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파악하셨습니까?”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은 적막했다.
혹여 상대에게 목소리가 들릴까 염려됐는지 테오도르는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자연히 상체가 조금 굽혀지자 자상을 입은 부위가 자극된 모양이다. 테오도르가 작게 신음하며 짧은 순간 내게 무게를 실었다.
그때 테오도르를 밀쳐내지 않은 것은 그가 환자라서 참은 게 아니다.
나는 상처 입은 누군가를 부축하는 일을 아주 싫어하게 돼서, 이미 매우 인내하고 있는 참이었다. 매몰차게 밀어내 테오도르가 바닥을 구른다면 같이 구르면 굴렀지 더 참을 생각은 없었다.
가만히 있던 건 그때 내가 그저, 어렴풋한 인영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를 만나게 되다니. 뜻밖이기도 했고,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한 것 같기도 했다. 야릇한 양가감정이었다.
“샤를리즈.”
내가 이 거리에서 알아봤듯 칼릭스도 마찬가지였다.
왜인지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어색하게 내린 시선 끝에 피가 말라붙은 손이 걸렸다.
‘아, 그랬지.’
오해하기 전에 테오도르의 검상은 내 소행이 아니라고 해명해야겠다. 그 생각 하나만 하고 고개를 들었을 뿐인데, 어느새 간격은 훨씬 좁혀져 있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칼릭스는 테오도르를 빼내 갔다.
“엘루이든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이 검상은 리엔타 공녀님이 아닌 다른 이가…….”
“알고 있어.”
말허리를 자르며 심상한 어조의 대답이 돌아오자 테오도르가 눈빛을 달리했다.
“자결하기 전, 포획하셨습니까?”
“바나첼 후작.”
칼릭스가 느슨하게 웃었다.
“나는 어떤 상황이었든 샤를리즈가 후작에게 해를 입히지 않았다고, 알고 있어.”
설령 내가 검으로 찌른 게 맞다고 해도 아니게 만들겠다는 의미의 대답이다.
또였다. 또 기분이 이상해졌다.
목울대를 크게 일렁……일 뻔하다가 속으로 이마를 빡빡 쳤다!
마찬가지로 내포된 뜻을 눈치챈 테오도르는 상황을 더는 수습하려 들지 않았다.
“여기서 더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 샤를리즈, 괜찮…….”
칼릭스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후작의 피인가?”
시선은 내 입술에 고정돼 있었다.
무심결에 아랫입술에 닿은 혀끝에서 비릿한 쇠 맛이 났다.
벽안이 짙어졌다.
당시의 상황을 덧그리듯 칼릭스가 내 아랫입술 밑을 엄지로 느리게 문질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라.’
심장이 크게 덜컹거렸다.
‘이, 이거 설마.’
눈이 마주쳐도 괜찮길래 지나갈 줄 알았더니?
‘……접촉해야 미래가 보인다고 거짓말친 걸 이렇게 돌려받나 봐…….’
얼떨결에 손을 뻗었다. 무언가를 기대한 동작은 아니고, 낭떠러지에서 추락하기 전 허우적거리는 본능적인 움직임에 가까웠다.
황성 정원사의 투철한 직업의식을 기대하며 눈을 감으려던 때.
놓치지 않고 마주 잡아 단단히 지탱하는 손이 있었다.
“왜 그러지? 어디가 좋지 않아?”
이대로 기절하나 싶었는데 멀쩡한데 말입니다. 어디가 안 좋긴 안 좋은 것 같아요.
“심장이…….”
“심장이?”
“너무 빨리 뜁니다.”
손을 척 내밀자 칼릭스가 팔딱팔딱 박동하는 지점에 엄지를 대었다. 손목 안쪽에 닿은 감촉이 유독 강렬했던 건 싸늘한 겨울바람 때문일 것이다.
“긴장한 줄 몰랐는데 긴장하고 있었나 봐요. 그게 좀 풀려서 그런 걸 수도 있겠습니다. 원래 친한 사람 보면 이완되니까요.”
‘……나, 무슨 말을 한 거냐.’
차라리 입 다물고 있을걸. 오랜만에 푹신하고 도톰한 그분을 영접하게 될 모양이었다.
“그것도 그 책에서 읽어서 알게 된 거야?”
놀리는 건가 싶어 힐끔 쳐다봤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내 맥박 점검에 집중하고 있던 칼릭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샤를리즈’의 인간관계 정말 다 들켰군, 들켰어.’
“아닙니다. 경험이에요.”
“경험.”
“예. 경험.”
또박또박 발음해 강조했다.
칼릭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데 긴장이라니, 설마 후작이 공녀에게 위해를 가했어?”
“아니요…….”
하마터면 내가 가할 뻔했을 뿐이다.
“그나저나 바나첼 후작을 어서 마차로 데려다주는 게 좋겠어요. 처치를 제대로 못 했거든요.”
드레스 겉감은 꼬질꼬질할 것 같아서 안감을 찢어 줬는데, 벌써 피가 진득하게 배어났다는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나는 왼팔. 칼릭스는 오른팔을 맡으면 되겠어.’
눈빛을 보내고 터덜터덜 걸어가던 때였다.
“부축이 필요한가, 후작?”
“괜찮습니다. 대공 전하,”
‘……뭐?’
배신감에 젖어 테오도르를 노려보다가 납득했다.
‘그래. 후작인데 친하지도 않은 대공에게 부축을 받긴 그렇겠지.’
잠시만. 나는 공녀인데?
내가 홀로 어떤 사투를 벌이고 있든 분위기는 평화로웠다.
“그래.”
