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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29) (129/232)

129화

상체가 저절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추락하기 전, 자세를 낮춘 칼릭스가 나를 받았다.

‘아―.’

단단한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신음조차 나오지 않는 고통에 입만 벌리는 게 고작이었다.

“샤를리즈, 깨물어.”

흐릿한 시야에 가지런한 손이 보였다.

침착한 목소리가 달래듯, 혹은 회유하듯 이어졌다.

“그러다 이가 다치겠어.”

‘왜지. 어째서…….’

이 감각을 알고 있다. 겪어 본 적 있기 때문이다.

‘흑마법이야.’

고통에 절어 의식이 가물가물해졌지만,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단순한 덕택이다.

그리니티 홀을 통제하던 흑마법이 사라졌다. 그리고 테오도르에게 걸려 있던 흑마법의 대가가 강해졌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하나는 동일한 흑마법사의 소행이라는 것이고, 남은 하나는.

‘운이 좋았어.’

테오도르로부터 답을 얻었던 당시, 힘이 둘로 분산되어 약해져 있던 거였다. 신성력으로 상쇄하지 못한 만큼 내상을 입어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했지만, 아직이었던 거다.

부스러기 같은 잔해만 남아 있을 그것은 이만큼 강력했다.

‘쉽지 않겠군.’

하지만 기필코 살아남고 말겠다.

“주군!”

저 멀리, 아스라이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를 끝으로 잡고 있던 줄이 툭 끊겼다.

나는 익숙한 심해로 잠겨 들었다.

* * *

여상한 얼굴이었으나 호흡을 확인하는 손끝이 떨렸다. 샤를리즈의 숨결은 얕고 느렸지만 분명했다.

힘없이 늘어진 몸을 칼릭스는 안아 들었다.

“먼저 탈출하고자 해 늦을 뿐, 곧 밀려 나올 겁니다. 어서 귀택하시는…….”

빠르게 말을 이어가던 제이가 멈칫했다. 칼릭스의 품에 안긴 채 아래로 축 늘어진 손이 피범벅이었다. 경악한 시선이 샤를리즈를 배회했다.

“귀택하시는. 그다음은?”

무감한 목소리로 칼릭스가 마치 샤를리즈를 감추듯 더 깊이 안았다.

서둘러 시선을 떼며 제이가 이어 말했다.

“귀택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바이에르 공작은 그리니티 홀에 있나?”

“함께 빠져나왔습니다. 바이에르 공자는 사샤 님과 함께 저택에 도착하셨을 테고, 공작은 결계가 해제되자 연회홀로 향했습니다.”

“그래.”

“마차로 안내하겠습니다.”

파커가 앞장섰다.

칼릭스는 순순히 따랐다. 제이는 가장 뒤에서 엄호했다.

하늘거리는 은색 머리카락은 깨끗했다.

‘그런데 손에는 피가 묻어 계셨어.’

게다가 연회홀 내부에 있으리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샤를리즈는 외부에서 나타났다.

‘결계가 펼쳐지기 전에 빠져나오셨을 테지. 침입자가 다소 늦게 행동을 개시했나.’

제이는 이내 생각을 털어냈다.

그가 지켜야 하는 인물은 현재 곁에 있었고, 상황 파악은 후일 해도 될 터다.

당장 중요한 일은 저택까지 모시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샤를리즈를 마차 안에 안전하게 눕히고, 칼릭스가 다시 지면에 발을 디뎠을 때 제이는 다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주군?”

“제이, 샤를리즈와 함께 돌아가도록 해.”

칼릭스가 느긋한 손길로 크라바트를 고쳐 맸다. 완벽하게 성장한 남자는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피가 말라붙은 손 때문인지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리엔타 공작 각하를 모셔야 해서 말이야. 샤를리즈는 부친과 사이가 좋으니 실은 많이 걱정하고 있을 테지.”

“하면, 황제가 주군께서 황성을 방문하셨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거론할 수 있게 될 터인데요.”

“괜찮아.”

칼릭스가 평연하게 대답했다.

“아우가 형님을 축하드리고자 방문했을 뿐인데, 그게 무엇이 이상하지?”

제이는 재차 만류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웃고 있는 벽안은 선연한 분노가 도사리고 있었다.

* * *

이 분위기를 형상화하자면 푸른빛의 실크라고 할 수 있겠다.

차가운 색감과 차가운 감촉의 공기를 가르는 것은 퍽 다감한 투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실패했다는 거로군요.”

안타깝다는 듯 흐려진 얼굴은 온유하였으나 그의 결단력을 알고 있다면 모골이 송연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자는 뻣뻣한 혀를 애써 움직여 답했다.

“엘루이든 대공이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고 황성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당분간은 각축전이 펼쳐질 테니 몇 번 더 시도할 수 있을 테지요.”

저 시도의 대상이 선황자가 아니라 공녀라는 점은 더는 의아하지 않았다.

[선황자는 신성력을 보유하였지요. 좌절과 고통, 애수가 가득해진다면 더 유용할 겁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간 샤를리즈 리엔타를 노리지 않았는지, 해결되지 않은 작은 의문은 외면했다.

