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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27) (127/232)

127화

그럼, 피라미드 구조의 최상단에 위치한 그 한 명은.

아무리 발설할 수 없도록 흑마법으로 입을 틀어막고, 절대 배신할 수 없게끔 약점을 쥐고 있다고 해도.

아니, 그렇게 해서까지 여러 명에게 얼굴을 공개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있을까?

“…….”

근원적인 물음은 곧 답이 되었다.

* * *

내 신조는 ‘무탈하게 오래오래 살자!’인데 어째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 되어 가고 있다.

‘그래도 성공이야.’

죽지도 않았고, 답도 찾았다.

흑마법을 파훼할 만큼의 신성력은 내게 없다고 하니 그럼 손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넌 정말로 미쳤다!

한참을 짱알거리던 신수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장단을 맞춰주는 게 아니었어. 성수를 만들어 준 것부터가 내 실수였다.

그렇다. 나는 신성력을 접하고 칼릭스를 마주하면 꿈을 꾸는 기현상을 여러 차례 겪었다. 그래서 칼릭스에게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어 시도해봤다.

그는 꿈을 계속 꾸고 있으니까. 나처럼 휙 지나가기라도 했으면 했다.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하라고, 장단 안 맞춰주셨지 않았습니까.’

신수가 홀랑 도망쳐서 왼손등을 몇 번이나 눌렀는지 모른다.

―너는 모른다! 너는……, 휴우.

‘휴우’보다는 ‘피유’에 가까운 깜찍한 한숨 소리를 끝으로 신수는 ‘―간다!’하고 사라졌다.

조심히 들어가라며 뒤늦은 인사를 하던 순간이었다.

“공녀!”

테오도르가 돌연 경직된 얼굴로 외쳤다.

혹시 뒤에서 급습하나 싶어 재빨리 뒤를 돌아봤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뭔데!’

“하아…….”

테오도르는 깊은숨을 내쉬며 피곤한 듯 눈썹을 눌렀다.

“제약의 대가를 본인에게 돌린 것, 맞죠?”

“그랬지.”

감수했는데 기분은 여전히 더러웠다. 이전 생에 이렇게 죽어서 그런가.

“혹시 반동으로 정신을 놓았나 했습니다. 갑자기 가만히 있기만 하셔서요.”

신수랑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부정 타는 말을 듣다니. 나는 세모눈을 떴다.

“그 말, 취소해. 불길하잖아.”

“예. 취소하겠습니다.”

마른세수를 하며 테오도르가 대답했다.

더 성의 있게 해 보라고 하려고 했는데, 파르르 떠는 손을 발견하고 나는 그냥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업혀.”

“……예?”

“제대로 못 걸을 거 아냐.”

테오도르는 별말 않고 내 등에 업혔다.

‘좋아.’

체면치레한답시고 고집부리면서 시간 잡아먹으면 자상 부위를 주먹으로 한 방 날릴 생각이었는데, 상황 판단이 괜찮았다.

문제는 달리 있었다.

“……자신 있게 말씀하시기에 포션 같은 종류를 복용했나 했더니 아니었군요.”

“…….”

일어서지 못하는 내게서 몸을 떼며 테오도르가 중얼거렸다.

“어차피 돌아가는 길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녀님도 제게서 더 알고 싶은 건 없으실 테니 제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왜 상관이 없어.”

나는 새삼 이 몸의 내구성에 충격을 받으며 비척비척 몇 걸음 걸었다. 다시 돌아서 테오도르의 환부와 안색을 확인했다.

“나는 대상을 찾는 시간을 단축만 하게 도울 생각이지 복수까지 해 줄 생각 없는데.”

“…….”

“거기까진 바라지 마. 그러니까 죽지도 말라는 이야기야.”

* * *

그리니티 홀의 출구는 셋이다.

귀족들이 몰려 있을 문, 황성의 오랜 사용인이라면 모두 숙지하고 있는 회랑, 그리고 이 경로다.

“이제 곧 출구입니다.”

“준비해야겠군.”

바이에르 공작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인원은 아이 둘을 포함해 다섯이었다.

리반을 제외하고 총 다섯이 샤를리즈와 사샤를 엄호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적은 인원수였다.

[하하! 내 눈에도 사샤는 아주 어린 아이로 보이지만, 그대들 눈에는 더한 모양이로군. 그리 꽁꽁 싸매면 홀로 외롭겠어.]

제이는 이를 갈았다.

뼈가 있는 농담은 황제가 한 것이었다.

‘황제가 연관되어 있나.’

사샤의 안전을 확보하자마자 확인한 단상 위는 분주했다. 허겁지겁 빠져나가는 동작은 당황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제 아이의 탄생을 고대하며 연 무도회를 그 용도로 쓰진 않았겠지.’

모친의 어깨에 단단히 고개를 묻은 채 눈을 꼭 감은 루카스가 보다 깊게 파고들었다.

“괜찮다. 내가 있으니.”

바이에르의 가주란 언제나 의연해야 한다며 혀를 찼을 공작은 어린 아들의 등을 한 번 쓸어 주었다.

