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시일이 금세 흘러 무도회 당일이―.
―되었다면 차라리 나을 텐데 말입니다…….
시간은 이틀밖에 흐르지 않았다.
그사이 백작의 손녀가 깨어났다는 소문은 엄청나게 퍼져 있었다.
‘백작은 신전에 기부를 하지 않아도 됐을 것 같다.’
내 돈도 아니니 별생각 안 들었다.
[놈을 만날 때 샤를리즈 리엔타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하십시오. 손녀에게 도대체 어떤 것을 주었기에 아이가 일어났는지 걱정된다고 말입니다. 허락을 구하라는 건 아닙니다. 그냥, 미리 흘리세요.]
그런 이유로 마차에 몸을 실었다.
한숨은 내쉬지 않았다. 나는 걷기광으로 거듭날 예정이다.
“공녀님.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지면에 발이 닿기 무섭게 뒤로 나동그라질 뻔했다.
‘컥!’
누군가 달려와 안겼기 때문이다.
‘아무리 급습이라고 해도 버티지 못하다니 충격…….’
뒤에서 제이가 기겁하며 받쳐준 게 아니라면 이번에도 떨리는 손으로 뒤통수를 더듬거릴 뻔했다.
“세상에, 아가씨!”
유모로 추정되는 여인이 부랴부랴 달려와 허리를 숙였다.
“그러시면 안 되어요. 공녀님, 놀라셨지요? 죄송합니다. 아가씨도 얼른 사과하세요!”
“힝.”
검은 머리 타래 너머로 얼핏 보이는 필리엄 백작저는 사뭇 달랐다.
신실한 신자를 제외한 모두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된 예배당 같은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던 공간은, 마치 연한 노란색의 느낌을 폴폴 풍겼다.
‘돈이 많아서 손녀 취향대로 바로 맞출 수 있었나 봐.’
몹시 세속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리아가 풀 죽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공녀님. 저는 제가 아직도 열세 살 같아서…….”
“사과할 것 없어.”
친근하게 말을 받았다.
무례란 걸 알아서 꾹 참을 뿐, 궁금한 게 있기 때문이었다. 오 년이나 침대에 누워 있기만 했다는데 아리아는 굉장히 잘 걸었다!
‘혹시 백작이 손녀의 근육을 위한 포션을 구매한 걸까?’
그렇다면, 그거 나도 사고 싶었다…….
다음 기회를 엿보기로 하며 나는 졸졸 따라갔다. 아리아의 입은 그동안 한시도 쉬지 않았다.
빙의한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측근으로 아주 적합한 성격이었다.
“오 년이나 잠들어 있다고 해서 너무 신기했어요!”
“그랬군.”
“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성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 너무 좋아요. 할아버지가 데뷔탕트 무도회도 내년에 따로 열어 주신대요.”
“기쁘겠어.”
“이번에 황성에서 무도회가 열린다면서요? 공녀님도 거기 가세요?”
귀가 얼얼할 즈음 필리엄 백작이 도착했다.
“아리아. 손님께서 무료하지 않으시도록 잘 상대해 드리고 있었구나. 고생했다.”
부드럽게 손녀를 내보낸 백작은 가타부타 끌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공녀님과 친분을 유지하며 행적을 주시하라는 명을 들었습니다.”
‘……혹시.’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백작을 훑었다.
‘세뇌당했는데, 세뇌한 작자가 백작이 나한테 경어 안 썼었다는 거 모르나?’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백작이 공손히 말했다.
“공녀님은 제 보물에게 두 번째 세상을 선물해 주신 분이니 행동거지를 이제라도 똑바로 해야겠지요.”
‘아하.’
사양해봤는데, 백작은 굳건했다.
그쪽이 마음 편하다면 나도 마음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외의 명은 없었던 것을 보면, 제 처분을 어찌할지 가늠하고 있는 듯합니다.”
“살아날 구멍은 마련했습니까?”
“어느 정도는요. 아이가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단단한 땅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성년에 가까워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어린 손녀. 부친마저 사망해 가문에 믿을만한 어른도 없다는 데서 기인한 걱정이 짙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입을 뗐다.
리엔타 공작을 생각나게 하는 면모에 속절없이 이 구역의 대왕 오지랖꾼으로 거듭나고 만 것이다…….
“손녀가 걱정돼도 외부 업무를 줄이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무역 말입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치고 올라오는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예. 아리아의 손이 더러워지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이미 제 손은 더럽다는 듯 백작이 웃었다.
힘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물었다.
“백작. 비단 자금을 조달했을 뿐만 아니라, 놈이 원하는 물품을 업무상으로 취급하기도 하였습니까?”
오랜 기억을 되짚듯 침묵한 백작이 곧 입을 열었다.
