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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20) (120/232)

120화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평범한 인물처럼 보이는 인적 사항은 두 번째 페이지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그리고 거기서 좋은 인연도 만났습니다.]

그 순간 동요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호감이 가지 뭡니까.]

샤를리즈가 사랑을 말하는 순간은 뚜렷하다. 착각할 수도, 헷갈릴 수도 없다.

그건 이 세계에서 칼릭스만이 가진 특혜였다.

샤를리즈는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사랑하는 척을 해야 했을까.’

샤를리즈는 그들의 약혼을 그녀가 청해 이루어진 것처럼 상황을 꾸몄다. 그러니 엘루이든에 타격이 가지 않도록 적당한 이유를 갖춘 후 파혼하려는 생각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샤를리즈가 찾고 있는 인물이 이 남자와 연관되어 있거나.

푸른 눈이 깊어졌다.

벌써 한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샤를리즈는 혼절했다.

그때마다 후유증 없이 털고 일어났으나, 앞으로도 그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보고서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던 순간이었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줄곧 기다리고 있던 말이 들렸다.

“공녀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 * *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는 손은 동요하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싶은 듯 유독 느렸다.

[엘루이든 대공이 쉬폰 남작을 찾았습니다. 카지노의 소유주가 남작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고 있었으며, 황제파의 자금줄로 의심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리엔타 공녀가 세냑의 사생아와 내기에서 승리했다고 합니다. 그 내기란 게 무엇이었는지 사생아가 말하기는 하였으나, 다소 의문점이 있습니다.]

[바이에르 공작가에 잠입했던 헤레스 베론이 결국 숨졌습니다. 공작은 수도 저택에서 거처를 옮기지 않고 있사온데, 사용인을 포섭해 볼까요?]

그때 그는 되물었다.

[바이에르 공작이 오십 년간 북부를 드나든 통행 기록을 조사하고 있다지 않았나?]

[예. 그러합니다.]

[문건을 전달받으려면 본성에서 사람이 다녀야 할 터. 적당히 영특한 놈을 붙여라.]

북부의 통행인을 조사한 공작이 헤레스 베론을 제거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절묘하다.

[리엔타 공녀가 필리엄 백작에게 전달한 물약으로 백작의 손녀가 의식을 차렸습니다.]

“공녀인가, 대공인가.”

하지만 결국 제거할 인물은 하나였다. 샤를리즈 리엔타.

다른 모든 이유를 제외하더라도, 칼릭스 엘루이든은 제거하기 아깝다.

현 황제는 멍청하고 아둔하기 짝이 없어서, 칼릭스가 없어진다면 황권을 강화시키고자 헛짓거리를 할 게 분명했다.

도구 주제에 희망을 품고 저러는 꼴은 상상만 해도 입술이 비틀렸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무엇이더냐.”

“필리엄 백작이 만남을 청하고 있습니다. 어찌할까요?”

만남은 여러 저택 중 하나를 무작위로 골라 행해졌다.

그는 수하의 변심이 의심되는 상황에서도 저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낸 적 없다. 아무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법진으로 오가니 설령 백작이 뒤를 밟혀도 상관없을 터.’

“백작에게 마차를 보내.”

“예, 주군.”

“리엔타의 계집을 독살하는 건은 잠시 보류해라. 대신 테오도르 바나첼은…….”

길게 늘어진 입술이 간악했다.

“그대는 황후 폐하께오서 회임을 하신 지 시일이 제법 지났건만 연회 하나 열지 않는 게 말이 된다고 보나?”

“말이 되지 않는다고 사료됩니다.”

“아이를 가진 척을 했으면 제대로 해야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부족한 건 매한가지야.”

혀를 짧게 찬 남자가 덧붙였다.

“황제에게 이야기를 흘려 보게. 아무리 안정이 중요하다고는 한들 첫 아이인데, 슬슬 축하연을 여는 게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 * *

밥 먹고 노곤해서 잠깐 눈 붙인다는 게 깜빡 졸았다.

이건 체력의 문제다. 연병장은 돌 수 없으니 다른 데라도 많이 돌아다녀야겠다.

혼몽하게 잡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맞다. 내 침대 아니지.’

침대란 본디 신성한 장소다. 얼른 일어나 비키고자 했건만 눈꺼풀이 무거웠다.

사투를 벌이며 바르르 속눈썹을 떨고 있는데, 조심스러운 온기가 닿았다.

“더 자도 돼.”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는 작고 나긋했다.

잠을 깨우는 소음이 아니라 뒤척거리던 중 우연히 닿은 안온한 품 같은 온기를 담고 있었다.

침대를 자꾸 차지해 죄송하다고, 잠들면 리반한테 시켜서, 아니지. 리반은 힘이 없을 게 뻔하니까 제이를 불러 달라고 했는데, 그 말을 과연 제대로 했을지나 모르겠다.

나는 금세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 *

신전은 한적했다.

무심한 얼굴로 걷는 샤를리즈의 뒷모습을 구경하듯 쳐다보며 저들끼리 속삭이는 말들 사이로, 그녀를 부르는 뚜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녀님.]

샤를리즈는 걸음을 멈췄다.

그녀를 부른 사람은 이리안이었다.

그러나 샤를리즈의 시선은 거기 닿아 있지 않았다. 칼릭스와 똑 닮은 아이가 어깨를 움찔하며 이리안의 뒤에 숨었다.

[무슨 일이지?]

[이곳에서 드릴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렇다면 하지 마. 네게 따로 내어줄 시간 따위 없으니까.]

이리안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치욕을 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칼릭스와 연관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요?]

아…….

샤를리즈가 사납게 웃었다.

[그토록 대단하다던 사랑을 오래 즐기려면 주제 파악은 할 줄 알아야지 않겠어? 이러다가 모르는 새 죽을 수도 있잖아.]

미소는 금세 걷혀 무표정해졌다.

[내가 그 이름 하나로 너를 졸졸 따라갈 개새끼처럼 보였다니 네 멍청한 머리에 유감이네.]

독약은 또 구매할 수 있다. 기회는 몇 번 더 남은 셈이다.

그녀는 오늘 튜베롯 군락지를 모두 불태우고자 신전을 찾은 차였다.

그 대가는, 그녀가 죽고 난 후 리엔타 공작이 감당하지 않도록 오늘 교황을 직접 만나 해치울 생각이었다.

다시 걸음을 떼려던 순간.

[공녀님.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마세요.]

이리안이 아프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 *

꿈에서 밀어내지듯 일어나며 생각했다.

이리안의 뒷말은, 다음번에서야 알 수 있겠구나.

그리고 되짚었다.

‘교황을 직접 만난다고 했어.’

공작 성격에 샤를리즈가 교황에게 홀대당하도록 방관할 리 없다.

미리 말을 맞춰 약속을 잡았을 거다.

‘저 때는 의식이 있었거나, 의식을 잃은 척할 필요가 없던 거야.’

이번에는 빌빌거리며 눈을 뜨지 않고 번쩍 눈꺼풀을 올렸다.

‘……어엇.’

칼릭스는 없었다.

멋쩍게 볼을 긁적이다가 나는 흠칫했다.

“아, 레아구나…….”

레아는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후다닥 일어나 신세 진 침구를 탁탁 펼쳐 정리하는데, 무언가 툭 떨어졌다.

한 번 접힌 쪽지였다.

사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올게. 사샤는 아직 모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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