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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18) (118/232)

118화

‘도대체 어째서 방문한 게야!’

쉬폰 남작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응접실로 오는 내내 골몰해봐도 찾을 수 없던 답은, 역시나 이번에도 나오지 않았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불청객 된 도리로 이 정도는 참아야지.”

칼릭스가 날렵한 입매를 올렸다.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흥건해지는 듯해 남작은 손을 연신 하의에 문질렀다.

뒷배라고는 이복형의 우애뿐이었던 비천한 태생의 소년 대공이 이처럼 성장하리라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불행 중 다행은 대공이 평화로운 시대에 평화롭지 못한 방식으로 황위를 찬탈하기에는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과거지!’

선황자가 나타나고 판도는 달라졌다.

중립파인 리엔타와 엘루이든의 결합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황제파는 물밑에서 한 차례 거세게 흔들렸다.

그러나 파문은 금세 잦아들었다.

대공은 그저 어린 조카를 보호하는 숙부처럼만 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나를 찾았단 말이야.’

쉬폰 남작은 표면상으로는 황제파의 중심부에 입성하고 싶어 촉새처럼 구는 가엾은 귀족이었다.

그러니까, 명실상부한 황제파 귀족이며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가벼운 서론이 오가고 남작은 조심스럽게 서두를 열었다.

“한데 무슨 일로 방문하셨는지…….”

“몇 가지를 묻고 싶어서 말일세.”

“제가 대공 전하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걱정할 필요는 없어. 어려운 질문은 아닐 테니.”

“……예?”

“간단해.”

의례적으로 드리워져 있던 온유한 미소가 걷히면, 마주한 얼굴이 서늘한 인상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됐다.

“솔직하게 대답하기만 하면 되는 질문이야.”

칼릭스가 짙게 웃었다.

쉬폰 남작은 본능적으로 움찔 어깨를 떨었다.

“내 약혼녀께서 카지노를 자주 방문하시기에 걱정이 되어 조사를 해 봤는데 소유주가 남작이더군.”

‘이래서 공녀가 카지노를 출입한 것이었던가!’

적절한 이유를 만들기 위해 공녀가 카지노에 직접 드나든 게 틀림없다. 공녀는 대공의 말이라면 뭐든 따를 인물이었고, 대공은 공녀의 평판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을 터였다.

남작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파헤치면 알 수 있는 정도는 내어주는 쪽이 차라리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듯했다.

“예. 그렇습니다.”

“남작가의 자산으로는 어려운 규모던데.”

“뜻이 맞는 몇몇 이들과 함께 의기투합하였습니다. 실상 저는 복잡한 종이만 처리하고 있을 뿐이지요.”

“그랬군.”

여상한 표정에 도리어 불길한 기분이 되었다.

“한데 어째서 여쭙는 것인지요?”

남작이 애써 사람 좋은 얼굴을 했다.

“카지노가 떳떳한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은 압니다. 하지만, 말씀드리기 조심스러우나 전하께 취조받을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솔직하게 대답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을 텐데…… 남작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을까.”

느슨하게 풀려 있던 분위기가 그 말을 기점으로 일순 팽팽해졌다.

“카지노를 남작에 떠맡긴 사람이 누구인지. 어쩌다가 그쪽에 합류하게 되었는지.”

남작이 침을 삼켰다.

‘도대체, 대체 이게 무슨.’

머리를 가득 채우는 혼란스러운 의문의 답이나 다름없는 질문이 마침내 들려왔다.

“그 사람은 남작과 정치적으로 뜻을 함께하는 자인가?”

‘대공이 황제파를 벌써 견제하려고 드는 겐가.’

대공은 카지노를 황제파 귀족들의 자금줄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쉬폰 남작은 바쁘게 생각하며 어디까지 발설해도 괜찮을지를 가늠했다.

“남작. 나는 되도록 이 이야기를 대화로 풀고 싶네.”

실로 단조로운 목소리였으나 치외 법권에 속하는 남자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선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것이 말입니다.”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답변하느라 등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정말로 더는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퍽 절박한 말에도 감흥 없다는 듯 칼릭스는 엷게 웃었다.

“그래. 남작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얼이 빠져 있던 남작이 뒤늦게 일어났다.

“살펴 가십시오.”

공손히 인사를 하는 척 적당히 고개 숙인 채 남작은 생각했다.

‘당장 그분에게 엘루이든 대공의 야욕을 알려야겠다!’

그래서 그를 내려다보는 칼릭스의 벽안이 지독히도 무기질적이었다는 사실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 * *

리반은 본디 실내를 선호했다.

칼릭스가 외출하는 시간이 리반의 암묵적 휴식 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마음이 홧홧해서 그런지 열이 오르는 바람에, 바람을 쐴 겸 이번 외출에 냉큼 따라붙어 보았다.

