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17) (117/232)

117화

아드리안은 양팔을 번쩍 올렸다.

“사흘 만인가? 오랜만이로군!”

“얘 빼고 다 일어나.”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은 즉시 기립해 뿔뿔이 흩어졌다.

개중에는 샤를리즈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며 입을 놀린 자도 있었다.

‘뭐지?’

의심스러운 기색을 애써 감추며 아드리안이 실실거렸다.

“이거 무섭게 왜 이러시나?”

샤를리즈는 대답 없이 털썩 자리에 앉았다.

“내기 하나 하지.”

“내기라니?”

“이런 걸로 하는 내기가 뭐겠어.”

“어떡하나. 오늘따라 기복이 심해 다람쥐 양이 오기 전 돈을 많이 잃었네. 원하는 만큼 판돈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어.”

“상관없어. 대가는 돈이 아니니까.”

‘알아챘나.’

아드리안은 그저 담담했다.

이거 영 곤란하게 되었다며 속으로 혀를 찰 만큼 더러운 일에 진심이었던 적 없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부분은 남아 있었다.

저를 두고 독살을 모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장 멱살을 잡아끌고도 남을 성정의 공녀가 잠자코 있다는 것이다.

‘알 필요는 없지.’

충직한 수하라면 표적의 속내를 알아내고자 위험을 감수하겠다만, 아드리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최선의 미래는 늘 비명횡사하는 것이었다.

죽음을 알게 된다면, 삶이 절박해지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모친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핑계는 스스로에게만 할 수 있다.

그는 죽어 마땅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럼 거절하겠어. 무섭잖아.”

일부러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는 몸을 일으키려는데, 녹안이 시선 끝에 무심코 닿았다.

걸음을 옭매는 듯했다.

* * *

“그렇다니 알겠어.”

저 자식, 감이 좋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밤에 납치해 오는 수밖에.

제이한테 물어보고 싶었던 게 이거였다. 혹시 언제 시간이 되냐고 말이다.

‘튜베롯은 오늘 땄고.’

어차피 난 그놈에게 목 내놓고 깔짝거리는 중이다. 은밀히 행동할 필요가 없으니 편한 점도 있었다.

‘벌금은 필리엄 백작한테 받아서 내야지.’

쿨하게 넘어가기에는 돈이 없다.

돈에 무슨 죄가 있겠냐만 공작의 혈압을 생각해 모조리 리엔타의 보좌진에게 전달했기 때문이다.

‘잘 기부했으려나…….’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떠올리다 보면 공작의 젖은 눈이 자연히 연상됐다.

[샤를……. 내가 잠시 너를 믿지 못했다. 미안하구나. 이리도 선량하고 기특한 아이인 것을.]

뒤늦게 전해 들은 공작은 내가 건넨 돈의 일부를 용돈 명목으로 돌려주겠다고 했다.

‘왠지 돈세탁하는 기분이라 찝찝해서 거절했을 뿐인데.’

사고만 치는 자식보다는 착한 자식이 스트레스도 덜 주겠지 싶어 꿋꿋하게 들었는데, 끝이 없었다.

‘그나저나 소유주. 너무 쉽게 알아낸 거냐, 아닌 거냐.’

다른 사람이 추적했다면 분명 그쪽에서 일부러 흘렸다고 생각했을 텐데, 칼릭스라서 헷갈렸다.

설령 전자라고 해도 덥석 물어줄 생각이지만 이건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일부러 흘린 거면 엉겁결에 쓱싹되지 않도록 머리에 힘주고 있어야 하는데.’

매사 긴장하고 살면 명줄이 짧아지니 내 심신에 좋지 않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될까, 샤를리즈.]

“…….”

동그란 칩을 손 안에서 굴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문득 눈을 치켜떴다.

“마음이 바뀌었네.”

아드리안이 씩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내기, 수락하겠어.”

모쪼록 대화로 풀 수 있을 듯도 싶었다.

그리고 잠시 뒤.

“이런. 이번에도 참패로군. 이래서 호기는 진즉 버렸어야 했는데 말이야!”

아드리안이 혀를 끌끌 차며 손에 든 카드를 테이블에 휙 내팽개쳤다.

그때, 나는 턱을 쓸며 영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쟤 금발이었잖아?’

* * *

샤를리즈를 뒤로한 채 에반스는 무뚝뚝한 얼굴로 로비를 거닐었다.

“저기, 공녀의 호위 기사 아닌가요?”

“공녀가 또……?”

“모두 진정하세요. 재미 수준으로 하는 판에 설마 공녀가 끼겠어요?”

“그러더군요. 아주 싹쓸이해 갔습니다!”

“도의적으로 너무해요.”

이것이 그가 로비를 휘휘 돌아다니고 있는 두 번째 이유였다.

처음에는 몸에 배어버린 습관 때문에 샤를리즈가 들어간 말소리는 자동으로 소거되어 난항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하나 귀담아들으면 심력이 몇 배로 소모돼 멀쩡히 버틸 수 없던 다년간의 업무 환경이 이런 버릇을 만들어 버렸다.

좌절에 빠진 그를 도운 건 바로 동료들이었다.

특히 노아의 공이 컸다.

