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30) (130/232)

130화

사샤는 놀라지 않았다. 낯선 향기 속에서, 절대로 잊을 수 없을 익숙한 온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샤를 님…….”

“그래. 여기 있어.”

촉촉하게 젖은 은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적막한 복도를 가로지르는 걸음 소리는 규칙적이었다.

마구잡이로 두근거리던 작은 심장도 점차 안정적인 박자를 되찾았다.

“자다 일어났어?”

“티, 티 나요?”

혹시 얼굴에 베개 자국이라도 난 걸까. 아니면 머리카락이 엉망진창인지도 몰랐다. 언제 울적했냐는 듯 사샤는 다급하게 양손을 움직였다.

샤를리즈가 낮게 웃었다.

드문 소리에 사샤는 엉거주춤 고개를 들었다. 소리 내어 웃은 적 없다는 것처럼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분명 들었다.

“열은 아닌 것 같은데, 몸이 따끈해서.”

“……샤를 님은 차가워요.”

사샤는 언제고 늘 익숙하고 싶은 품에 더 깊이 기대었다.

“이제 덜 추울 거예요. 그때마다 제가 이렇게 해 드릴게요.”

샤를리즈의 곁에 있으니 알겠다.

꿈속의 목소리가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람은 불행해지면 원래 중요하지 않은 것의 무게가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랬다.

그래서, 틀렸다.

‘샤를 님한테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야.’

소중하게 간직한 기억은 아직도 따뜻했다.

그 목소리가 한 말처럼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때 샤를리즈는 사샤가 실은 아주아주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었다.

더는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지 않아도 됐다.

“샤를 님.”

“응.”

아주 작은 중얼거림도 놓치지 않고 대답해 주는 사람이 있다.

“있잖아요, 샤를 님.”

“나도 사샤를 좋아해.”

놀라 동그랗게 뜨인 눈이 예쁘게 접혔다. 사샤는 행복하게 웃었다.

“저도요. 저도 좋아해요.”

“맞아. 우리는…….”

샤를리즈가 고개를 숙여 아이의 머리에 제 이마를 대었다.

“아주 예전에도 그랬어.”

* * *

[진심인가요?]

[어차피 제게 바랄 만한 거라고는 이런 것 아니었습니까?]

샤를리즈가 날카롭게 입술을 비틀었다.

[알아서 죽을 테다가 동기도 적당하니 선황자를 제거하기 적격이잖아요.]

[이유가 납득가지 않아서 그래요. 이렇게까지 튜베롯을 훼손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상대방의 이목구비는 마치 누군가가 마구잡이로 색칠한 듯 보이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마주 앉은 사람이 그저 지루하게 눈을 굴리고나 있기 때문이다.

[알면 대답이 달라집니까?]

[그건 아니지요.]

그리고 장면이 전환됐다.

[가, 감사합니다. 공녀님.]

[이거, 답례예요. 골무인데요, 책을 많이 읽으신다고 들었어요. 제가 써봤는데 되게 좋아요.]

[안녕하세요. 공녀님. 우, 우, 우, 우연. 이. 네요.]

우연을 계획해 두어 번 손을 내밀었을 뿐인데.

아이는 금세 경계를 풀었다. 어쩌면 원래 그러고 싶었던 것처럼.

충분히 사랑받고 있을 텐데도 사랑받아 본 적 없는 길 위의 어린 짐승처럼 구는 아이가 우스웠고, 멍청했고…….

[공녀님. 무슨 생각을 해요?]

[너를 다시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

고개를 갸웃한 아이가 맑게 웃었다.

[그럼 우리 내일도 또 만나요.]

튜베롯 군락은 이미 모두 불탔다.

협의를 마친 날. 교황이 손을 쓴 것이다.

샤를리즈는 고요히 눈을 깜빡였다.

……대답하지 않았다.

* * *

나는 잠이 든 사샤의 곁을 지켰다.

교황이든 아니면 일개 공녀가 교황을 접견할 수 없어 대신 만난 신관이든. 아무튼 남자는 몰랐던 이유를 난 알고 있다.

제도 귀족들에게 그녀의 선택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다. 짐작은 할 수 있어도 확신하지는 않을 수 있도록. ‘리엔타’ 공녀가 그렇게까지 불명예스러운 선택은 하지 않았다고.

‘바보.’

저 시간 속의 샤를리즈는 과연 사샤를 제거했을까.

“…….”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켜 대공저를 빠져나갔다.

나를 빼돌리기 위해 칼릭스가 감수해야 하는 위험 부담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 *

황제의 침전은 소란스러웠다.

“누가. 감히 누가!”

발길 닿는 대로 쾅쾅 걷던 안토니오 황제가 불현듯 멈춰 섰다. 기묘한 깨달음이 번진 얼굴이 일그러졌다.

“……칼릭스로구나.”

줄곧 푹신한 소파에 앉아 엄지를 잘근거리고 있던 카타리나 황후는 비소를 삼켰다.

안토니오 황제의 생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두고 보겠다는 듯, 그녀는 적당한 말을 던졌다.

“엘루이든 대공이요?”

“그래. 틀림없소! 어쩐지 순순히 승낙하는 것이 수상하다 싶었는데.”

“그건 저번 겨울 사냥제에서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힌 적이 있으니 그런 것이 아닐까요?”

안토니오가 주먹을 거세게 쥐었다.

“그래. 조사를 자청했었지.”

칼릭스는 황제의 친자. 제국법에서의 직계 황족에 속한다.

법이 본인을 속박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조사를 자청한 행태는, 생각해 보면 그를 조롱하려는 것 같았다.

“결국 대공 역시 그 사건에 주요한 인물이 되어 일을 키우지 못했으니까요.”

