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겨울 사냥제에서의 일로 참고인 조사를 자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왜 그러셨어요?”
칼릭스는 눈꺼풀을 살짝 내린 채 부루퉁한 표정으로 딴짓했다.
……사실 진짜 그런지는 모르겠다. 나는 최근 객관성을 빠르게 잃고 있기 때문이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 걱정도 혼자 하라는 거야?”
습관적인 웃음기를 담고 느른하게 내려다보던 시선이 살짝 기울어졌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마주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이 무도회에 참석하려고 하셨고, 그러지 말자고 말씀드린 사람이 저입니다.”
“달라.”
칼릭스는 삐뚜름하게 웃었다.
“불참하라는 공녀의 제안을 수락한 건 결국 나야. 그러니까.”
어떤 말을 할 것 같던 칼릭스는 문득 내 눈을 깊게 응시했다. 짙어지는 듯하던 벽안이 불현듯 휘어졌다.
“다른 성물은 내 얼굴을 흉내 낸 그 남자에게 착용시킬게.”
“틀렸습니다. 전하의 얼굴을 흉내 내려다 실패한 놈이란 말입니다.”
“응. 내 얼굴을 흉내 내려다 실패한 놈에게 착용시킬게. 그놈에게 한다고 하면, 그때는 계속 끼고 있어 줄 건가?”
‘칼릭스는 안전하게 돌아가는 것보다 본인이 피해를 입더라도 최단 거리로 가는 타입인데…….’
나는 의심스럽게 칼릭스를 바라보다가 손을 척 내밀었다. 그리고 새끼손가락만 펼쳐 그 앞에서 흔들었다.
‘어, 어엇.’
칼릭스 뒤편에 서 있던 제이의 눈이 충격으로 물든 것을 보고 잽싸게 다른 손가락을 애매하게 폈다.
“약속해요.”
나는 이제 눈 감고도 뭐가 칼릭스 손이고 뭐가 다른 자식 손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손에 닿은 온도는 묘하게 낯설었다.
꿋꿋하게 내 소지로 칼릭스의 것을 꽉 감싸고, 나는 단정하게 매여진 크라바트를 낚아챘다.
“그러니 연회홀에는 오지 마세요.”
“한 가지 질문해도 돼?”
“안 됩니다.”
크라바트를 등 뒤로 숨기고 슬쩍 물러났다.
앞머리카락을 무심코 쓸어 올린 칼릭스가 나직한 탄식을 내뱉었다.
흐트러진 흑발에서 야멸차게 시선을 떼며 나는 재빨리 태세를 전환했다.
“이제 하셔도 됩니다.”
“왜 이렇게…… 능숙해.”
순간 뭔가 싶어 어리둥절했다가 깨달았다.
“다녀와서 답해 드릴게요.”
“그래.”
칼릭스가 눈을 휘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 * *
마차가 부드럽게 멈췄다.
“안겨.”
“네에.”
크라바트는 주머니에 쑤셔 넣으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주머니가 없어서 마차에 곱게 두고 내렸다.
도착한 연회 홀 분위기는 미묘했다. 황제가 칼릭스의 참석을 허가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이미 들은 듯한 면면이었다.
저런 기색은 어떻게 보면 내게 가장 익숙하다고 할 수 있으므로 능숙하게 무시하……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보셨어요? 대체 몇 명이나 따라붙은 거죠?”
“공녀를 위해서는 아닐 테고, 역시…….”
“저는 공녀 때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자칫했다가 리엔타 공작 각하와…….”
“쉿! 너무 나가셨어요.”
“한집에서 산 지 오래됐는데 정분나고도 남죠.”
“그렇다기에는 약혼식을 아직도 하지 않았잖아요?”
“결혼식 일정을 당겼다면…….”
어쩌다 보니 내 귀는 단련됐다. 손으로 막지 않고도 말을 차단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거다.
적당한 위치에 멈춰 섰는데,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사샤가 나를 올려다보더니 자그마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순간 꿈에서 본 아이가 떠올랐다.
‘어떤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사이가 아주 나빴는데.’
[한 번 더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건 안 되겠죠.]
샤를리즈가 교황을 찾아간 이유는 신에게 빌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 미친 짓의 값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신에게 애원할 성격이 아니기는 했어.’
황제와 황후의 입장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의례적인 말로 서문을 연 황제는 흡족한 눈으로 연회홀의 귀족들을 훑어보았다. 내게 유독 길게 머무는 듯했던 시선은 걷히고, 축사가 끝났다.
리반이 떨떠름하게 삐그덕댔다.
“춤을……, 추. 추.”
“사양하지.”
“왜 기분이 나쁜 걸까요? 저는 공녀님께 그 누구도 첫 춤을 신청하지 않는 슬픈 기억이 생기는 일을 막아 드리고자 어쩔 수 없이 신청했고, 거절당한 현재 몹시 기쁜데 말입니다.”
툴툴이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아이가 있는 쪽을 확인했다.
사샤 곁에는 루카스와 바이에르 공작, 그리고 제이와 진이 있었다.
테오도르 바나첼은 매달 마지막 날에 신에게 기도하곤 했다. 날을 정해 두지 않으면 매일 밤 애원할 것만 같아서.
오늘은 마지막 날은 아니었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날은 무도회가 열리니까.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오늘 기도하는 거라고.
‘누구입니까. 대체, 누가…….’
무기력했다. 그간의 노력은 단 한 번도 결실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 ‘누구’는 입단속을 위해 황후가 먼저 처리했을지도 모르겠다.
‘황후가 나를 제거할 때 알려 주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테오도르가 스스로에게 비웃음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