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귀족의 저택이 밀집한 수도 1구역에는 속칭 로열 로드라고 불리는 거리가 있다.
별칭만으로 짐작할 수 있듯 궤를 달리하는 가문들의 저택이 드문드문 자리한 그곳은 당연히 황성 근처에 위치했다.
그중 단연 황성과 가장 가까운 저택의 소유주는 칼릭스 엘루이든이었다.
황성의 끝자락에 위치한 그리니티 홀의 불빛이 집무실을 아른거렸다.
“읍. 읍!”
황성을 담고 있던 벽안이 옆으로 움직였다. 그 끝에 있는 것은 상체와 팔을 두꺼운 줄로 휘감아 포박한 남자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는 허겁지겁 입을 닫으며, 피식 동물의 것처럼 목울음을 내었다.
[왜 처리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냥.]
제이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을 때, 칼릭스는 저런 답을 했었다. 일견 무신경하지만 실은 더없는 진심이었다.
그냥, 저 작자가 쉽게 죽지 않았으면 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리엔타 공녀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물건입니다.”
문을 열어 잔을 건네받은 칼릭스는 이 공간에 마치 그 홀로 있는 듯 다시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오늘로 다섯 번째던가.’
평범한 잔에 담긴 액체는 평범하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다시 정돈하지 않아 구불거리며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 얼굴에 문득 웃음기가 스쳤다.
[이건 무엇이지?]
[그…… 몸에 좋은 것입니다.]
묘한 어조에, 잔을 응시하던 눈을 들어 샤를리즈를 바라보았다.
슬쩍 시선을 피하며 샤를리즈가 말했다.
[빡빡 씻었으니 더럽진 않을 거예요. 안 씻기면 더 영험하지 않을까 싶긴 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좀.]
[신수인가?]
[……예에. 잠깐 담갔다가 뺐습니다.]
[힘들었을 텐데, 고마워.]
[아닙니다. 꼬리 운동 한 번 도와주면 해줘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 성수의 효능은 특정한 순간 드러났다. 바로 의식 저편에서였다.
정답을 찾을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과거의 꿈과 달리 마치 관찰자의 느낌으로 진행된 것이다.
제삼자가 되어 관조하듯 바라보다 보면 달리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이것이 그저 상상일 수 있을까.’
이제야 의심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아.”
나지막한 탄성을 흘리며 칼릭스가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텅 빈 잔이 바닥을 굴렀다.
갈고리로 머릿속을 마구 헤집는 것 같은 고통이 전부라면 답을 찾을 때까지 계속해 몰두하고 말 터다.
그러나 단단히 닫힌 거대한 문이 막고 있기라도 한 듯 잡히는 건 없었다.
예리한 눈매에 날 선 감정이 스쳤다.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려 크라바트를 고쳐매려던 손이 멈칫했다.
짧게 웃은 칼릭스가 무심코 창문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도구의 도움 없이도 시야에 들어오는 그리니티 홀은 이전과 같이 휘황찬란했다.
이질감이 뇌리를 스친 것은 바로 그다음 순간이었다.
떨어진 잔으로 손을 뻗은 칼릭스는 불현듯 눈을 깜빡였다. 성마른 손이 책상을 헤집고, 마침내 손끝에 마도구가 걸렸다.
확인을 마치고 창문가에서 돌아서는 얼굴은 무표정했다.
“아, 악!”
손과 함께 몸 전체가 함께 들렸다가 쿵 떨어진 남자는 저와 비교할 수조차 없는 악력을 실감하자 고개를 푹 숙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왜 대공을 흉내 내라는 제의를 넙죽 수락해서! 거절해야 했는데, 이 멍청한 것이. 그리고 나보다는 진짜를 캐내 족쳐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내가 혼자서 흉내 낸 것도 아닌데.’
설령 항변할 수 있게 되어도 전혀 다른 변명을 주워섬기고나 있으니 소용은 없을 터였다.
반지를 손 안에서 굴리며 칼릭스가 입술을 열었다.
“파커.”
“예. 주군.”
“아무리 원치 않으신다고 해도 축하 인사는 드려야겠다. 그게 동생으로서의 도리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길게 감은 눈꺼풀이 올라간 후 드러난 벽안에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진정 즐거워 짓는 미소는 아니었다.
* * *
‘휴우.’
싹퉁바가지 전략은 성공한 듯하다.
어쩌다 보니 알게 돼서 그걸로 해결할 뿐인데 상대방이 내게 고마움을 느끼는 건 별로였다.
‘마음 불편하단 말이야.’
그렇게 1차 싸가지의 대상이 된 사람이 바로 로단테였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나를 꽤 좋아하지 뭡니까.’
엔젤이랑 재회하는 데 도움 줘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어제 확실히 알았다.
그래도 요즘 애들은 취향이 독특한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이 떠올랐다. 바로 필리엄 백작이 느닷없이 나를 존중한 것 말이다.
위기감이 새롭게 덜컥 들었다.
‘나는 인맥 관리 못 하는데.’
원래 친했다가 돌아선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랬다.
난 좋은 인간이 아닌데 나를 좋은 사람으로 착각했다가 아니란 거 알면 어떻게 태세 전환할지 알 수 없다.
내 수명 연장에 지장을 주는 것이라면 그 어떤 사소한 것도 좌시할 수 없다.
