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15) (115/232)

115화

“리반.”

“예? 예!”

설마 일을 아주 잠깐 제대로 안 한 것 때문에 당한 호출이라면 리반은 아랫입술을 질끈 물고 당장 사샤에게 달려갈 생각이었다.

“한번 읽어 보겠어?”

“……예?”

자리에서 스멀스멀 일어난 리반이 미간을 좁혔다.

“어쩐지 제목이 요상하다 싶더라니 불온한 사상의 책이었습니까?!”

그렇다면 칼릭스는 일하고 있던 게 맞았다. 혼자 딴생각하며 놀고 있던 게 찔려 리반은 지레 목소리를 높였다.

“읽어 보겠습니다!”

“그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라고 했어, 리반.”

책을 여전히 쥔 채로 칼릭스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리반은 고개만 쭉 빼 내용을 읽어갔다.

“이건…….”

충격받아 떨리는 눈이 우측을 향했다.

“이래서 사람은 너무 열심히 일하고 살면 안 됩니다. 자칫했다간 책으로 알 수 없는 것도 책으로 알고자 하는 그릇된 생각이 싹트니까요.”

은근슬쩍 바람을 섞기는 했으나 진심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거 완전 ‘책으로 연애를 공부해요’잖습니까!’

책을 덮으며 칼릭스가 중얼거렸다.

“너무 그렇게 말하지는 마.”

“어째서 말입니까?”

“누군가의 애독서야.”

“…….”

숙연해져 떨군 시선 끝에 이제야 제목이 보였다. 《이것만 읽으면 당신도 그 사람의 유일무이한 친구가 될 수 있다》

“그 사람은 이 책이 교우 관계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던데, 이 친구가 그 친구는 아닌 것 같아서.”

“공녀…….”

“리반.”

“……언급할 수 없는 그분은 제목의 친구를 정녕 그 친구로 이해하신 걸까요?”

“글쎄.”

칼릭스는 시선을 유독 길게 잡아끌었던 문장을 되뇌며 묘하게 웃었다.

* * *

“……공녀가 찾아왔다고?”

“예. 언질 없이 갑작스레 방문해 죄송하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방문은 갑작스럽고도 직접적이었다. 필리엄 백작은 최악의 수를 상정했다.

‘혹 해독제에 문제가 생겨 계약을 깨고자 함인가?’

샤를리즈는 해독제를 주지 않았다.

그들의 거래 특성상, 그건 비정한 선택이 아니라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리아가 깨어난다면 즉각 그분에게 소식이 전달될 터. 해독제를 조건으로 공녀와 작당한 것 또한 당연히 눈치챌 테니 그는 금세 제거될 것이다.

그리되면 공녀는 필리엄 백작을 통해서는 그녀가 원하는 바를 영영 알 수 없게 된다.

백작은 서둘러 응접실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눈썹을 한 번 까딱인 샤를리즈가 자리에 다시 앉았다.

모든 감정은 지독한 세월 앞에 모두 깎여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희망을 엿본 이후이기 때문인가. 백작은 별수 없이 초조해졌다.

“해독제에 대해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해독제라니.”

뜻밖의 제안에 기뻐하기에는 진척된 일이 없었다.

“심경이 갑자기 변화한 이유가 있나?”

“저는 백작을 통하여 놈의 정보를 수집해 범위를 좁혀나갈 계획이었습니다.”

“한데.”

“예상보다 아주 빨라요.”

두루뭉술한 답변이었다. 백작은 여전히 경계하는 눈으로 침묵했다.

그러든 말든 알 바 아니라는 듯 샤를리즈가 입술을 열었다.

“사흘 내로 전달 드리겠습니다.”

“고작 사흘로…….”

백작이 뜨거운 불덩이를 닮은 말을 겨우 삼켰다.

“가능하단 말인가.”

주먹 쥔 손이 거센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떨렸다.

드러난 동요에 열없는 시선이 닿았으나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샤를리즈는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손녀가 깨어나면 가장 먼저 ‘그분’을 찾아가세요. 그리고 샤를리즈 리엔타가 물약을 주었지만 믿음이 가지 않아 방치해 두었다고 하십시오. 그것을 사용인이 손녀에게 먹였는데, 손녀가 깨어났다고 하시고요. 그 사용인은 놈의 세작 중에서 대강 고르면 되겠군요. 제가 물약을 전달했다는 말은 세작에게 슬쩍 흘리셔야 할 겁니다.”

“공녀.”

백작이 무겁게 말했다.

모르는 척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은 이유는 시답잖은 양심 따위가 아니었다.

양심 같은 감정은 손녀가 아들에 이어 의식을 잃었을 때 모두 버렸다.

그저 아리아를 위해서였다.

