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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14) (114/232)

114화

‘특실 출입하는 놈들, 정체 다 파악한다.’

여자와 수염이 길게 난 인간은 제외할 수 있다는 게 아주아주 자그만 위안이 됐다.

인생은 편안한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즐기기만도 짧은데, 찌들어 있는 인간들 만나려고 무한 반복 외출할 미래를 생각하니 눈물만 났다.

‘사샤랑 티 타임 가진 지 엄청 오래됐어.’

리반과 집사만 행복해졌다.

그러니 남작의 수작을 반길 수밖에 없던 것이다.

“좋았어.”

털기 쉬운 주머니가 되겠다는 1안은 버린다.

‘다 제패해 버려서 사람들의 호승심을 자극시켜 여럿을 접한다는 2안에 돌입하겠다.’

아무리 그래도 에반스의 부친이다 보니 첫 타자로 두기는 미안했는데, 에반스 얼굴 보니 그래도 될 것 같다.

‘목소리 엄청 컸으니까 시선 집중될 거야.’

나는 음흉하게 웃었다.

‘두 번째는 내 돈주머니 노리던 놈들이다.’

그리고 금세 지쳐버려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귀족 명부를 뒤지다 보니 잠은 늦게 겨우 잘 수 있었다.

‘저번에 만난 사람들 중 하필 금발이 있어서.’

귀족 중 금발이 매우 흔한 탓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반가면을 착용했던지라 나이가 얼추 유추된 덕택에 그나마 새벽에라도 끝낼 수 있었다.

‘아드리안 세냑.’

기어코 알아낸 이름은 어딘지 익숙했다.

‘원작 아니면 이전 생을 떠올리기 전에 만난 사람일 텐데.’

만약 후자라면, 칼릭스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공평히 관심 없던 그 시절의 내가 익숙하게 여길 정도이니 몹시 독하게 얽힌 인연임이 틀림없다.

끙끙거리던 때, 에반스가 몹시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하온데 대공 전하와 관련한 사항은 어째서 물어보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공작이 시켰나 보다.’

왜냐하면 에반스는 전혀 궁금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냥 그랬다고 얼버무리기에는 공작에게 미안했다.

“경도 알겠지만 내가 많이 바뀌었잖아.”

“예? 예에…….”

“과거를 돌아볼 여유도 생겼고, 그래서야. 그냥 그 시절의 내가 궁금했어.”

분리해서 생각하게 되곤 하지만, 칼릭스를 사랑한 샤를리즈 역시 바로 나였다.

이전 생 하나 뚝딱 기억났다고 해서, 사랑에 빠졌던 계기를 직면했을 때 다시 흔들리지 않을 자신 없다.

‘대비를 철저히 해야겠어.’

어제는 정말로 유달리 위험했다.

‘로제타가 말한 두 번째 제안을 해 볼 시기가 왔나 봐.’

첫 번째―고백하라!―는 듣는 척 호응만 하고 다시 생각도 안 해 봤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척하세요. 그럼 설마 본인을 사랑한다는 생각, 못 하시지 않을까요?]

[나도 몇 번 해 본 생각인데 아주 큰 문제가 있어.]

[뭔데요.]

[아주 심각한 문제야.]

[무엇인데요?]

[대공 전하보다 잘생긴 사람이 없어.]

[……진짜로 사랑에 빠질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예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척 연기할 자신이 없다는 게 문제야.]

[그냥 옆에 계속 끼고만 다니셔도 될걸요. 애초에 표정 변화가 뚜렷하지도 않으시고, 대공 전하를 쫓아, 아, 죄송. 사랑하실 때도 달콤한 눈 같은 거 하신 적 없으니까요.]

[……로제타, 위대해!]

원작에서 샤를리즈가 칼릭스를 바라볼 때의 묘사는 대체로 이러했다.

‘집요한 시선’, ‘무거워 흔들리지 않는 눈’, ‘집착 어린’. 그와 비슷한 유의 반복.

지겹도록 되풀이되는 묘사들이 저래서 나도 모르는 새 머리에 콱 박혀 있었나 보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내 얼굴이 어땠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도 못 해 봤다!

‘비슷하게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연기는 자신 없어서 얼굴이라도 갖춰 놓으려고 했더니만.’

한숨 쉰 세월이 무색하게도 해결됐다.

‘한 서너 명 반복하면 되겠지?’

한번 길게 사랑해 봐서 그런지 짧아진 것 같다고 슥 말하면 될 것 같다.

‘헤어진 후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친구 사이를 유지한다고도!’

이왕이면 그 서넛의 외모 특징이 비슷하면 더 좋을 것 같다. 물론 그 특징은 칼릭스에게 없는 것이어야 한다.

칼릭스가 내 취향의 예외처럼 보이도록 말이다.

‘……실제로도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튼 나는 화르르 열의를 불태웠다.

* * *

[공녀님. 카지노 가서 털었다며?]

루카스의 깜찍한 목소리가 저 멀리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듯했다. 이제 나는 저 말에 떳떳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됐다.

‘맞아. 나 남들 주머니 제대로 털었어!’

특히 나쁜 손버릇을 가진 두 놈은 한동안은 판에 낄 생각조차 못 하도록 탈탈 털어먹었다.

‘이 돈은 어디 다른 데 보내야지.’

