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그건 제가 여쭙고 싶습니다.”
리반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3층 복도였다.
‘만난 김에 물어보려고 했던 거 물어봐야겠다.’
나는 몸에 밴 몹쓸 버릇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혹시 제이 경은 어디 있는지 알아?”
“내일까지는 귀가하지 않을 겁니다. 사람 하나 찾으러 가서 말입니다.”
“그렇군.”
나는 아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람인지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응.”
심드렁히 답하자 리반이 탁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불쑥 물었다.
“그나저나 아까는 정말 어떤 생각을 하셨던 겁니까?”
“그대가…….”
“예. 말씀하십시오.”
“털이 복슬복슬한 소동물 같다고 생각했어.”
재차 묻기까지 하다니.
누가 너구리 아니랄까 봐 직감이 대단했다!
“……예?”
당황하던 리반의 눈빛이 한층 혼탁해졌다.
“그……, 예에.”
“…….”
“공녀님께서는 리엔타의 후계자셔서 다행입니다. 남은 인생도 평탄히 보내시겠지요.”
때아닌 덕담을 남기고 리반은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그 뒷모습을 힐끔 쳐다봤다.
‘눈이 좀 이상했는데.’
“아!”
‘훈련 끝났겠다.’
슬슬 해가 저무는 것을 보니 기사단 훈련이 끝났을 것이다.
쓸모없는 의문은 내던지고, 노아에게 어서 통신하고자 계단을 후다닥 내려갔다.
그리고 저녁 식사 시간.
나는 리반을 또 만나게 된다.
* * *
이튿날 아침.
리반은 거울을 보며 크라바트를 단정하게 고쳐 매는 주군을 슬쩍 보았다.
‘한 번만 고쳐매도 주름이 남는 소재를 찾아내 의상실에 달려갈 생각도 했었는데…….’
그때도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주군의 얼굴이었다. 꼴사납다기보다는 준비성이 철저하다로 자연히 흘러갈 수밖에 없는 얼굴 말이다.
‘그러고 보니.’
리반은 동물적인 감각에 가깝게 시간을 확인했다. 아홉 시 십일분. 정확히 1분 전 들렸어야 할 노크 소리가 아직이었다.
노크 소리는 그로부터 4분 뒤에야 울렸다.
“샤를리즈.”
칼릭스가 가늘게 웃었다.
이전이었다면, 바들바들 떨리는 얼굴 근육에 힘을 주는 데 전념했을 리반은 그저 상관이 안쓰러웠다…….
‘공녀님. 십 년이면 경력자가 되고도 남을 시간 아닙니까. 한데 왜 공녀님은 아닌 겁니까…….’
책의 저자를 잡으러 간 제이가 돌아온다면 지는 달을 벗 삼아 조잘조잘 떠들 준비는 이미 완료됐다.
뚱한 얼굴로 들어오던 샤를리즈가 리반을 보고 멈칫한 것은 그때였다.
조금…… 묘한 눈빛이었다.
시선이 닿는 시간은 길어졌다. 미묘한 침묵이 집무실 내부를 맴돌자, 어리둥절하게 있던 리반은 저도 모르게 힐끗 뒤를 돌아봤다.
칼릭스의 눈빛은 ‘안 나가고 뭐 하고 있어?’ 같기도 했고, ‘샤를리즈가 너를 왜 보고 있을까.’ 같기도 했다.
그가 아는 주군은 매사 합리적인 사람이다. 상대에 대한 감정은 소거한 채 적절한 시기가 도래하기를 기다리다가 단숨에 포획하는 철저함은 통제와도 닮아 있었다.
그러니 첫사랑이든 끝 사랑이든 머리로 하실 줄 알았는데…….
“…….”
리반은 즉각 다음 행동을 정했다.
“편하게 대화하십시오.”
“잠깐.”
잽싸게 튀어 나가려고 했건만 어느새 팔목이 붙들려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빠른 손속에 리반은 얼떨떨해졌다.
“이거 가져가.”