“문서를 확인해 보아야 정확할 테지만, 제 기억으로는 없습니다. 필요하시다면 문건을 취합해 드릴까요?”
“예에. 그럼 고맙지요.”
그렇게 한 손에 일거리를 쥐고 귀가하게 된 서글픈 현실 앞에 나는 힘이 쪽 빠졌다…….
* * *
[공녀를 두고 보라는 명이 하달됐다.]
계획이 불시에 변경된 것은 굉장히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아드리안이 공녀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군이니 그분이니 마치 저를 그렇게 부르게 할 생각인 것처럼 어느 단어가 귀에 더 붙는지 확인할 심산인 듯하던 샤를리즈는 정작 다른 말을 했다.
[내 가짜 애인이 돼라.]
[……예?]
카지노에서 고수하던 말버릇도 잊고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물음에 샤를리즈가 오만하게 턱을 치켜올렸다.
[칼릭스가 질투하게 해 보라고. 싫으면 이만큼 내놓든가.]
결국은 공녀와의 지속적인 만남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모두 들었다면 혹시 나를 감시하고 있었던 건가.’
아드리안은 스스로 생각하기로도 슬슬 버려질 때가 되었다며 느끼고 있었다.
이 기회에 샤를리즈와 친분을 쌓게 한 뒤 그의 손으로 확실히 제거시키고자 함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과연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아드리안이 오른손에 쥐고 있는 서신의 발신인은 샤를리즈 리엔타였다.
* * *
차마 퀭한 눈의 그 사람에게 일을 떠맡길 수가 없어 내가 퀭해지길 자처한 간밤.
잠시 눈 붙이면 더 졸릴 것 같아서 아예 밤을 꼬박 새운 채 커다란 건물에 도착했다.
‘자신이 없다. 안 졸 자신이…….’
하필 오페라를 관람해야 했다.
푹신한 좌석에 기대니 눈시울이 절로 뜨끈해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군요.”
아드리안의 말에 다음에는 정각 0초에 오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게 고난의 세 시간 후.
커피 하우스의 딸기 우유를 씹어 삼키며 나는 중얼거렸다.
“오페라, 별로였어.”
아드리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화에 동참했다.
“어떤 점이 그러셨나요?”
자꾸 수하가 상관에게 할 법한 말투를 써서 ‘씁’ 몇 번 했더니 꽤 잘하게 됐다.
“모두 비극이야.”
빨대로 우유를 휘휘 저으며 눈을 내리떴다.
“여자 주인공이 가엾어.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그렇게 사랑하는데도 결국 남자 주인공과 헤어졌어.”
“하지만 남자 주인공은 쓰레기였지 않았어요?”
“맞아. 그런 거, 버리는 게 나아. 하지만 버렸어야지. 부모 때문에 포기했잖아. 기억에 남고 말 거야.”
“그래도 여자 주인공은 잠깐은 불행해도 앞으로는 행복했을 거예요. 사랑하는 부모를 지켰으니까요. 부모도 돌아온 여자 주인공의 선택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지 않았습니까.”
“그게 가장 싫더군.”
나는 눈을 들어 올렸다.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만 하면 뭐해. 결국 또 희생하게 만들어 버렸잖아. 몇 번 하면 됐지 왜 평생 옭매여 희생해야 해.”
아드리안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뭐, 그래도 괜히 유명한 극이 아니란 생각은 들었지.”
“예. 특히 배경이 화려해 투자를 많이 한 티가 나더군요.”
“그대, 세속적이군.”
그 말을 끝으로 내가 말이 없자 아드리안도 말을 붙이지 않았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망한 것 같은데?’
아드리안에게 예약을 맡긴 오페라는 박스석이었고, 커피 하우스도 개인석이었다.
그러니까, 누가 보고 있지 않았다!
‘이김에 칼릭스가 자연스럽게 파혼을 청할 수 있도록 밑밥도 깔 생각이었는데.’
소문이 너무도 알음알음 퍼지게 버렸다.
‘애인에게 선물이라도 가져다 바쳐야겠군.’
노아도 안 받아주는 선물을 생판 남에게 주려니 마음이 쓰리지만 별수 없지.
가판대에서 싼 거 하나 대충 골라야겠다.
“일어나자.”
“공녀님.”
아드리안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나는 긴장해 등을 빳빳이 세웠다.
칼릭스는 몹시도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지만, 약혼자 두고 다른 남자랑 돌아다니는데 기사를 붙여달라고 하기는 뭐해서 혼자 온 참이다.
그나마 혹시 싶어 총을 달고 오길 다행이었다.
속으로 위치를 가늠하고 있는데, 아드리안이 말했다.
“제 뒷조사를 어디까지 하신 겁니까?”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