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헛. 그러면 안 되는데!
나는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단단히 싸매고 나오기는 했지만 자다 깬 지 얼마 안 돼서 조금 위험한 느낌이었다.
뜨끈한 차도 한 잔 얻어먹고 힐끗힐끗 칼릭스를 살폈다. 나른해 보이는 얼굴에 묘한 미소가 드문드문 드리워지고는 했다.
‘하긴, 거머리가 드디어 완전히 떨어져 나간다니까.’
아드리안을 보름 정도 만나는 척하다가 다른 사람으로 적당히 바꾸면 될 듯했다.
‘아드리안에 관해서는 또 말할 기회 없을 테지만, 또 만나는 사람은 기회 오지 않을까?’
그때도 짧게 만난다고 말하고 보란 듯 짧게 만나야지.
반복만큼 뇌리에 지독히도 남는 건 없다.
“그런데 카지노를 드나드는 사람이라니 걱정이군.”
“앞으로도 계속 카드놀이 한다고 하면 그때마다 머리를 후려치려고 합니다.”
“나도 불러 줘. 우리는 아주 친밀한 사이잖아?”
나는 눈을 빛냈다.
칼릭스가 저렇게 말한다니 앞으로도 자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파혼을 더 앞당겨도 될 것 같았다!
“맞습니다. 아주아주 친한 사이지요. 그런데 걔한테도 물어봐야겠습니다. 남은 생을 찌그러진 머리로 살아야 할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는 해야겠죠.”
“힘 조절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
“노력하시진 않아도 됩니다.”
칼릭스가 손마디에 턱을 괴었다. 편안하게 풀어진 자세 때문인가. 우리는 마치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 같았다.
“샤를리즈, 그런데 그 사람의 어디가 좋았어?”
“어…….”
“짧은 시간이었으니 금발 말고도 마음에 드는 게 있었을 것 같아서.”
“보라색 눈이 예뻤습니다.”
“그리고?”
칼릭스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겉은 다 써먹어서 말할 거 없는데.’
내면을 보고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어색하게 눈을 굴리다가 나는 적당한 단어를 찾아냈다.
“눈앞에 있어도 계속 보고 싶어서요.”
‘바로 사샤 말입니다. 사샤야…….’
그 순간, 푸르스름한 빛을 몰아내며 해가 떠올랐나 보다.
미래의 조각이 시작되었으니까.
필리엄 백작은 초조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공녀에게 물건을 받은 즉시 사용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던 하루의 시간이 마치 억겁처럼 길었다.
“……할아버지?”
떨리던 손이 순간 멈췄다.
고개를 들어 올릴 수 없었다. 기대가 참담하게 깨지는 순간은 많았으나,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용기 내지 않는다면 눈을 뜬 아리아 역시 볼 수 없을 것이다.
햇살 아래, 아이는 눈을 뜨고 있었다.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리아.”
“할아버지 왜……. 어?”
제 목소리가 낯선 듯 아리아가 울대를 매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