얼떨결에 받아든 것은 동그란 사탕이었다.
“예에. 감사합니다?”
“이제 가 봐.”
“예에. 감사합니다.”
힐끔힐끔 사탕과 샤를리즈를 번갈아 보며 리반은 성공적으로 탈출했다.
‘왜 내게 사탕을 주셨지……?’
그 의문은 사탕을 물고 복도를 배회하던 중 우연히 만난 레아를 통해 한층 두터워졌다.
“헉!”
피차 오래 일했다 보니 리반도 레아의 성정을 알고 있었다. 가볍게 묵례만 하고 지나치려는 그에게 레아가 무언가를 전달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웬 사탕입니까?”
“공녀님께서 보좌관님을 만나게 되면 전달하라고 하셨거든요.”
그새 다섯 걸음 멀어진 레아는 사탕이 두둑하게 든 주머니를 보여 주었다.
“……공녀님께서 왜 그러라고 하셨는지 짐작 가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글쎄요.”
답변은 거리가 멀어 자그마하게나 들렸다.
리반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마구 띄운 채 한동안 복도에 오도카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리반이 집무실에서 나가고 난 후.
나는 빠르게 미래를 확인했다.
혹시나 해서 속으로 ‘아드리안을 보여줘!’ 해봤는데 어림없었다.
시무룩해져 있는데, 시야 귀퉁이에 펜이 보였다. 나는 양손을 작게 내저었다.
“펜과 종이는 없어도 됩니다.”
“이제 대화를 해 주는 거야?”
“내일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아쉬워. 그런데 거리는 계속 이 정도인가?”
“예.”
“으음.”
칼릭스가 짧게 웃었다.
“조금 더 가까이 와 줘.”
‘엇.’
리반이 저렇게 되고 나니 혹시 칼릭스도 비슷한가 싶어 걱정됐다.
“잘 안 들리십니까?”
“아니. 잘 들려.”
‘아하.’
“조금 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 그랬어.”
나는 아침에 십오 분 동안 열심히 끄적인 이미지를 재빨리 떠올렸다.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금발…….
‘나 이제 금발 질렸는데.’
귀족들은 정말이지 금발투성이였다!
재수 없는 미소…….
‘잠시만. 에리히 놈이 생각나려고 해.’
주변인에게는 싸가지 없고 오직 내게만 다정한 면모.
‘사샤한테도 싸가지 없으면 얼굴에 주먹 날릴 것 같군.’
……이럴 수가.
내 망한 취향이 정말로 완전히 망해 버렸다.
속으로 울고 있는데, 특유의 나긋한 어조가 들려왔다.
“와 주지 않아도 돼, 샤를리즈. 내가 갈게. 둘 다 싫다면 이 거리도 좋아.”
나는 냉큼 칼릭스 앞에 당도했다.
내가 가는 것과 칼릭스가 오는 건 다르다. 그냥, 그냥 기분이 달랐다.
“음? 고마워.”
칼릭스가 눈을 접어 웃었다.
그 미소를 본 즉시 금발에 싸가지 없는 놈은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나는 이성을 다급하게 붙잡고 입을 열었다.
“리반에게 큰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리반이?”
“예.”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때문에 큰맘 먹고 종이를 포기했다.
‘기록으로 남기기는 그렇잖아.’
“좀, 아니, 많이 주제넘은 말이기는 한데요.”
“우리 사이에 주제넘은 건 없어.”
칼릭스가 날렵한 입매를 올렸다.
“돈독한 사이잖아.”
“책을 다 읽으셨어요?”
“응. 아주 유익하더군.”
“그렇죠?”
“그래서 저자를 만나볼까 해.”
“그 정도로 마음에 드셨어요?”
“함께 만나보겠어?”
“그건 아니요.”
뿌듯해졌다가 나는 아차 하고 다시 주제를 돌렸다.
“리반에게 휴식이 필요해 보입니다. 아주 이상해졌어요.”
[공녀님. 이것 좀 더 드시겠습니까?]
