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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13) (113/232)

113화

“어떨 때는 손이 닿지 않고, 어떨 때는 닿았어. 호수에 함께 잠겨 들기도 했고, 혼자이기도 했지.”

하필 내가 복도를 얼쩡거릴 때 공교롭게 그가 악몽을 꾼 게 아니었다.

“드디어 호수를 탈출해서 이 꿈도 이제 마지막인가 생각했는데, 글쎄. 아닌 것 같아.”

“동일하게 시작되는 꿈이 전하의 선택으로 결과가 달라지곤 했던 건가요?”

“응.”

“혹시……. 꿈이 이어지고는 했습니까?”

“음.”

나는 의연하게 기다렸다.

“어렴풋한 느낌만 남아 있어. 처음 꿈을 꿨던 순간은 기억하고 있지만. 아니, 그 순간이 아닌가.”

칼릭스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역시 이상하네.’

특정한 선택을 해야 꿈이 끝난다니 수상하다.

‘호수.’

칼릭스가 언급한 그 호수가 신전의 호수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샤를 언급하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샤를리즈’가 빠진 또 다른 호수를 알고 있기 때문에 드는 억측인지도 몰랐다.

“다른 특이점은 없었습니까?”

“감각이 둔화되었는데, 꿈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어. 공녀가 불편해 보여서 치워 주고 싶었지만 머리카락을 잡을 수가 없더군.”

제 손을 내려다보던 눈이 느리게 감았다 뜨였다. 나른한 동작이었다.

‘칼릭스는 불면증이 심하다고 했었지.’

원작에도 나온 정보였다.

왜냐하면 긴 밤, 칼릭스가 이리안을 종종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잠이 온다니 다행이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벌써?”

“예. 벌써 열한 시 반입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 달라고 하면, 공녀가 곤란할까.”

안 된다고 휙 가 버리기에는 너무도 예쁜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 감기 걸려서 아팠을 때 병간호도 해 줬었고…….’

“맞다. 제가 3층 복도를 돌아다닌 이유는 말입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던 리반이 떠올라 저도 새로운 휴식의 세계를 느껴 보고 싶어서 기웃거렸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악몽을 꾸시는 것 같아서 들어왔을 뿐입니다.”

절대로 수상한 목적으로 돌아다닌 게 아니란 말입니다!

“마침 공녀를 만나서 좋았어.”

칼릭스가 언뜻 웃었다.

“무사히 있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아서.”

분명 담담한 목소리였는데, 마음에 걸렸다.

나는 조금 전 생각했던 대답을 말했다.

“곤란하지 않아요. 아직 졸리지도 않아서요.”

“의자가 있어야겠지?”

멀뚱멀뚱 서 있기는 머쓱해 괜히 침실을 둘러보는 척하다가 발견했다.

어쩐지 추웠어―라고 생각하기에는 옷을 많이 껴입어 까먹고 있었다.

“창문은 닫을까요?”

“음.”

순간 미묘한 얼굴을 한 칼릭스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첩이 망가진 걸 방치한 게 부끄러워서 그런가?’

어쩌다 보니 아버지 살리려고 성실하게 살게 되었을 뿐, 나는 게으르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한 인간군상인데 말이다.

자고로 창문을 딸 수 있는 사람은 닫을 수도 있는 법. 당당하게 확인한 경첩은 멀쩡했다.

‘……어라?’

어리둥절하게 창문을 닫고 나는 칼릭스가 가져와 준 의자에 앉았다.

“공녀가 좋아했던 책이 있는데, 오랜만에 볼래?”

“……제가요?”

혹시 칼릭스에게도 《이것만 읽으면 당신도 그 사람의 유일무이한 친구가 될 수 있다》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것만큼 자주 읽기는 했다.

그런데 그 이전에 내가 자주 읽은 거 모를 텐데?

‘아무튼 부족한 실전 경험을 보완할 겸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리고 나는 또 어리둥절해졌다.

“아카데미 교재야. 항상 곁에 끼고 있었잖아.”

“저는 교재가 아니라 전하를 좋아했던 겁니다.”

이런 걸 다 외울 정도로 정독했었다니. 사랑에 빠진 사람이란 위대했다.

사위가 지나치게 고요했다.

교재를 이곳저곳 구경하던 나는 슬쩍 시선을 들었다.