제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사샤를 확인했다. 신속하게 이동해야 했기에 마찬가지로 진의 품에 안겨 있어 작은 뒷모습만 보였다.

‘사샤 님…….’

제이 또한 샤를리즈가 어떤 무예도 익히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그랬기에 그 순간의 수긍은 그녀가 절대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도록 두고 보지 않을 리엔타 공작을 알아 할 수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함께 있으니 괜찮으실 테지.’

찬 기운이 점차 스며들었다. 회랑의 끝을 알리는 것이었다.

시선을 교환하고, 바이에르 공작이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예상과 달리 외부는 고요했다.

오히려 불길한 감각이 치달았다.

“저는 연회홀로 돌아가 상황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함께 가지. 루카스를 부탁하네.”

루카스가 모친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아이는 침을 크게 삼키고 진의 손을 잡았다.

“공자님은 대공저에서 보호하고 있겠습니다.”

마차가 무사히 출발하는 것을 확인한 동시에 땅을 박차고 달렸다.

누군가 비밀 통로 근처에 매복하고 있을 가능성은 여전히 제할 수 없었기에 암묵적으로 연회홀의 정문을 향하던 그들은 이윽고 침음을 흘렸다.

“이게 무슨…….”

오색찬란한 빛을 하늘로 쏘아 올리는 마법등은 여전했다. 아름다운 선율이 부드럽게 흩날리는 커튼 너머로 새어 나와 제법 거리가 있는 이곳까지 도달해 귀를 간지럽혔다.

바이에르 공작이 날카롭게 중얼거렸다.

“혹시.”

공작이 브로치를 하나 떼어 허공을 향해 던졌다.

단련을 게을리하는 법 없는 기사의 손끝에서 화살처럼 쏘아져 날아가던 브로치는 어느 순간 투명한 벽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듯 부자연스럽게 아래로 뚝 추락했다.

제이가 얼굴을 구겼다.

“마법이군요.”

“그럴 수도 있겠지.”

무뚝뚝하게 중얼거린 바이에르 공작의 표정이 일변했다.

“황성을 빠져나가는 마차를 공격할 수도 있겠어.”

누군가의 가족이기만 할 수 없는 사람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를 악물고 있던 공작은 그 순간 포착한 낯선 인기척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제이는 그저 의아하게 눈썹을 움직일 뿐이었다. 부러 드러냈을 인기척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매복하고 있던 암살자들은 이쪽이 모두 제거하였으니 말입니다.”

“파커.”

그의 등장은 곧 이 자리에 칼릭스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군께서는 어디에…….’

파커는 동료의 기색을 읽었으나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행적을 모르기로는 마찬가지였다.

[모두 탈출하진 못했을 테지. 제이가 돌아올 테니 상황을 공유해.]

그 말은, 따라오지 말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니티 홀을 결계가 감싸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아니다. 파커는 주군이 향했던 방향을 문득 바라보았다.

그보다는 이곳을 지키고 있으라는 것처럼 들렸다는 쪽이 정확했다.

어느 순간, 바이에르 공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결계가 해제된 것 같네.”

* * *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 법.

나는 어쩔 수 없이 테오도르를 부축하며 이동했다.

“죄송합니다. 신세를 지는군요.”

“말로 퉁치지 말고 갚으면 돼.”

“예. 잊지 않겠습니다.”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보다는 본인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내 눈에는 별로 안 깊어 보여도 앉아서 서류만 보는 사람에게는 꽤 타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나는 속으로 ‘에휴에휴’하며 속도를 맞춰 걸었다.

“공녀님은…… 의외로 자상하시군요.”

“환자 질질 끌고 갈 정도로 힘이 좋진 않아서.”

네 놈의 미묘한 어조를 잊지 않고 있다.

“의외로 사람을 못 지나치시나 봅니다.”

“지금이라면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아.”

“예. 조용히 가지요.”

“의식이 가물거려서 이러는 거면, 나한테 질문하지 말고 네 이야기나 해 봐.”

“그럼 그럴까요?”

드문드문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그 말에 일부러 집중하며 자꾸만 고개를 드는 빌어먹을 기억을 외면했다.

그걸로도 소용이 없자, 애써 다른 생각을 해봤다.

‘로제타는 다른 영애들과 함께 뭉쳐 있을 테니 괜찮을 거고, 이리안은 로제타가 안 그런 척해도 좋아하니까 분명 챙겼겠지. 이리안보다 나를 먼저 만나서 그런가. 나를 더 좋아하는 척해 주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그리고 공작은…….’

리엔타 공작은 이보다 숱한 위기를 헤쳤을 테니 괜찮을 것이다. 애초에 나를 노린 함정이니 다른 위험 요소가 느닷없이 등장하진 않을 거다.

“……공녀님.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네 표정이 더 안 좋다고 하기에는 나도 내 얼굴 안 좋을 거 알아서 그냥 입 닫았다.

시선이 자꾸만 아래로 떨어졌다.

그래서, 테오도르보다도 늦게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저기,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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