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23) (123/232)

123화

샤를리즈는 특정한 시간대의 오페라를 말했고, 그 시간대에 상영하는 극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부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악의 무리의 끄나풀이 된 여자 주인공이 선역인 남자 주인공에게 접근하는 이야기.

줄곧 눈을 내리뜨고 있던 샤를리즈는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순간임을 그에게 알리려는 듯, 눈꺼풀을 올렸다.

“왜 평생 옭매여 희생해야 해.”

이래서 접근했던가.

결혼을 앞두고 대공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대공저에 꼭꼭 틀어박히는 선택이 가장 자연스러웠을 공녀가 ‘그런’ 제의를 한 게 수상하다는 생각을 잠깐 하기는 했다.

“제 뒷조사를 어디까지 하신 겁니까?”

공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주시했다.

“혹시 엘루…….”

“그 이름, 꺼내지 마.”

샤를리즈가 즉각 반응했다.

“모두 내 독단이니까.”

눈매를 살짝 찌푸린 아드리안은 이내 깨달았다. 저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탄로 나 그는 죽을 예정이었다.

“모친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공녀는 침묵했다.

그게 어쩐지 마음에 걸려서, 아드리안은 한 번 더 반복했다.

“감상하신 오페라 속 부모와 달리 전혀 연관 없으십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란 게.”

“제 어머니만큼은…… 살려 주십시오.”

“이상한 말이로군.”

여상한 목소리에 아드리안이 목울대를 무겁게 움직였다.

“그대가 죽으면 어차피 그대의 모친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는 거, 알잖아?”

“…….”

“나보고 네 ‘주군’으로부터 모친을 지키라는 뜻인가?”

연이어 묻는 목소리엔 비웃음이 없었으나 담긴 내용은 뾰족한 말단부처럼 날카로웠다.

“답은 간단해. 그대가 모친보다 오래 살면 돼.”

공녀가 입술을 올렸다.

“배신해.”

* * *

돌아오는 길.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뭐지?’

나는 아드리안을 포섭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포섭하려면 아드리안 약점인 모친을 건드는 수밖에 없잖아.’

놈은 나쁜 방식으로 접근했으니 아마 나는 썩 선한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했을 거다.

그런데 저 알아서 열심히 사는 사람을 내가 돕고 말고 할 게 뭐 있단 말인가.

‘뒷조사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아서 어차피 그른 참에 조금 찔러 봤더니 이렇게 되었다.’

[제게서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내 연애 편력의 일부가 되는 것…….’

생긴 게 저래서 겸사겸사하려고 했을 뿐인데, 세상일이란 역시 알 수 없다.

[제 힘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공녀님께서 언급하신 대로 배신한다면, 제 어머니라도 거둬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어차피 생이, 오래 남지 않은 분이십니다.]

[죽으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그대의 위에 누가 있는지, 그 위에 누가 있는지. 적당히 알아봐.]

걔 목은 내 것이란 말이다.

카지노의 특실에서 자행되는 사기도박과 여러 가지를 조합해 ‘카지노는 절대 건전하지 않다! 애초에 저기가 건전하겠냐!’하며 수도 경비대에 고자질하고, 필리엄 백작으로부터 전달받은 문건과 칼릭스가 제공한 실제 운임 및 하선 내역을 눈알 빠져라 대조하고, 이리안과 손을 꼭 부여잡은 채 로제타의 뒤를 따라 걷고, 리반이 말하는 ‘칼릭스의 체력은 남다르다!’에 이전보다 열렬히 공감할 수 있게 되고, 칼릭스가 나날이 초췌해져 가는 내 안색이 걱정되었는지 직접 달여준 약을 리반 동지 몰래 털어 넣고…….

시간은 그렇게 흘러 무도회 전날.

황실의 인장이 박힌 서신 한 통이 엘루이든에 날아왔다.

* * *

황실 시종장이 대공저에 방문한 것은 이른 오전이었다.

그렇다. 그때 칼릭스 옆에 나도 있었다.

“기다리라고 해.”

“예, 가주님.”

좋지 못할 소식일 게 뻔한, 예고 없는 방문 앞에 그는 초연했다. 무심히 명령을 내린 후, 칼릭스가 고개를 돌렸다.

미래는 조금 전 이미 펼쳐졌다.

멀뚱멀뚱 마주 보고 있자니 칼릭스가 물었다.

“오페라는 어땠어?”

“졸렸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그렇긴 했다. 표를 돈 주고 예매한 건 내가 아니었던 탓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좀 미안하네.’

아드리안, 너 돈 별로 없을 텐데…….

나도 넉넉지 못한 형편이지만 표 살 돈은 있는데 말이다.

“다음에는 나랑 해. 더 즐거울 거야.”

칼릭스가 가늘게 웃었다.

“우리는 ‘친구’잖아.”

어쩐지 내 무덤 내가 판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친해졌다고 바로 뒷전으로 두는 못된 짓을 저지를 수는 없다.

“좋아.”

‘저런 단어는 내 앞에서 조심해야 하는데.’

조심해야 한다면 왜 조심해야 하는지 답변할 수 없어서 종종 듣다 보니 엉겁결에 여러 곳이 단련되고 있다.

닫힌 문을 잠시 바라봤다.

시종장이 어떤 말을 할지 나는 알고 있다. 읽었기 때문이다.

‘사샤도 데려가지 않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안 되겠지.’

