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새삼스럽게도 머뭇머뭇 잡은 손은 현재 내가 더 애가 타 부여잡고 있다.
‘왜 안 보이지?’
이럴 수가.
‘이제 안 보이는 건가?!’
비탄의 도가니에 빠져 있다가 겨우 헤어나와 입을 움직였다.
“이젠 괜찮으세요?”
“응.”
매끄럽게 짓는 미소를 면밀히 확인하고 나는 속사포로 읊었다.
“미래는 어두워서 그런지 안 보였습니다. 아, 제 미래가 어둡다는 게 아니라 사위가 어두워 전하의 눈이 잘 안 보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날이 밝으면 집무실로 찾아갈게요. 좋은 꿈 꾸십시오!”
칼릭스가 말을 붙일까 봐 냅다 줄행랑쳤다.
침대에 도착해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안 보이면 안 되는데…….”
아직 그놈 정체를 확신하지 못했단 말이다.
필리엄 백작을 통해 얻은 정보로만은 그놈을 특정하기 어려웠다.
‘카지노. 카지노. 카지노.’
왜냐하면 다 저 단어로만 점철됐기 때문이다!
카지노 방문. 카지노에 필리엄 백작의 돈이 들어감. 카지노에 애착 가짐.
“허구한 날 드나 들거나 소유주이거나.”
카지노 주인은 높은 확률로 귀족이다.
돈이 많고, 안목이 뛰어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귀족들이 방문하도록 첫발을 끊게 한 게 핵심이었다.
‘귀족에게 뻗은 인맥이 있는 거야.’
귀족을 조력자로 둔 평민일 수도 있지만, 이 세계의 귀족은 호위 기사도 투명인간 취급하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저것도 염두에 두기는 해야지.’
그러면 생각나는 것이다.
이 몹쓸 책이 주인공 빼고는 대충 서술한 게 아닌지 처음으로 의심하게 만들었던 사람 말이다.
“리닉스.”
‘카타리나 황후는 여유롭지 않은데, 리닉스 공작은 도박으로 돈 펑펑 쓰고 있어. 그런데도 공작을 오래 살려뒀지. 리엔타의 시종을 카지노를 통해 꼬여내 나한테 타격을 주려고 했었고.’
카타리나 황후는 그저 부친이 망가지는 모습을 관람하며 적당히 이용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관여되어 있지 않다고 해도 말이 되니까, 리닉스가 카지노에 관여되어 있다고도 상정해 봤다.
‘유르겐 리닉스는 너무 멍청해서 제외.’
저번에 말싸움 한 번 했다고 뒤에서 이를 갈며 나를 흉본다고 한다.
‘흥.’
유르겐은 ‘일상생활에서는 멍청한 것 같은데 사업 수완은 이상하게 좋은 애’로 통한다.
실은 황후가 돈벌이에 직접 나서기 뭣하니까 유르겐을 앞세워 여러 일을 하는 것일 뿐인데 말이다.
걔나 나나 똑같이 가문 명성 까먹고 살았다.
‘아무튼 유르겐 빼봤자 황후인지 공작인지는 모르겠단 말이야…….’
만약 카지노 소유주가 리닉스가 맞다면, 노아를 통해 캐내기는 마음에 걸린다.
“충심 테스트하는 것도 아니고 이상해.”
에리히는 너무 덜떨어져서 안 될 것 같고.
공작은 기겁할 테고―.
꾸물꾸물 이불을 파고들었다.
‘고민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 체력이나 비축해야지.’
오늘도 또 카지노를 가야 한다.
이틀에 한 번꼴로 가려고 했는데, 칼릭스를 통해 더는 미래를 볼 수 없으니 부지런해질 필요성이 있었다.
‘지금까지 고마웠어.’
속으로 서글픈 인사를 건네며 나는 눈을 꾹 감았다.
* * *
“맞아.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왕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며 용이 말했다.
“이런 내가 소름 끼쳐도 어쩔 수 없어. 그러길래 그때 나를 구하지 말았어야지. 이제 와 후회해도 어쩌겠어.”
두서없이 중얼거리던 입술이 멈췄다.
키가 한참이나 작은 주제에 왕녀가 용을 끌어안았다. 용은 기꺼이 허리를 숙였다.
부족해. 용은 깊이, 더 깊이 파고들었다.
왕녀는 담담하게 받아주었다.
“다 내 선택이야. 그 몫도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지.”
“내가 네게 책임질 짐에 불과한가?”
“비슷하군.”
왕녀는 재밌다는 듯 작게 웃었다.
용은 미간을 구겼다.
“이왕 짐이 된 김에 내 다른 짐을 네 위에 올려 봐. 그럼 한 번에 옮기기 편해지겠어.”
“너.”
“장난이야.”
왕녀가 피식 웃었다.
그녀의 왕국은 오래전 멸망했는데, 그녀는 여전히 왕녀였다.
[유한한 시간을 사는 왕녀가 그녀처럼 유한한 시간이 주어진 존재와 일생을 살아가는 게 옳다는 생각, 들지 않았어?]
너는 강인해.
너는 마모되지 않아.
하지만 모든 일은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법이었고, 왕녀 역시 끝나지 않은 생의 끝에 결국 피폐해져 그를 증오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 증오 역시 하나도 남김없이 삼킬 자신이 있지만…….
“너를 위해서는 무엇도 아깝지 않아.”
그것이 설령 용언이라고 해도.
* * *
자기 전, 나는 정들었던 미래의 조각에게 혼자만의 인사를 했다.
……그랬는데 말입니다.
“어…….”
정열적으로 일하던 리반이 나를 슬쩍 돌아봤다.
저번 상점 지구에서 칼릭스가 겪은 일이 여러모로 충격이었던지 리반은 복도에서 자취를 감췄다.
휴식도 내팽개치고 일만 하던 리반이 시간을 쪼개 나를 볼 정도라니 얼마나 멍청한 얼굴일지 예상 갔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뭐야. 왜 보여.’
물론 보인다니 감사하다.
형체가 있다면 무릎걸음으로 그 주변을 뺑글뺑글 돌 만큼 기뻤다.
“샤를리즈?”
나는 흠칫하며 물러섰다.
재빨리 리반의 책상으로 달려가 종이를 달라고 손을 내밀자 리반이 종이 더미를 올려 주었다.
썩 멀리 가라는 의미로 재깍 알아들은 나는 벽에 종이를 대고 글씨를 썼다.
톡.
칼릭스가 종이 뭉치를 천천히 펼쳤다.
미래가 보였습니다. 이번에도 카지노에 가야 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