단조롭게 대꾸한 칼릭스가 마치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밀었다. 나를 향해서였다.
“저는 괜찮은데요.”
“애석하게도 내가 괜찮지 않아서 말이야.”
‘혹시…… 사샤가 탈출에 실패했나?’
그렇다면 사람의 온기가 필요할 만했다. 나도 필요해졌다!
후다닥 잡은 내 손을 조금 늦게 마주 잡아 오는 손길이 자못 절박하기까지 해서, 나는 속으로 마구 ‘으아아아’ 내질렀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당장 묻고 싶었지만 테오도르가 있어 참는 수밖에 없었다.
참는 건 힘들진 않았다. 이미 많은 질문을 삼켰다.
‘황성의 정원 부지는 엄청나게 넓은데, 어떻게 만났지?’
테오도르 바나첼이 배에 구멍이 나 있을 줄은 몰랐으나, 내가 그를 만난 것 자체는 우연이 아니다. 칼릭스를 통해 본 길을 이번에는 내 발로 밟아 도착한 것이다.
그렇다. 미래의 조각에서 나는 기절한 채였다.
‘……방심하지 말자.’
묵묵히 자기반성을 하며 걷는 사이, 드디어 마차가 보였다.
‘어, 저기 있다.’
돌연 시야가 칼릭스로 가득 찼다.
조금 늦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벌써 오셨…… 허, 허억!”
마부가 놀라 숨을 들이켰다.
“입이 무겁고 오래 일한 자입니다. 말이 새어 나가지는 않을 겁니다.”
찰나의 침묵이 흐른 후, 테오도르가 다시 말했다.
“……말이 새어 나가더라도 제 선에서 수습할 테지만요. 폐를 끼쳤습니다. 차후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후작.”
단조로운 어조였다.
“곧 전문적인 처치를 받게 될 테니 그 천 조각은 필요 없겠지. 이미 축축해져 기능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어어?’
그래도 저것을 떼면 자칫하다 아문 곳도 다시 터질 터였다.
나는 의아해져 있다가 뒤늦게 알아챘다.
‘그렇구나!’
혹여 테오도르가 변심해 내가 저를 공격했다며 당시 함께 있었다는 증거물로 드레스 안감을 제출한다면 일이 복잡해질 것이다.
테오도르는 “으윽.”하는 짧은 신음을 흘리고는 천 조각을 건넸다. 나는 손만 뻗어 그것을 냉큼 받아들었다.
“샤를리즈의 호의를 부디 잊지 않기를 바라지.”
표정을 볼 수 없어서, 다른 때라면 저 말은 협박과 조언 둘 중 어떤 뉘앙스일지 헷갈린다고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칼릭스였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사람이다 보니 나는 그저 찔렸다.
‘……호의, 아닌데.’
세상을 좋게 보는 좋은 사람 옆에 있어서인지 내가 한층 못된 놈 같았다.
“명심하겠습니다.”
테오도르도 ‘호의’라는 단어에 황당했는지 대답이 아주 미묘하게 느렸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이만하면 마차가 멀어졌겠다 싶을 즈음.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서둘러 물었다.
“사샤에게 무슨 일이 있습니까?”
“무슨 일은 공녀에게 있었어.”
칼릭스의 벽안이 다시 나를 살폈다. 어디 한 지점을 짙게 바라보는 듯싶던 시선이 비껴갔다.
“아…….”
습관적인 손짓인 듯 크라바트를 정돈하려던 칼릭스가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반지를 안 빼겠다고 했고, 칼릭스는 황성을 안 오겠다고 했지.’
둘 다 안 지킨 셈이니 퉁치면 좋을 텐데.
칼릭스도 비슷한 순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내 왼손을 보고 있었다.
‘없습니다.’
편하게 보라며 슬쩍 위로 올리자, 칼릭스가 내 손끝을 잡았다.
“그리니티 홀 정문과 연회홀에 연결된 비밀 통로는 거리가 상당해. 잊혀진 통로라서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아 상대는 존재 자체를 몰랐을 테니 대가가 필요한 힘을 과용하진 않았을 거고.”
장갑을 벗은 맨 손가락이 내 손등에 조심스레 닿았다. 손끝의 감각으로 상처 여부를 신중하게 확인하며 그가 말을 이어갔다.
“무사히 빠져나왔을 테지. 은신한 암살자도 미리 제거해두었으니 어쩌면 벌써 저택에 도착했을 수도 있겠군.”
다행이라며 중얼거리자, 칼릭스가 눈꺼풀을 올렸다.
“그러니 공녀도 이만 저택으로 가는 게 좋겠어. 오늘은 유독 피곤한 하루였다고 생각하며 잠에 드는 거야.”
“저는―.”
그다음 순간이었다. 감미로운 현악기 소리가 불쑥 멎었다.
칼릭스도 이변을 눈치채고 그리니티 홀을 돌아봤다.
“결계가 풀렸나 봐요.”
시간이 지나 자연스레 해제됐을 가능성이 컸다. 테오도르랑 대화도 하고, 부축도 하고, 또 대화도 하고, 마차 타고 떠날 만큼 시간이 흘렀으니 말이다.
‘그러게. 생각해 보니 나 기절시켜 놓으라고 시간 엄청나게 넉넉하게 줬잖아?’
이렇게까지 나를 엿 먹이고 싶어 했다니. 나도 네게 조금만 엿 먹이고 만족하지 않겠다.
투지를 불태우며,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니 그리니티 홀 방향을 주시하고 있던 때였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눈매가 예리하게 좁혀졌다.
“그 피, 설마…….”
동시에 광폭하게 날뛰는 무언가가 속을 헤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