황제는 칼릭스를 불참시켰다. 이때 사샤도 불참 의사를 밝힌다면 황제는 ‘내가 조카를 해하리라고 생각하는 겐가!’하고 지레 찔려 펄펄 뛰며 어디로 튈지 모른다.

이래서 사람은 나쁜 짓 하면 안 된다. 사고가 저렇게 되어버린단 말이다.

‘선황제를 암살한 거, 현 황제일까.’

선황제는 튜베롯 독으로 죽었을 소지가 다분하다.

‘그럼 현 황제의 약점을 놈이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손에서 굴리기 용이하니 황위 교체를 바라지 않을 만도 해.’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점은 미래의 조각에 황제가 제대로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휴.’

나는 그저 몽실몽실한 소설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이런 데 던져져 버렸다.

‘방에 가면 그림책 읽어야겠다.’

씁쓸하게 생각하곤 슬슬 집무실을 나가려던 때였다.

“아, 계셨습니까.”

화가 나 들어오던 리반의 얼굴에 아차 하는 기색이 스쳤다.

“무슨 일이야?”

“아닙니다.”

“그래. 직접 가서 들으면 되니까.”

“공녀님!”

망한 평판을 갖고 있다는 건 대체로 이득이다. 진짜 쳐들어가고도 남을 만하다는 걸 모두가 아는 덕택이다.

리반은 결국 실토했다.

“저번 겨울 사냥제에서 소동이 있었지 않습니까. 당시 주군께서 조사를 자처하셨고요.”

‘자처했다고?’

의아했지만 리반에게 물어도 제대로 된 답은 듣기 힘들 터다. 이어질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황제 폐하께서 그때 일이 명명백백히 가려지지 않았다며 황성 출입을 금하셨습니다.”

“허어.”

나는 어이없는 숨을 뱉었다.

다 떠나서, 칼릭스는 겨울 사냥제 이후 이미 황성에 출입한 적도 있다.

‘핑계군.’

명명백백히 가려지지 않은 게 아니라, 가릴 게 없으니 유야무야 종결된 거였다.

‘이 건은 칼릭스가 자처했다고 해도 치외법권의 지대에 속하지 않을 수 있음을 표명하려는 건가.’

퍼뜩 든 생각에 나는 물었다.

“나도 함께 참석을 금한다고 하였나?”

“그런 말은 아직 없었습니다.”

리반이 무겁게 덧붙였다.

“조심하십시오.”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반은 칼릭스가 불참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대공 전하께는 황제의 명을 수락하자고 전해 줘.”

“예?”

“원래 멀리서 봐야 더 잘 보이는 법이잖아.”

나는 눈꺼풀을 조금 내려 눈동자를 가렸다.

“리엔타에 다녀오겠어.”

그리고 소년의 주홍색 눈을 목도했다.

* * *

이튿날.

시녀들의 손이 어쩐지 내 눈 밑을 자꾸 배회하는 느낌이다. 이유를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면구스러워졌다.

“공녀님. 이제 눈을 뜨셔도 되어요.”

그리고 엄청 놀랐다!

‘다크서클을 집중적으로 가렸을 줄 알았는데.’

화장이 두꺼워져 화려한 쪽으로 선회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투명하기까지 했다.

‘기술…… 대단…….’

대공가 시녀들의 기술을 얕본 것을 속으로 사죄하며 사샤에게 향하던 길.

때마침 아이도 준비가 끝났는지 우리는 우연히 마주쳤다.

“샤를 님!”

“어?”

통통 달려오던 사샤는 내 탄성에 순간 고개를 갸웃하며 멈칫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검지와 엄지의 틈새를 벌려 그사이에 사샤를 잡았다.

“이것 봐. 사샤. 요만했는데, 요만해졌어!”

손 틈새를 유지한 채 쏜살같이 달려가 신나게 말했는데, 아이가 얼굴을 붉혔다.

“그, 그만하지는 않아요!”

사샤가 자그만 손을 열심히 움직였다.

“이만해요!”

어째 세 배나 늘어났다.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내 손과 사샤를 번갈아 보다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정말인데요…….”

“그래. 정말이야.”

사샤를 한 팔에 안아 들려다가 나는 “어이구. 어이구. 무거워라.” 하며 재빨리 실패한 척했다.

‘키에 고민 많은 아이인데 실수 저질렀다.’

유전상 절대로 키가 작을 수 없다 보니 자꾸 까먹게 된다.

어화둥둥 어르며 걷던 그 끝에서 이번에는 칼릭스를 마주쳤다. 정확히는 만날 수밖에 없었다.

마차 앞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릭스는 완벽하게 성장한 차림새였다.

사샤는 우리를 번갈아 보다가 마차 안으로 쏙 들어갔다.

“어어.”

순식간에 빠져나간 온기에 뒤늦은 탄식을 흘리고 있는데, 뒤로 리반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일곱 살 보다…….”

어쩐지 눈을 세모로 떠야 할 것만 같은 기묘한 예감이 들었다.

그때, 단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싫어할 것을 알아.”

칼릭스가 내 손끝을 가볍게 잡았다.

차가운 질감의 물체가 손가락을 거슬러 올라왔다. 한 쌍으로 이루어져 착용한 한쪽의 부상을 다른 한쪽에게 전이시키는 용도의 바로 그 성물이었다.

“절대 빼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그럼 저택에서 얌전히 기다릴 수 있어.”

“거절하면요?”

“그럼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겠지. 걱정돼 어쩔 수 없어.”

말장난하듯 느슨하게 웃었지만 진심이다.

나는 성물을 내려다보다 다시 시선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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