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상대방이 대처할 새 없이 곧바로 반동을 이용해 거리를 좁힌 샤를리즈는 괴한의 이마를 제 머리로 쳤다.
퍼억―
스르르 쓰러지는 몸을 끝까지 지켜보는 녹안이 선득했다.
‘이 자식이 감히 내 목에 멍 자국을 만들려고. 공작이 보면 기절한단 말이다.’
심문을 위해 포박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담아 제대로 의식 잃고 있으라며 복부를 걷어찬 후 땅을 박찼다.
사방은 비명과 울음소리로 어지러웠다.
샤를리즈는 힐끗 단 위를 확인했다.
여전히 내부는 어두웠으나 움직이는 인영의 여부 정도는 구별할 수 있었다.
‘황제와 황후는 은밀히 몸을 피한 것 같고.’
현재 상황상 호위하라며 소리쳐 위치를 드러내는 것보다 최대한 은밀하게 몸을 피하는 선택 쪽이 자연스러웠다.
“사샤.”
자그만 어깨가 깜짝 튀었다.
기사에게 안겨 있던 아이는 어둠을 향해 망설임 없이 팔을 뻗었다.
샤를리즈는 동그란 머리를 왼손으로 단단히 받치고 안았다. 숨이 찰 만큼 달렸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쪽에 접근은 없었습니다만 몸을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제이가 속삭였다.
샤를리즈는 아이를 다시 안겨주며 말했다.
“먼저 가.”
각성열은 이미 앓았다. 그럼에도 사샤의 신성력이 눈에 띄게 개화하는 일은 없었다.
결국, 원작처럼 어떠한 ‘고난’을 겪어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아이가 심리적으로 극한에 치닫는 일을 겪어야 주어지는 신성력이라면, 원작의 다음 전개 따위 열리지 말라고 해.’
이놈의 원작은 하여간 저자놈만큼 밉상이다.
“예?”
엉겁결에 사샤를 품에 안은 제이가 설득하고자 황급히 입을 떼려고 할 때였다.
“겨울 사냥제와 똑같네. 그렇지?”
“…….”
제이가 침묵했다. 아이는 기류를 기민하게 눈치채고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안 돼요.”
“사샤 님…….”
“같이 가요. 같이 가야 해요.”
절박한 목소리에 끝내 울음이 섞였다.
“같이 가야 하는데…….”
“사샤.”
샤를리즈가 허리를 숙여 이마를 맞댔다. 히끅거리며 아이는 더듬더듬 샤를리즈의 뺨을 매만졌다.
“샤를 님 안 가시면 저도 안 가요. 또 못 만나게……. 아!”
사샤가 예리한 가시에 찔린 사람처럼 어깨를 한껏 움츠렸다.
“사샤 님? 사샤 님?”
“그때도 똑같……, 똑같이.”
작지만 다급한 물음과 헐떡이는 숨소리 사이로 여상한 목소리가 불쑥 울렸다.
“기억나? 우리 저번에 초콜릿을 먹었는데.”
지나치게 태평한 어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맞닿은 온기 때문이었을까.
눈을 마구 깜빡이던 아이는 비록 보이진 않아도 여기 곁에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샤 초콜릿은 엄청나게 형형색색이었고, 내 것은 그냥 초콜릿이었잖아.”
“……네. 그랬어요.”
“그래서 사샤가 왜 다른지 궁금하다고 해서 내가 사샤는 아기라서 그렇다고 했는데.”
“아, 아기 아니에요.”
“맞아. 그렇게 말했지.”
샤를리즈가 피식 웃었다. 사샤는 그 소리를 소중히 마음에 담았다.
“사샤가 내 초콜릿 먹고 쓰다며 잉잉 울었잖아.”
“잉잉 안 울었어요. ……조금만 울었어요.”
“그래. 쪼끔 울었어. 그래서 사샤가 형님 되려면 멀었다고 시무룩해져서 내가 형님이 되기까지 아주 오래 걸려도 기다리겠다고 했잖아.”
따뜻한 기억을 헤매며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야트막하게 웃었다.
“네, 그러셨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 나는 그 약속, 절대로 지키고 말 거거든.”
대답이 없던 아이는 그 언젠가 그랬듯 보드라운 뺨에서 용감하게 손을 떼었다.
잘했다는 듯 가볍게 이마를 맞댄 샤를리즈가 말했다.
“제이. 바이에르 공작 각하와 함께 가도록 해. 설령 무슨 일이 생겨도 수가 생길 거야.”
“예. 가시지요, 사샤 님.”
숙련된 기사는 어두운 사위에도 불구하고 신속하게 이동했다.
샤를리즈는 그 등을 길게 응시하다 돌아섰다.
‘사샤가 과민반응했어. 잃어버린 기억 속에 비슷한 장면이 있었나.’
원작에서 그 시절은 끝내 서술되지 않았다. 칼릭스는 아이가 성장해 성년이 되었다고 해도 당시의 기억을 파헤치려고 들 사람이 아니니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비스듬히 아래를 향하고 있던 은색 속눈썹이 깜빡인 순간.
“크윽!”
은밀히 접근하던 다른 괴한이 옆구리를 제대로 얻어맞고 낮게 침음했다. 단련되지 않아 비교적 약한 힘을 노련한 기술로 만회해 타격감이 상당했던 것이다.
비틀거리는 괴한의 멱살을 잡아채고 테라스로 향하는 눈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내가 아무리 검술도 안 배운 몸이라도 두 번 연속 위협할 무기 하나 없이 덤비다니 수상한데.’