‘약점 잡았다고 생각해 말부터 놓아버린 ‘저저저 나쁜 놈’, 성공.’
테오도르 바나첼의 턱이 아니라 머리카락을 잡는 게 더 확실하지 않을까 싶긴 했는데, 이건 또 너무 인심을 잃을까 봐 걱정이었다.
‘살 것 같은데.’
얼핏 확인한 검상은 깔끔하지 않아 처치할 때 손이 꽤 갈 것 같을 뿐 깊진 않았다.
‘뒤집어씌울 상대는 바나첼이 아니라 나였나 보군.’
리엔타 공녀가 바나첼 후작을 우발적으로 찔러 사망케 했다. 꼭 그것에 걸맞은 자상이지 않은가.
‘쟤가 먼저 상처 내서 반격했다고 할까 봐 맨손만 썼나 본데. 기절하게 만들고 여기 던져둘 생각이었나.’
엄청나게 간악한 놈 같으니라고.
나는 분노를 곱씹었다. 이 엄동설한에 하마터면 같이 저세상 갈 뻔했다.
투지를 담아 테오도르를 쳐다봤다.
나무에 기댄 채 복부를 손바닥으로 누르는 얼굴이 창백했다.
“제게까지 오신 걸 보면, 그전에도 여럿 만나셨겠죠.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제게는 흑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그래, 알고 있어.”
나는 그 앞에 털썩 주저앉으며 대충 안쪽 드레스 자락을 찢어 건넸다.
“……감사합니다.”
죽으면 안 되니 제대로 압박할 때까지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테오도르도 내가 그때를 기다린 것을 안듯 매듭을 묶고 먼저 입을 뗐다.
“저는 발설할 수 없습니다.”
“아니, 할 수 있어.”
나는 반지를 빼내었다. 손가락을 스치는 차가운 감촉에 마음이 별수 없이 무거워졌다.
‘약속했는데.’
칼릭스가 이 작은 약속조차 못 지키냐고 실망할 모습을 생각하니 어깨가 축 처졌다.
마음을 다잡고 반지로 내 손등을 겨냥했다.
“내가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우릿한 느낌이 번지고, 핏방울이 맺혔다.
필리엄 백작으로부터 답을 들어보려던 시도는 장렬히 실패했다.
내 신성력보다 흑마법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향으로 접근할 생각이었다.
나는 성물을 주먹 안으로 꾹 감싼 채 질문했다.
“가장 궁금한 건 놈의 이름이지만, 바로 죽을까 봐 첫 질문으로 하진 못하겠군. 네 주군과 어떤 경로로 닿았지?”
* * *
서늘한 얼굴을 잠시 응시한 테오도르는 마침내 입을 뗐다.
“저는 손의 감각을 둔중하게 만드는 약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피로 물든 손이 보였다.
그건 분명 제 것일 테지만, 어쩐지 가족들의 것으로도 보였다.
“이리안 라프란체를 조사하라는 명을 받은 적이 있었고, 그녀에게 접근한 적도 있습니다. 선배로서 말입니다.”
그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녀가 부러웠고, 아직 제가 헛된 꿈을 버리지 못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보다 독한 약을 구매하려고 했더니 그건 독이라더군요. 그래서 암시장에서 그것을 찾았습니다.”
“서론이 길어. 이걸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겠군.”
샤를리즈가 지겹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매정한 발언은 지난한 과거에서 단숨에 헤어 나올 수 있게 해주었다.
테오도르는 묘한 기분을 털어내고자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황후 폐하를 어떻게 배신하게 되었는지도 말씀드려야 할 텐데요.”
“뻔하지. 일이 틀어지면 주저 없이 수하를 제거하는 것을 보고 저 손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을지, 아니, 벗어나게 되는 상황 자체를 황후가 과연 좌시했을지 의심하게 된 것 아니야?”
“…….”
샤를리즈가 눈썹을 까딱였다.
“그냥 알았다고 해 두지.”
“결론만 말씀드리면…….”
울컥 피비린내가 치밀었다. 테오도르는 그것을 억누르며 불분명한 발음으로도 끝내 말했다.
“황후 폐하와 동일한 경로였습니다. 그건 아무래도―.”
“그만.”
샤를리즈가 고개를 반쯤 돌렸다. 다시 정면을 향하는 얼굴은 조금 찌푸려져 있을 뿐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분명 피를 뱉었다.
입가를 훔치는 손등에 붉은 자국이 길게 번졌다.
“아.”
샤를리즈가 웃었다.
무표정 혹은 화가 난 표정. 그 외의 감정은 찾기 힘들던 눈매가 즐겁게 휘어졌다. 그건 한 번 눈에 담는다면 잊기 힘들 만큼 아름다웠으나 선득해 오한이 일었다.
“확신이 필요했어. 망쳐 놨는데 알고 보니 사실 걔가 아니라면, 너무 미안하잖아.”
샤를리즈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런데 이젠 안 미안해도 되겠네?”
* * *
내가 놈을 바로 그 인간으로 확신하지 못하고 망설인 이유는 한 가지다.
원작에서 황후의 손에 쉽게 죽은 인물인데, 적당히 높은 수하 정도면 몰라도 과연 배후인 그놈이진 않을 것 같았던 거다.
그런데 아드리안을 겪으며 의구심이 생겼다. 내 예상보다도 더 세분화된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지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투명한 틀이 깨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