본인을 의식 저 너머에서 잡아 끌어준 사람에게 감사 인사조차 못 해 마음 한편에 무거움을 안고 살까 봐 걱정됐다.

“솔직히 말하겠네. 나는 한시가 급해. 하지만 서두르면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일을 그르치게 되기 마련이지.”

“제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공녀의 현재 선택을 가장 좋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기껏해야 낙관적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그 순간 백작은 깨달았다.

고요하다고 생각한 녹안은 실은 조금도 잔잔하지 않았다.

샤를리즈가 문득 웃었다.

“저보다는 본인을 더 걱정하셔야 할 텐데요. 기껏 깨어난 손녀와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도 못하고 이별하기는 아쉽잖아요.”

잠시 침묵한 필리엄 백작은 본론으로 돌아갔다.

“공녀의 제안에는 허점이 있어. 그분은 본인의 끄나풀이 아리아에게 어째서 해독약을 먹였을지 의아해하지 않겠는가?”

“백작께선 손녀의 상태가 이대로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으세요?”

“그건…….”

“없었겠죠. 왜냐하면 상태가 들쑥날쑥했을 테니까요. 그래서 더 절박해진 것 아닙니까.”

샤를리즈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약점은 손에 쥐고만 있을 때보다 적절히 쥐락펴락할 때 더 효용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아리아가 깨어난다면 신전에 기부금을 크게 기탁하겠네. 분명 소문이 일파만파 번질 테지. 그것으로 알리겠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샤를리즈가 저택을 나서고도, 필리엄 백작은 의자에 우두커니 앉은 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 * *

아드리안 세냑.

한미한 가문의 사생아이자 모친의 안전을 빌미로 협박당해 심부름꾼으로 일하는 남자였다.

눈에 띄는 보라색 눈동자 때문에 아드리안은 자신의 정체가 언제고 들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죽음과 맞닿은 삶을 사는 대부분 인간과 다른 부류였다.

막장으로 사는 게 아니라, 저가 전한 물건으로 고통받게 될 사람에게 대가로 도움을 하나 줬다.

‘아드리안도 죽고 난 후 구천을 떠돌까 봐 걱정돼서 그런가?’

나도 한때 그런 걱정을 한 적이 있었지.

아무튼 아드리안이 탈탈 털어 먹힐 뻔한 나를 구해 준 것은 곧 내게 독을 조달할 예정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판매할 목적이라면 두 번씩이나 친절하게 굴 이유가 없을 테니 음독의 가능성이 높았다.

‘벌써…… 몇 번째더라.’

손가락으로 곰곰이 헤아려보아야 할 만큼 목숨의 위협을 받아서 그런가. 꽤 의연해졌다.

“아가씨? 쿵 소리가 났는데 괜찮으십니까?”

“으응. 잠시 미끄러졌어.”

주섬주섬 의자에 다시 올라탔다.

‘아드리안 쪽을 공략해보자.’

아드리안은 튜베롯 독약의 해독법을 알고 있다. 아주 말단은 아닐 거였다.

누구에게 명을 받는지, 그 누구는 또 누구에게 받을지, 그 누구는 어디에 살지.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기어코 그놈에게 닿을 것이다.

그리고 그놈은…….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마차는 잘 내렸는데,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이리안에게 풀썩 안기고 말았다.

그녀에게서는 물감 냄새가 났다.

‘이리안, 행복하구나.’

“공녀님?”

“……꿈에 이리안이 나와서 문득 보고 싶어져서.”

“저도요.”

“그대 꿈에도 내가 나왔나?”

“그건 아니지만요.”

이리안이 배시시 웃었다.

“저도 공녀님이 보고 싶었어요.”

세계관 최강 다정 미소를 보며 나는 가슴 어귀를 부여잡았다.

“위험했다.”

“네?”

“아니야.”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에반스 경에게 눈짓했다. 에반스 경은 어딘지 초연한 얼굴로 부채를 꺼냈다.

“이리안. 추울 수도 있으니까 이거 입도록 해.”

내 목도리를 이리안의 코 밑까지 꽁꽁 싸매고, 내 겉옷도 입혔다.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이리안은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주었다.

“준비.”

“……하고 있었습니다.”

“시작.”

“하겠습니다…….”

이윽고 나는 난데없는 바람을 맞으면서도 재미있다는 듯 반짝이며 웃는 다갈색 눈동자와 봉긋 솟은 뺨을 목격했다.

초장부터 원작을 박살 낸 터라 혹시 칼릭스 단독 주인공으로 원작이 변경되었나 했는데, 이리안 역시 주인공이었다!

‘그럼 이리안에게도 무언가 있으려나?’

힐끔 이리안을 훔쳐봤다.

“재미있었어요.”