[자, 잠시만. 무서워.]

[아가씨께서 우연히 들으시고 우리가 아가씨를 놀리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어떡해?]

[노아야, 대단하다. 목소리만 다르지 말투가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냐. 너는 다른 길로 나갔어도 대성했을―.]

[크어크흠흠!]

[―테지만, 기사가 역시 천직 같다!]

덕택에 에반스는 직업병을 짧은 시간 내 탈피하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직원이 보였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은 자연스레 뒤돌아 어디론가 향했다.

쉬폰 남작에게 샤를리즈의 방문을 전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에반스의 눈이 가라앉아 짙어졌다.

[경. 그대에게 미안한 말을 하게 되었어. 나는 경의 부친과 대립하게 될 것 같아.]

이 말은 달리는 마차 내부가 아니라 리엔타의 어느 정원에서 듣게 된 것이었다.

[리엔타와 쉬폰 중 양자택일을 하라는 말은 아니야. 경의 주군은 공작 각하이지 내가 아니니까. 다만, 내 호위 기사로 더 일하기는 힘들 테지.]

[쉬폰 남작이 아가씨가 방문하시면 알리라는 수상한 청탁을 했음에도 아가씨께서는 저를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한데, 제게 어떻게 쉬폰이 더 중할 수 있겠습니까.]

애초에 그는 가문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한 기사였다.

[그리고 맹세했습니다. 아가씨의 곁을 언제고 지키겠다고요. 저는 이전에도 현재도 앞으로도 리엔타의 기사입니다.]

부랴부랴 달려올 부친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는 턱에 근육이 도드라졌다.

* * *

한편, 비슷한 시각. 쉬폰 남작저.

“도련님께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공녀가 출입했다고 합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더니 딱 그 짝이군. 가관이야.”

“채비를 도울까요?”

“됐다. 그보다 공녀의 다른 행적은 없던가?”

이건 그분이 지시한 바가 아니기는 하나, 아무래도 샤를리즈를 주시하는 듯해 알아보고 있었다.

다른 수하를 통해 전달받고 있을 테지만, 주군의 심계를 헤아리는 면모는 언제고 도움이 되지 않겠나.

“오늘 신전을 찾았다고 합니다. 꽃을 또 꺾었다더군요.”

“쯧. 나이를 먹어도 철딱서니 없는 건 여전하군. 그분께 연락을 취해라.”

“예, 가주님.”

문이 닫히고, 쉬폰 남작은 혀를 찼다.

“결국 이리 잘해 낼 거면서 왜 그런 얼굴은 했던 게야.”

삼남 에반스는 아비의 노고로 고생 모르고 자라 저 홀로 고고했다.

‘그럴 수 있는 것도 다 내 덕택인 것을!’

수도에 겨우 발만 걸치는 정도였던 한미한 가문을 키우기 위해 남작은 결단을 내렸고, 빠르게 황제를 선택했다.

남들이 기피하는 행동거지를 하며 제 자리를 만들어 내던 때, 운명처럼 황금 줄을 잡았다.

그분의 정체는 여전히 알 수 없으나, 거리의 부랑자든 무엇이든 알 바 아니었다.

내킨 김에 값비싼 미술품을 전시한 방을 돌아보고자 몸을 일으킨 때였다.

“가주님!”

“무슨 일로 시끄럽게 구는 게냐!”

집사도 아닌 하인 따위가 집무실 문을 벌컥 열자 남작은 일단 소리부터 내질렀다.

“죄, 죄송합니다.”

못마땅히 혀를 차는데, 하인이 여전히 다급한 투로 말했다.

“엘루이든 대공 전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이, 이 미친.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하인이 어깨를 찔끔 떨었다.

“언제. 언제 오셨는데!”

“바, 방금입니다.”

“이십 분, 아니, 십 분, 아니다. 오 분 뒤에 찾아뵙겠다고 전해라!”

“예, 가주님.”

남작은 휘청이며 책상을 짚었다.

“대공이 무슨 일로…….”

천만다행으로 어린 대공을 괄시한 적은 없으나 마음에 걸리는 구석은 많았다.

비치한 잔에 물을 따르고 벌컥벌컥 마신 남작은 꿀꺽 침을 삼키며 집무실을 나섰다.

* * *

남작저의 가장 훌륭한 응접실일 것이 분명한 방은 과도하게 화려했다.

무엇이든 빛바랠 것 같은 공간에서, 빛바래지 않을 사람을 알았다.

눈꺼풀을 올리자 샤를리즈가 있었던 그 밤.

기적처럼 다가온 우연으로 불면의 밤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이 있었다.

[사람 헷갈리게 만들지 마.]

[네가 미워.]

[다시는 만나지 말자. 피차 그러고 싶잖아?]

붙잡으려 해도 손에 잡히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허공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순간부터는 이 꿈의 끝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반복돼 기억할 수 없어 흩어지는 순간이 고정되고 흘러간다면, 이곳의 샤를리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사람은 다 죽습니다.]

그런데 그 끝에, 너는 과연 살아 있을까.

불현듯 든 의문이 지워지지를 않았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첨예한 눈동자가 쉬폰 남작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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