그녀에게 흠집이 생길 모든 경우의 수를 미연에 방지하기라도 한 듯 말이다.
‘어디 노예로 팔아버리려는 생각은 아닐 테고…….’
“큭. 크윽!”
거침없이 내딛던 걸음이 일순 멈췄다.
자꾸 시끄럽게 구는 놈 때문은 아니었다.
샤를리즈는 눈썹을 까딱였다.
‘그러게. 정말 이상하네.’
테라스는 커튼을 닫아 내부에 선객이 있음을 알리는 구조다.
이 무도회의 목적은 일단은 황후의 회임을 축하하기 위함이고, 황족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테라스로 쏙 들어가 눈 밖으로 나기를 자처하는 귀족들이 대체 얼마나 될까.
테라스 너머로 달빛, 하다못해 정원의 불빛조차 스며들어오지 않는 것은 인위적인 수단이 개입하지 않고서는 불가했다.
요컨대 흑마법 같이.
“끄으윽.”
멱살을 틀어쥔 손에 힘이 들어가 한층 빠듯하게 당겨지자 괴한이 숨이 막히는 소리를 냈다.
“아.”
샤를리즈가 불쑥 낮은 탄식을 뱉었다.
“죽었네.”
더는 반격할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어금니 사이에 물린 독을 터뜨린 것이다.
‘충성심이든 뭐든 정말 깊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남은 손으로 느리게 쓸어올리며 괴한을 던지듯 툭 놓았다.
예상한 대로 흑마법이 개입된 게 맞다면, 이 정도 흑마법을 펼칠 수 있는 배후는 단연 그놈이다.
‘흑마법사들을 산하에 두고 여타 귀족을 수하로 뒀음에도 신중한 겁쟁이가 황성 무도회에서 이런 일을 대놓고 저질렀다고.’
궁지에 몰려 있거나 이 일을 덮어씌울 사람을 내정해 둔 거다.
그러면 자연히 한 명이 떠올랐다.
샤를리즈가 눈매를 찌푸렸다.
‘테오도르 바나첼은 어디 있지?’
* * *
헛웃음이 공기를 가르며 터졌다.
테오도르는 눈을 길게 감았다. 눈꼬리를 타고 흐를 물기는 바닥을 보인 지 제법 됐다.
메마른 눈에 청명한 하늘이 담겼다.
가족을 모두 잃은 당시의 테오도르 바나첼은 영리한 여동생에게 가주위를 맡기고 평생토록 조각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한 학생에 불과했다.
사고사로 위장한 살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양친이 헌신한 가문을 지키는 것만으로 벅찬 머저리였다.
후견인이 필요한 나이는 가까스로 지났지만, 후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가주의 가문을 노리는 승냥이 떼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보니 어느새 삼 년이 흘렀다. 어느 정도 안정되자 몸을 메운 것은 짙은 자괴감이었다.
남은 생은 복수를 위해 살고자 했다. 성공하면 가족의 곁으로 갈 작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흔적이 남는 죽음은 곤란했다.
물밑으로 알아내 극독을 구매한 날. 황후가 은밀히 그를 찾았다.
[후작도 나도 퍽 비슷하군.]
이제 와 생각하면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먼저 약점을 보여 주어 경계심을 적당히 낮춘 후 구원자처럼 손을 내밀어주는 것.
어린 청년은 쉽게도 넘어갔다.
아니,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도 같은 과오를 벌였으니까.
‘시간이 걸려도 엘루이든 대공처럼 가문의 힘을 길러 독자적으로 알아보아야 했는지도 모르겠어.’
이미 삼 년이나 흐른 뒤였다. 증거가 모두 훼손돼 권력가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서둘렀으나, 그보다 더 긴 시간이 흘러 버렸다.
결국 황성의 어느 정원에서 깊은 검상을 입고 미끼처럼 놓인 처지나 되었고.
풀을 밟는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자신의 살해 용의자로 지목될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랬는데.
“테오도르 바나첼.”
감정이 서려 있지 않아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랬기에 오히려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쉽게 눈을 감아주려고 하면 어떡해. 그래서 어디 복수하겠어?”
달을 등지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긴 은발이 선연했다.
“네 복수,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어.”
타인의 손을 빌리려고 하지 않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회한을 한 게 방금 전이다. 테오도르는 모든 게 우스워져 자조했다.
“제가, 무슨 복수를 한단 말입니까.”
울컥 치미는 피를 삼키며 테오도르는 말을 이어갔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망이나 치시지요. 살해 용의자가 되실 테니 말입니다. 부친께서 면책권이 있어 무사하실 테지만 그토록 염원하던 결혼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뭐야. 입조심 안 하는 것 보니 벌써 곧 죽을 사람처럼 굴고 있잖아.”
샤를리즈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어차피 죽을 거, 그 목숨 가기 전에 유용하게 쓰고 가.”
어디서 뭘 듣고 이러는지는 모르겠으나 테오도르는 그저 피로해졌다.
“가시지…….”
“네가 모신 주군이라는 작자, 어쩌다 닿게 되었는지. 어떻게 된 면상을 갖고 있는지. 도대체 누구인지.”
한 글자 한 글자 짓씹듯 내뱉은 내용에 테오도르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내가 여기 어떻게 온 건지 궁금하면 이야기해 줄게. 하지만 그게 궁금하진 않을 테잖아?”
부드러운 손가락이 테오도르의 턱을 단단히 틀어쥐어 고정했다.
사납게 쏟아지는 시선을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샤를리즈가 이를 드러내 웃었다.
“이제 청승은 그만 떨 생각이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