칼릭스가 조금 곤혹스럽게 웃었다.

“꼭 그 말이 듣고 싶어 얄팍한 수작을 부린 사람이 된 기분이야.”

“오해 안 합니다.”

“오해해도 돼, 샤를리즈. 사실 정말 없었는지는 모르겠거든.”

어딘지 눅진한 어감이었다.

내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위험 신호가 울려 댔다.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제가 좋아했던 책이 있다고 하셔서 사실 다른 책을 생각했어요.”

대뜸 급선회한 화제에 칼릭스는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무엇이었는데?”

“《이것만 읽으면 당신도 그 사람의 유일무이한 친구가 될 수 있다》입니다.”

“제목이 독특하군.”

“그래도 내용은 괜찮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데 빌려드릴까요?”

“열심히 읽을게.”

“응원하겠습니다.”

“고마워, 샤를리즈.”

말투가 자꾸 간지러운 걸 보아하니 저번에 이상한 가루 사건 당시가 떠올랐다.

‘졸린 건 맞는 것 같은데.’

사람은 원래 졸리면 이성의 일부를 잃기 마련이지.

“샤를리즈.”

“주무세요.”

“내가 얼른 잤으면 좋겠어?”

“예.”

“단호해.”

칼릭스가 조금만 더 깨어 있다면, ‘해가 확실하게 지고 난 후에는 미래의 조각이 보이지 않는다’는 가설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특정 시간에만 보이는 건 확정이고, 미래의 조각을 본 건 아침, 낮, 노을이 지기 전 무렵 때뿐이었어. 저 시간대만 가능한지도 몰라.’

그럼에도 칼릭스가 어서 잠을 청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어서 흐려지거라.’

이대로 잠에서 완전히 깬다면 꿈이 무엇이었는지 또렷이 기억하게 되지만 다시 잠이 들면 뭐였는지도 가물가물하게 흐릿해진다.

그런 얼굴을 하게 만드는 기억이라면, 어서 잊었으면 했다.

“공녀가 그러기를 원한다니 따를게.”

칼릭스가 눈꺼풀을 내리 닫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잘생긴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니 얼굴이란 참으로 신비하다.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데, 그가 문득 웃었다. 여전히 눈은 착실하게 감은 채였다.

“시선이 너무 느껴져…….”

“동화책 읽어드릴까요?”

“동화책이라면 아기 용사님과 씩씩한 왕녀님을 말하는 건가?”

“예. 외우고 있습니다.”

나는 눈을 번뜩였다.

혹시 사샤에게 무언가를 세뇌시키기 위해 강조하거나 반복하는 문장이 있는 건 아닌지 샅샅이 훑다 보니 자연히 외우게 됐다.

‘용사왕녀님보다 더 재밌고 흥미로워서 사샤의 마음에 쏙 드는 동화책, 기필코 발굴해내고 만다.’

지금 당장은 내가 더 철저해지면 됐다.

머리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입은 동화책의 내용을 술술 외웠다.

“대단해, 샤를리즈.”

“아직도 깨어 계시다니 2권 시작하겠습니다.”

다행히 목이 쉬지는 않았다.

나는 수면을 취할 때 오히려 냉랭한 표정의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칼릭스가 꾸는 꿈과 내가 꾸는 꿈이 비슷한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원작의 여자 주인공인 이리안에게도 이상한 꿈이 찾아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사실은, 그때 칼릭스가 나를 찾아온 정원에서 묻고 싶었다.

호수에 빠진 나를 왜 구했냐고.

왜 울었느냐고.

왜…….

마치 나를 사랑하는 것 같이 굴었느냐고.

* * *

에반스는 등을 뻣뻣하게 세웠다.

맞은편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아가씨의 얼굴은 무상했지만, 조금의 안정도 주지 못했다.

‘왜, 왜 동석하라고 하신 거지?’

여느 때처럼 카지노를 향하는 길이었다.

불온한 행선지 앞에 저런 말을 가져다 붙이게 되기는 하였으나, 샤를리즈가 정녕 도박에 재미를 붙인 것이 아니라는 건 에반스도 알았다.

당사자가 직접 언급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저 지긋지긋하다는 눈빛 때문이 컸다.

“경은 예전부터 나를 호위했잖아.”

“예. 그랬습니다.”

“그때 나는 어땠어?”

“예?”