돈을 벌었다고 하면 카지노에 이렇게 흥미를 붙이게 될까 봐 공작이 오들오들 걱정할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어디로 보낼지 생각하며 걷던 때였다.

‘보라색 가면이다.’

금색 머리카락이 눈에 익었다. 귀족 명부를 죽어라 본 고달픈 기억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때그때 누군지 바로 알면 더 좋으니까.’

얼굴 특징만 기억해 대충 때려 맞출 수가 없다 보니 품이 많이 들어갔다.

아드리안은 건물을 향하고 있었고, 나는 정문을 향하고 있어 자연히 서로를 지나쳐 가게 되었다.

그 순간, 깨달음은 마치 직감처럼 뇌리를 스쳤다.

‘……아.’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 해도 접근 방식을 안다면 해결할 수 있다. 방향을 조금 바꾸니 그제야 아드리안이 기억났다.

이름이 익숙하다고 생각해 언제 만났는지 떠올리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기억에 남은 건 외모였는데.’

아드리안의 지나친 선의가, 더는 의아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유념할 건 꽃잎 끝이 갈색으로 시든 튜베롯을 목표물의 근처에 두시면 안 됩니다.]

나는 입매를 굳혔다.

“에반스 경. 이리안에게 가기 전에 잠시 들를 데가 생겼어.”

“예. 알겠습니다. 마부에게 어디라고 전하면 될까요?”

“필리엄 백작저.”

“……예?”

* * *

사각사각.

열심히 움직이던 연필이 뚝 멈췄다.

엔젤은 미간을 꼭 모은 채 입술을 앙다물었다.

[엔젤. 혹시 바닷가가 보이는 도시에 살았던 적이 있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아니라고 답하자, 샤를리즈는 ‘그렇군.’하고는 소파에 털썩 누웠다.

분명 나태하기 짝이 없는 행동인데도 느긋하게만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모처럼 한가해 보이는 샤를리즈와 이런 말까지 하게 됐다.

[시험 못 봐도 돼. 내가 돈으로 들여보내 줄게.]

[입학하고서도 계속 낙제하면요?]

[계속 다니면 되고, 애초에 너는 낙제 걱정 없을 것 같은데. 늘 열심이잖아.]

‘……열심.’

과연 엔젤은 매사 열심이었다.

무릎에 멍이 들도록 열심히 번 돈을 헛간 같은 곳을 제공해 준답시고 수금해가는 건달들에게 모조리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할당량 이상을 벌고자 노력했고, 로단테와 어서 만나고자 보육원 선생들의 눈을 피해 돈을 벌었다.

그러나 그건 제 성정이 유독 부지런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엔젤은 알았다.

그저 절박했기 때문이다.

[엔젤!]

믿을 수 없다는 듯 점차 커진 동그란 눈과 반가움이 담긴 목소리. 완연한 도련님이 된 지금도 여전히 순하고 착한, 엔젤 혼자만의 동생을 그때 끝까지 외면했을 만큼.

[잠깐만.]

샤를리즈는 그때 손등에 턱을 괴고 엔젤을 가까이에서 바라봤다.

[차석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하겠다는 포부는 좋아. 그런데 그러려는 이유로 왜 사샤를 뒷받침하고자 하기 위함이라고 했니?]

[그야…….]

공녀님이 제게 정이 떨어져 버릴까 봐 그 순간에는 겁이 나 하지 못했던 말이 비겁하게 입 안을 맴돌았다.

‘벨은, 아니, 선황자님은 제가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도 늘 저를 따랐는데. 저는 끝까지 정말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어요.’

[네가 하고 싶은 길을 선택해. 사샤도 그쪽을 더 좋아할 거야.]

사각사각. 엔젤은 다시 연필을 움직였다.

[그리고 애초에 너는 어렸고, 아직도 너무 어려. 한 가지 길을 벌써 택하지 않아도 돼.]

‘……조금 더 살갑게 말할걸.’

[다음에는 사샤도 데려올게. 같이 또 놀자.]

[공녀님은 노는 생각만 해요?]

어쩐지 부끄러워져 자꾸 틱틱댔다.

기억은 마치 난데없이 튀어나온 돌부리 같아서, 그것에 걸린 사람처럼 순간 멈칫한 엔젤은 연필을 더 빨리 움직였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자체로 감사한 일이다. 수업료는 스스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샤를리즈가 그들 남매에게 들어가는 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을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더.

엔젤은 정말로 더는 나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 * *

나른한 오후.

리반은 한껏 센티해져 있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 거지…….’

영락없이 일곱 살이라고 예상한 소년 대공이 실은 열한 살이라는 충격이 컸던 탓일까.

그는 엘루이든 대공이 어른들의 사정 속에서 상처 입은 소년처럼 느껴질 때가 아직도 종종 있었다.

그래야만 요 며칠의 나날이 납득됐다!

‘따지고 보면 공녀님과 노닥거리러 가신 길에 당한 급습이었는데, 왜 일을 열심히 하자로 생각이 흐른 걸까.’

게슴츠레하게 좁힌 시야 언저리에, 칼릭스의 손에 들린 책이 불현듯 걸렸다.

‘이것만, 당신도, 유일무이.’

굉장히 알쏭달쏭한 제목의 책을 언제부터 읽기 시작했는지 남은 페이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무엇을 탐독하고 계신 거지?’

의아해하고 있던 때였다.

묘한 얼굴로 칼릭스가 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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