그로서는 알 필요 없는 것이었다.

“공작. 두려워하지 마세요.”

자애로운 목소리가 홀리듯 이어졌다.

“저는 수십 년간 크게 실수한 적 없는 그대의 효용을 믿습니다. 그러니 그대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동분서주하고 있지 않겠어요?”

그의 말은 늘 신처럼 옳았다.

가문은 번성했고, 황제의 시선을 피해 힘을 키울 수 있었으며, 그의 딸은 언제든 황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이제 그것을 수송하는 일도 내게 맡겨 주신다면 더 좋을 텐데.’

[필리엄 백작은 두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작처럼 여식의 수완도 좋다는 건 알고 있지만, 황제와 너무도 긴밀하게 닿아 있으니까요. 안타깝지만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수밖에요.]

회임을 한 게 맞다면 황제를 제거하고 후사를 황위에 올릴 생각이었지만, 역시 거짓이었다.

방계 중 하나에서 적당히 아이를 데려올 계획일 터.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모자란 여식과 달리 저것 하나만 해결되면 끝이 아니다.

그리하여 리닉스 공작은 결심했다.

‘역시 폐위시켜야겠다.’

결연한 빛이 서린 공작의 눈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입매는 손으로 가려져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 * *

마차는 엘루이든 대공저의 정문을 부드럽게 통과했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지…….’

피는 샤를리즈의 손과 턱에만 묻어 있는 게 아니었다. 화장해 붉다고 생각한 입술에도 피가 번져 있었다.

깊은 상처 때문에 각혈한 거라면 칼릭스가 언질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다소 혼란스러운 기분이 되어 있던 제이는 마차가 정차하자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마치 휴식을 취하고자 눈을 감고 있었던 사람처럼 샤를리즈가 눈꺼풀을 올렸다.

‘……의식을 잃지 않으셨던 건가?’

의아함은 일단 묻어 두고 제이는 말했다.

“의식을 찾으셔서 다행입니다.”

“여긴 어디지?”

“대공저입니다. 방금 막 도착했는데, 적절한 때 눈을 뜨셨군요.”

의중을 떠보는 말투는 습관적인 것에 불과했다.

샤를리즈는 제이를 문득 응시했다. 건조한 시선은 금세 그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 순간 느낀 묘한 감회는 사라지지 않았다.

“사샤는?”

“사샤 님을 보필한 진에게서 연락이 없었으니, 무사히 도착하셨을 겁니다.”

대공이나 리엔타 공작의 행방을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샤를리즈는 의외로 더는 묻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마른침을 삼키며 제이는 뒤늦게 마차에서 내렸다.

샤를리즈는 벌써 저 멀리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어쩐지 오늘은 의문의 연속이었다.

미리 기별하지 않았다고 해도 대문을 통과했다는 소식은 전해졌을 텐데 당장 달려와 샤를리즈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작은 인영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설마 변고가 있으신 건가.’

굳은 얼굴로 서둘러 현관에 다다라 묻자, 사용인이 대꾸했다.

“사샤 님께서는 무사히 도착하셨습니다. 피곤하셨는지 일찍 잠자리에 드셔서, 공녀님께서 곧 도착하신다고 알리지 않았습니다.”

두 명 모두 저택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제이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말에 올라탔다. 도착지는 당연히 황성이었다.

* * *

아주 오래전에 이상한 꿈을 꾼 적이 있다.

「고귀한 영애님이 너를 아끼는 것, 이상하지 않았어?」

누군가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약한 지점을 가차 없이 파고들었던 그것은 다시 살아나 이번에도 속을 마구 헤집었다.

「또 너를 버리고 갔어, 그렇지?」

‘아니야.’

「짐 덩어리처럼 다른 사람에게 맡긴 거잖아.」

‘틀렸어. 샤를 님은 안 그러셔. 샤를 님은 돌아오실 거야.’

「그렇겠지. 그녀는 너를 챙겨 줄 여유가 있으니까. 그런데 만약 네가 선황자가 아니고, 그녀가 공녀가 아니라면. 가문이 당장 망해 거리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게 된다면.」

「그때도 돌아올까?」

‘샤를 님은……, 샤를 님은. 헤어질 때 나를 걱정해 주셨어. 다정한 말을 해 주셨고, 그리고…….’

「원래 버릴 때는 다 그래. 그래야 바로 따라오지 않을 테니까.」

「멍청이.」

“읏.”

시야가 뿌옇게 흐렸다.

허겁지겁 숨을 몰아쉬던 아이는 눈에 고인 눈물을 묵묵하게 훔쳤다.

멍하니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다가, 허둥지둥 일어났다.

‘엄청 어두웠는데, 샤를 님은 아직 거기 계시는 걸까.’

사용인에게 물을 생각으로 방을 빠져나와 사샤는 복도를 달렸다.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에서 다리가 풀썩 꺾이고 닥쳐올 고통을 예상하며 눈을 꼭 감은 순간.

몸이 예고 없이 위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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