“뭐가?”

내 머리카락은 마구 흐트러질 게 뻔하므로 미리 묶고 와서 그냥 고개 한 번 털면 됐다.

대신 다갈색 머리카락을 슥슥 매만져 정돈해 주었는데, 얼마 안 돼 허겁지겁 손을 멈췄다. 꼭 세팅한 것처럼 예쁘게 흐트러져 있었던 머리가 내 손을 댈수록 이상해져 갔다…….

“드, 들어가자.”

“추우시죠? 얼른 들어가요.”

걱정스럽게 이끄는 손을 면구스럽게 따라갔다.

“이클리스 백작 영애가 읽는 소설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는데요. 남자 주인공이 왜 여자 주인공에게 반했는지 알 것 같았달까요.”

이리안이 싱긋 웃었다.

“남자 주인공은 추위를 안 타서 얇게 입고 다니는데 여자 주인공은 그게 마음에 걸려 겉옷을 챙겨요. 그게 귀찮기만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나는 설마 내가 여자 주인공이냐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켜 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리안은 웃었다.

“어……. 고마워.”

쭈뼛쭈뼛 인사하자 이리안이 “무얼요.”하며 웃었다.

‘이렇게도 주인공이 되어 보네.‘

묘한 감회는 금세 털어 버리고, 이리안의 작품을 구경하며 노닥거리다가 대공저로 향하는 마차에 꾸물꾸물 올라탔다.

‘이리안은 그런 꿈, 전혀 안 꾸고 있었어.’

칼릭스만 겪고 있는 것이 이상하기도 했고, 이상하지 않기도 했다.

둘은 이 세계의 주인공이지만, 나는 이리안을 통해서는 볼 수 없는 것을 칼릭스를 통해 보고 있다.

‘로단테를 통해서는 또 안 보였지.’

아쉽지만 주기가 엄청나게 길어졌나 보다.

하마터면 극성 후원자가 되어 아카데미에 주기적으로 출석할 뻔했는데, 그럴 일은 없을 듯했다.

나는 창문에 이마를 대고 이리안 집에 도착하느라 끊긴 생각을 이어갔다.

‘그놈이 황위 교체를 바라지 않기는 하지만…….’

현재 사샤는 고작해야 일곱 살. 너무 어려 칼릭스가 황제에게 반기를 들기에는 정당성이 부족하다.

‘황제는 엄청 잠잠해.’

잠잠한 척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후사가 생겨 선황제의 적통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며 본인에게 주지시키듯 일부러 확인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놈은 공작을 애초에 직접적으로 노린 게 아니기도 했어.’

걔가 함정을 판 사람은 나다. 궁극적으로는 리엔타 공작 제거가 목적일지라도 일단은 나였다.

그래서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목표물이 나라는 것 자체는 전혀 의아하지 않았었다.

놈에게는 황권 유지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으니까.

리엔타 공작은 중립을 표방하고 있다고는 하나 사람인 이상 언제고 변할 수 있다. 그 누구의 손에도 쥐여주지 않은 리엔타의 권세가 신경 쓰였겠다고 생각했다.

‘황위를 유지하려는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그래야 그놈의 현재가 유지되거나 발전하기 때문일 거다.

황위 유지 자체가 목적은 아닐 것이었다.

‘놈은 현재 생활을 영위하고자 수하들의 입을 흑마법으로 꽁꽁 틀어막는 놈이야.’

생활은 주변 환경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도망자 신세가 되어 스스로를 은닉해야 한다면 유지할 수 없는 환경.’

알 듯 말 듯 어렴풋했다.

나는 인상을 빡 쓰고 생각한 것을 기억해 두며 쿠션에 널브러졌다.

원작에서는 지금으로부터 일 년 가까이 후에나 ‘샤를리즈’가 아드리안을 매개로 튜베롯 독약을 접하게 된다.

원작의 다른 커다란 흐름은 비슷하게 흘러가는데, 이것만 기이하리만치 빨랐다.

‘내일 아드리안을 만나야겠군.’

안락한 남은 생을 위해 결단을 내리곤 마차에서 내렸다.

머리로는 혹독한 일정을 이해해도 마음은 도무지 그럴 수 없던 터라, 절로 터덜터덜 힘없이 걷고 있던 중이었다.

“공녀님.”

그만 그 자리에서 깡충 뛰어오르고 말았다…….

“무슨 나쁜 일 하다 오셨습니까? 왜 이렇게 놀라세요? ……잠시만요. 그 눈 뭡니까.”

리반이 뒷걸음질 쳤다.

특정 시간대의 특정 기억을 지울 수는 없을지 맹렬히 이어가던 고민을 아쉽게 접고 나는 물었다.

“어쩐 일이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