물론 오늘 사샤와의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집사라는 현실이 이 선택에 가장 영향을 미치기는 했다.

“차는 필요 없습니다.”

대공의 측근을 위해 마련된 장소로 안내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반은 뒤돌아 나왔다. 그 지독히도 화려한 취향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괜찮으시려나…….’

걱정스러운 마음과 달리 잠시 뒤 마주한 칼릭스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염려는 삼킨 채 리반은 뒤이어 마차에 올랐다.

“쉬폰 남작은 어찌할까요?”

“주시하고 있어. 곧 정보를 전달할 것 같더군.”

부를 축적하고 그 누구도 쉽게 여길 수 없는 가문으로 성장시키며 정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지 않기는 어려운 법이다.

당시 사망이 확실시되었던 조카의 행방을 찾아내고, 그 유해를 황실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칼릭스는 정치적 아군을 비롯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리반은 조금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공녀님 때문입니까?”

“그런 얼굴 할 것 없어.”

푸른 눈동자가 조금 기울어졌다.

“이건 내가 앞으로 할 일 중 가장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저 말고 공녀님께 직접 말씀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전하께서 공녀님을 위해 무엇을 하시는지요.”

다시 속이 답답해진 리반이 숫제 울먹이며 물었다.

“안타깝게도 소용없을 거야. 우리는 이미 ‘친밀한’ 사이거든.”

그 세계의 샤를리즈에게도 현실의 샤를리즈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었다.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하고 있었다고. 저를 올곧게 바라보는 녹안 속에서,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고.

무턱대고 제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 보인다면 샤를리즈의 행동은 예측이 갔다. 그를 피할 것이다.

더 다가가고, 다가간다면 해류에 휩쓸린 것처럼 그를 받아들여 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불쑥 중얼거린 목소리가 스스로의 것인지 순간 불분명했다.

칼릭스가 우미한 눈매를 구겼다.

위화감이 예리한 잔상을 남겼다. 그건, 어느새 퍽 익숙해져 버린 감각이었다.

폭 한숨을 내쉰 리반이 말을 돌렸다.

“황제가 겁먹어 벌벌 떨며 사샤 님을 황성에서 보호해야겠다고 하면 어떡한답니까.”

무표정했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사샤 님을 황위에 세우려고 하십니까?”

“사샤여야 할 이유는 없어.”

그 고독하고 비정한 자리를 아이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대체재는 많으니 그중 골라보는 것도 괜찮겠군.”

리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나는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공간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됐다.

내일은 리반을 졸졸 따라다녀 귀찮게 해서라도 꼭 티타임 시간대를 교환하고 말겠다.

음흉하게 웃던 것도 잠시. 문득 생각했다.

‘……아드리안, 뭔가 오해한 것 같았는데.’

[따라 해 봐. 그분.]

[그분.]

[좋았어. 주군.]

[……주군.]

뭐, 그런들 어쩌겠는가. 이미 마차는 떠난 것을.

‘집사에게 칼릭스가 귀가하면 쪽지 전해달라고도 부탁했고.’

방만한 자세로 침대에 벌러덩 누워 주섬주섬 눈을 붙였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일곱 시 경.

나는 내 방처럼 익숙한 3층 복도를 쏜살같이 가로질러 가주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샤를리즈.”

직접 문을 열어주며 칼릭스가 들어오라는 듯 비켜서려고 했다.

‘안 돼!’

위기감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내가 조금만 자제력이 부족했어도 칼릭스는 벌써 큰일 났다.

나는 와락 손목을 붙들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시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 보여.’

추측이 확실시되기까지는 이십 분쯤 남았다. 이런 가설을 세우고 있다고 말할 거였다면 이전에 이미 말했을 거다.

그래서 나는 남은 시간에 두 번째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카지노는 이제 가지 않으려고요. 아무리 그래도 약혼녀인데 그런 곳을 드나들어 죄송했습니다.”

“아니야. 하려던 일은 끝마쳤어?”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거기서 좋은 인연도 만났습니다.”

칼릭스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부드럽게 흐트러지는 흑발에서 애써 시선을 떼어내며 나는 말을 이어갔다.

“인성은 글러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아마 짧은 만남이 될 것 같습니다. 전하는 모르시겠지만, 제 감정이 원래 짧게 지나가고 말거든요.”

앞뒤가 어색해도 어쩔 수 없다. 칼릭스는 내 연애 사정에 전혀 관심 없을 테니 ‘사실 제 사랑이 짧습니다!’ 하고 말할 다음 기회는 없을지도 몰랐다.

“제가 금발을 선호하는데, 마침 딱 좋아하는 색이어서 호감이 가지 뭡니까.”

나는 눈을 또랑또랑하게 떴다.

감정이 소거된 듯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칼릭스가 문득 짧게 웃었다.

“그보다 춥지는 않아, 샤를리즈? 그러다 또 감기에 걸리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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