[이런 친절을 베풀다니 이상하군.]
[……이게 그렇게 말씀할만한 친절입니까?]
[리반 그대, 지금 주방장의 걸작을 모욕하기 일보 직전이야.]
[아무튼……, 이 정도 선의가 친구 사이인 겁니다.]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며 음식을 씹자, 리반은 작게 중얼거리며 가슴을 퍽퍽 쳤다.
[저도 이게 오지랖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안타까워서 그래요. 안타까워서.]
“사람은 죽기 전에 달라진다던데 그 정도로 피곤한가 봐요. 리반이 쉬는 동안은 일이 좀 많아지겠지만, 죽으면 전하의 일은 앞으로 계속 많을 테니 멀리 봐서 휴가를 주시는 게 어떨까요.”
칼릭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조금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리반이 죽는 건 아무렇지 않은 건가? 리반이 조금 서운해하겠어.”
“사람은 다 죽습니다.”
무언가를 감추듯 칼릭스는 눈을 내리떴다. 속눈썹에 햇살이 고였다.
“카지노 소유주는 쉬폰 남작이야. 리엔타의 기사인 에반스 쉬폰의 부친인 그 남작이 맞아. 남작은 실소유주가 누구인지 모르는 터라 고리를 계속 되짚어 오르다 보니 늦어졌어.”
“리닉스였습니까?”
“그래.”
놀라우면서도 동시에 놀랍지 않았다.
놀라운 건 하나였다.
‘그럼 황후는 원작에서 왜 남동생 명의로 사업을 해야 했을 만큼 돈을 벌려고 했던 거지?’
의문의 답은 금세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황후가 개인적으로 자금을 운용할 수는 없도록 제약이 있는 것 같더군. 아직 원본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공작을 살려 두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카지노에 한자리하는 것들이 리닉스 공작에게 충성심이 아주 깊나 봅니다.”
“황후가 손을 썼을 텐데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으니, 아마도.”
리닉스 공작이 완전히 망가진 지 십 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철저하게 유지되는 충성이란, 종속에 가깝지 않은가.
“어제 필리엄 백작저를 방문했다고 들었어.”
내리뜬 눈꺼풀이 올라가고, 그 아래 선명한 벽안이 보였다.
“자세히 이야기해 주지 않아도 돼. 모두 알지 못해 조각난 부분만 알아도 좋아.”
목소리는 마침내 귓가에 닿았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될까, 샤를리즈.”
* * *
고풍스러운 샹들리에의 빛이 도달하는 구역은 실상 그 어디보다도 천박했다.
‘가면을 씌울 테면 차라리 얼굴을 모조리 가리는 구조로 준비할 것이지.’
그랬다면 아드리안의 입술은 한껏 비틀려 있을 터였다.
샤를리즈가 카지노를 드나든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거의 즉시 아드리안은 부름을 받았다.
[그 성격에 적을 만들지 않을 리가 없겠지. 적당한 치에게 전달해라.]
그리하여 변방 자작가의 사생아 주제에 이런 금액대를 내걸고 포커도 쳐 보게 됐다.
“오늘 공녀가 오려나?”
“그랬으면 좋겠군. 이번에는 내가 분명 이길 테니 말이야!”
“자네 허풍은 여전하네.”
“슬슬 여신의 가호가 떨어질 때도 되지 않았겠나?”
아드리안은 관심 없다는 듯 흘려들으며 제 카드에 집중하는 척했다.
샤를리즈 리엔타에 대해서는 원래도 여러 말이 오갔으나 근래는 더했다. 그러나 의외로 원색적인 비난이나 조롱은 없었다.
퀭한 눈으로 전락하게 된다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그 공녀가 또 기행을 보인다.’ 정도쯤에 불과했다.
“쉿. 쉿! 저기 왔네!”
그건, 앞서 낄낄거리기 무색하리만치 지독히도 선명한 저 눈 때문인지도 몰랐다.
샤를리즈가 눈썹을 밀어 올렸다.
“드디어 만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