때마침 들려온 황후의 말이 그 추측에 힘을 실었다.

샤를리즈 리엔타에게 뒤집어씌우고 면책권을 회수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하필 칼릭스가 끼어들었다.

결국 시도도 못 하고 중단하게 되었지만. 만약 중단하지 않고 그대로 끌고 갔더라면 얼추 예상되는 것이 있었다.

‘제 기억과 다른 이들의 기억이 이리도 다르다니,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겠군요.’

한쪽 눈매를 슬쩍 구기며 퍽 진중하게 말했을 것이다. 속으로는 그를 비웃으면서 겉으로는 전혀 그러지 않는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웃을 것이다.

저 당시에 칼릭스가 했던 선택을 비웃으며 저것을 빌미로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해 고조되었던 기분이 급속도로 하강했다.

“나를, 내게 감히 겁을 주고자 한 것이야! 내가 움츠러들 줄 알고!”

‘이쯤 해야겠네.’

여기서 조금 더 자극했다가는 저 사내는 저보다 뛰어난 동생을 향한 열등감과 질투심에 사로잡혀 무작정 치려고 들 것이었다.

‘그러면 안 되지.’

손해가 막심할 터.

성공한다고 쳐도, 갑자기 몰락한 거대 가문의 부스러기라도 핥아먹기 위해 혈안이 될 가문들은 얼마나 많을는지.

카타리나는 들개처럼 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선황자만 제거하고, 그 이후로는 대공가 내부에 심은 세작으로 차근차근 집어삼켜야 해.’

그 세작이란 것은 샤를리즈 리엔타였다.

카타리나는 이 일의 기간을 십오 년으로 잡았다. 샤를리즈가 조금만 더 영리했더라면 소요 시간이 줄었겠다만, 별수 없이 시간만이 만들어가는 신뢰를 기다리는 수밖에.

자못 아깝게 됐다는 듯 손바닥에 볼을 괴는 동작은, 그랬기에 더없이 자연스러웠다.

한숨을 폭 내쉰 카타리나가 이를 악물었다.

‘뱃속에 황손이 없음을 확인했어. 나를 노리고 있나.’

황제의 추측 중 절반은 맞아떨어졌다. 목적이 겁주기라는 것.

그렇다면 이쪽도 가만히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때였다.

“폐하!”

안토니오 황제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무엇인가!”

“엘루이든 대공가의 마차가 추가로 도착했습니다.”

“뭐?”

문 안쪽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황제가 복도로 나왔다.

“통과도 아니고 도착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저, 저도 그것은…….”

“비켜라!”

흉흉한 기세에 시종은 서둘러 비켜섰다.

* * *

그리니티 홀을 가장 늦게 빠져나온 사람은 공교롭게도 개중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다.

그 과정에서는 참으로 많은 시선들이 교차했다.

불이 켜지고, 소란은 커졌다.

그러나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런 피해도 없었음을 깨닫자 내부의 귀족들은 정신을 되찾았다.

무작정 밖으로 빠져나간 귀족들도 여전히 넋이 나간 소수를 제외하고선 서둘러 연회홀로 돌아오고 있을 터였다.

리엔타 공작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변고가 있는 것도 아니니, 심문은 필요 없을 것 같네만.”

공작의 시선은 기사단장, 일리든 포르테를 향해 있었다.

일리든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연회홀과 연결된 통로를 지키고 있다가 황제 일가를 황제궁까지 보필하고 다시 돌아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멀끔한 낯이었다.

“조속히 귀가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십니다.”

“나는 마저 해야 할 일이 있을 듯하니 다들 가 보시게.”

‘정말 그래도 될까요?’

‘글쎄요……. 그나저나 저는 무서워서 얼른 나가고 싶어요!’

‘리엔타 공작 각하께서 이참에 무언가를 확인해 보려고 하시는 것 아니겠나?’

‘무엇을? 그 이전에, 파벌을 만들지 않는 분 아니신가.’

아무리 황제가 조속한 귀가를 말했다고는 하나, 첫 번째로 문을 나서기는 부담되지 않을 수 없었다.

끝내 어느 말단 귀족이 하얗게 질린 낯으로 걸음을 뗀 순간이었다.

큰 키와 미려한 생김새. 한 번 시선이 향하면 쉽게 떼기 힘든 분위기의 남자는 그들과 유리된 듯 그저 느긋했다.

외부 활동을 활발히 하지 않으나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가 문득 묘하게 웃었다.

“내가 많이 늦었습니까?”

숨통을 틀어막고 있는지도 몰랐던 줄에서 풀려난 것처럼 연회홀에 뒤늦게 파문이 번졌다.

“……엘루이든 대공 전하?”

전혀 예상도 못 한 사람의 등장에, 누군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벨리악 리엔타의 눈매 역시 의아하게 가늘어졌다.

‘선황자는 이미 빼돌리지 않았던가.’

비단 아이 혼자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기사 둘과 바이에르 공작도 함께였지만, 공작은 황족을 보존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으니 이상하지 않지.’

굳이 엘루이든 대공이 황제의 명을 거스르고 나타나 대안을 마련해 줄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벨리악은 이 소란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샤를리즈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면책권을 회수하기 위해서라면, 황제는 이 일의 주모자를 샤를리즈로 꾸미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예측불허로 움직이는 아이이니 이 면책권은 언제고 반드시 필요한 순간이 올 터. 이리도 허망하게 소진시킬 수 없었다.

‘마침 일리든 포르테가 있으니 은밀하게 샤를리즈를 수색…….’

벨리악의 울대가 거칠게 움직인 것은, 완벽하게 성장한 남자가 겉옷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도 뇌리를 스친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