뜻밖의 질문에 의아한 것도 잠시. 에반스는 곧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가씨께서는…… 아가씨보다 열심히 사시는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대공 전하를 열렬히 쫓아다니기는 했지.”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시네.’

아카데미는 선배, 동기, 후배만 존재할 뿐이라며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 불문율이라고 한다. 그래봤자 이름 뒤에 ‘―님’을 붙이지만 말이다.

당장 샤를리즈만 해도 누가 그녀의 이름만 부른다면 손끝에 힘을 꽉 준다고 유명했다!

정작 샤를리즈는 누구든 평등하게 이름만 불렀고, 그 대상에는 당연하게도 대공이 있었다.

꿋꿋하게 칼릭스라고 부르는 샤를리즈 만큼 대공 역시 샤를리즈를 공녀라고만 칭했다.

그 때문에 한번은 샤를리즈가 파문해달라고 하여 공작이 눈이 퉁퉁 부은 채 시름시름 앓았던 적도 있었다…….

“왜 그랬을까.”

샤를리즈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 말에는 내심 에반스도 동의했다.

샤를리즈가 그야말로 대뜸 대공의 근처를 맴돌기 전까지 그들은 아무런 접점이 없던 관계였기 때문이다.

무엇이 아가씨가 긴 시간 대공에게만 몰입하도록 만들었을까.

“에반스 경.”

“예. 아가씨.”

아가씨께서 향수에 젖으신 듯해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보던 순간. 돌아온 질문은 예상 범위 외의 것이었다.

“경의 부친이 건넨 쪽지의 내용은 내겐 알려주지 않을 생각인가?”

에반스의 눈이 요동쳤다.

“아버지에게도 알려주고 나한테는 비밀이라니. 우리가 함께 쌓은 시간은 결코 적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둘의 시선이 뜨겁고 진득했어.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들 특유의 눈빛이지.”

당혹스러움이 기준치를 뚫고 치솟자, 에반스는 오히려 침착해질 수 있었다.

“……부디 표현에 유의해 주십시오, 아가씨.”

“말해줘.”

“공녀님께서 카지노를 출입하실 때 본인에게 연락을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연락은 어떻게 하라고 언급되어 있었나?”

“적혀 있진 않았습니다만, 이런 경우 대개 직원들에게 미리 말을 해 두기 마련이라 직원에게 전하면 됐을 겁니다.”

“아버지는 뭐라셨지?”

“공작 각하께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으셨습니다. 당연히 연락은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좋았어.”

샤를리즈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앞으로는 연락을 취해 줘.”

“아가씨.”

에반스는 마른 입술을 적시고 애써 말문을 열었다.

“위험한 상황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뭐가 문제지? 그때도 경이 내 옆에 있을 테잖아.”

샤를리즈가 고개를 기울였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태연한 목소리에 에반스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고 말았다.

“예. 그렇습니다.”

잠시의 침묵 뒤, 단호한 말투가 이어졌다.

“저는 언제나 아가씨를 지킬 겁니다.”

* * *

어제 새벽, 나는 간만에 신수를 만났다.

카지노도 다녀오고, 공작과도 시간을 보내고, 사샤랑도 꽁냥거리고, 칼릭스도 만난 이후라서 신수를 슬그머니 못 본 척했다가 또 광속 꼬리 회초리로 등짝을 맞았다.

[신수님. 신수님은 언제 신성력이 회복되나요……. 멀진 않았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건 왜 묻는 게냐.]

[신성력이랑 흑마법은 반대니까 흑마법을 무효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 신성력이 다 돌아오면 제게도 살짝 말해주시면…….]

[―이 몸은 사사로운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사샤가 도마뱀 인형을 보고 실제 도마뱀도 이렇게 생겼냐며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네가 말하는 그 시기는 나도 모르겠구나.]

[그럼 위대한 신수님의 신성력에는 한참이나 모자라 아무리 발전해도 발끝도 따라가지 못할 테지만, 제 신성력은 강해질 수 없습니까?]

[―신성력은 타고나는 것.]

신수가 신성력을 완전히 회복해야만 그다음의 굵직한 에피소드가 제대로 펼쳐진다.

원작의 흐름을 깽판 쳐서 그놈을 자극시켜 미래의 조각을 통해 쓸 만한 정보를 얻어내기는 당장 한계가 있었다.

결국, 나는 무식한 방법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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