게 내쉰 한숨이 길게 궤적을 그리며 공간을 맴돌았다.

* * *

“공녀님. 카지노 가서 털었다며?”

루카스가 방문한다고 해서 사샤 옆에 나란히 앉아 기다렸는데, 루카스는 나를 보자마자 저런 말을 했다.

나는 흠칫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 소문 쫙 났어.”

“……소문 나라고 한 거야.”

“프로 도박꾼 될 일 있어?”

순진한 말이 사람 뼈를 때렸다.

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딱 두 번만 그랬어.”

“그랬겠지. 두 판만 했으니까.”

“……너 왜 이렇게 자세히 알아?”

“소문 쫙 났다니까?”

“루카스 너는 정보상의 길로 간다면 대성할 거야. 분명해…….”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 선황자님. 이게 어떤 이야기냐면요.”

동그란 눈을 얌전히 깜빡이고만 있던 사샤가 루카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랬다.

나는 너무 잘했다.

‘이렇게 잘하면 안 됐는데.’

나를 탈탈 털어먹고자 판에 끼워주는 일이 자칫하다간 없게 생겼다.

“오랜만에 재밌겠어. 다들 시시했거든.”

루카스가 꾹 쥔 주먹을 호기롭게 흔들었다.

꼭 슈크림 빵이 눈앞에서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기운이 쪽 빠져서 그런지 입맛은 안 돌았다.

“내가 공녀님보다 잘해.”

“저도 잘해요. 샤를 님!”

사샤도 주먹을 살랑살랑했다.

그렇게 순수하기 짝이 없는 카드놀이가 시작됐다.

“자. 이 카드 보여? 마지막에 이 조커 카드를 가진 사람이 지는 거야.”

“이것도 몰라? 여기 위에 숫자 보이지? 이 숫자가 같으면 버리는 거야. 이것도 끝까지 남아 있으면 지는 거.”

‘이김에 지는 연습을 해 봐야지.’

나도 눈을 부릅떴다.

불꽃 튀는 접전 끝에 십전팔승을 쟁취한 루카스는 어깨를 야무지게 펴고 저택을 나섰다.

“공녀님. 어디까지 따라올 생각이야? 아쉽겠지만 우리 집은 오늘 안 돼. 어머니랑 석찬 약속 있어.”

“루카스. 미안해.”

나는 헤레스 베론을 까먹었다는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말 안 하는 게 너한테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기만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더 생각해봤는데, 때릴래? 이것 봐. 가드도 없어.”

“으아악! 미쳤어?”

루카스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부랴부랴 내 드레스 자락을 내렸다.

“있잖아, 공녀님.”

“응.”

“진짜 친구 없구나?”

루카스가 안쓰럽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헤레스 베론을 잊은 건 나도 그랬어. 애초에 공녀님이 죄책감 느낄 일 아니야. 오히려 공녀님은 헤레스가 나쁜 사람이라는 걸 밝혀줬잖아.”

“루카스.”

“공녀님은 다른 건 다 아무렇지 않게 구는 주제에 왜 이상한 데서 땅을 파?”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루카스는 힐끔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안 해 줘도 친구고, 해 주면 감사한 거야. 신경 써주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랑은 인연 끊어야 하고, 고맙다는 말은 잊으면 안 되는 거야.”

루카스가 볼을 붉히며 툴툴거리듯 말했다.

“그러니까 고마워.”

* * *

비슷한 시각. 리엔타 공작저.

에반스는 무섭도록 굳어진 얼굴로 쉼 없이 검술을 연마했다.

“에반스 쟤 왜 저렇게 열심이야?”

“몰라……. 무서워…….”

“볏짚 인형이 벌써 다섯 개나 쪼개졌어!”

“허억. 대련 상대해달라고는 안 해?”

“몰라……. 살벌해…….”

“그냥 혼자 하는 것 같던데?”

“갑자기 왜 저러지?”

“몰……. 컥!”

“공녀님이랑 카지노 다녀왔다더니 거기서 무슨 일 있었나?”

걱정스럽게 에반스를 쳐다보는 눈들이 올망졸망했다.

그 시선을 온몸으로 받는 주인공은 정작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에반스. 내 아들. 오랜만에 보는구나. 리엔타는 휴가도 제대로 주지 않는 게냐?]

호위의 부친 된다며 나타난 어느 남작의 말에 샤를리즈는 에반스가 내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

부친이 갑작스레 다가온 이유가 있을 터.

할 수 없이 수락했으나, 거리를 멀지 않게 유지하며 샤를리즈를 주시했다.

[아주 주인을 따르는 개가 다 되었구나.]

[아버지를 닮았나 보죠.]

[이, 이, 크흠.]

부친이 애써 화를 억눌렀다. 에반스는 역시나 목적이 있음을 확신했다.

[공녀님의 방문을 노리고 있던 겁니까?]

[말을 뭐 그렇게 하느냐? 나는 그저 네가 공녀를 자주 호위하였으니 이번에 멀리서나마 내 아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을 뿐이다.]

뻔뻔하게 목소리를 높인 부친은 종내 에반스의 손에 종이를 쥐여 주었다.

[조용한 곳에서 혼자 읽어 보아라. 다 읽으면 불태우는 것 잊지 말고!]

그 종이는 불태워지지 않고 안주머니에 있다.

날 선 눈으로 엉망이 된 목표물을 확인한 에반스는 목검을 내려놓았다.

고민한 적은 없었다.

주군께 사실을 고하기 전, 감정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을 뿐이다.

“노아야. 너도 에반스가 왜 저러는지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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