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혹시, 엘루이든 대공이 샤를을 이미 만났나.’
샤를리즈에게 건네 겉옷이 없다는 쪽이 그럴듯했다.
벨리악의 표정이 일순 풀렸다.
대공이 좌중의 시선을 잡는 동안 샤를리즈가 은밀하게 들어올지도 모른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걱정이 밀려왔다.
‘세 번째 테라스만 피하거라, 샤르을.’
그곳에 괴한 셋을 제압해 두었다. 무슨 영문인지 둘은 이미 쓰러져 있어 실질적으로는 하나였지만 말이다.
‘흉한 것 보면 많이 놀랄 터인데.’
울멍울멍하게 생각한 공작은 이내 다시 의아해졌다.
‘……바이에르 공?’
연이어 들어온 사람 때문이었다.
‘엘루이든 대공저가 황성과 가깝다고는 해도 시간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바이에르 공작이 선황자를 끝까지 보필하지 않았다는 뜻.’
외부는 위협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바이에르 공은 이것을 공교로운 헤프닝이라고 여긴 것인가.’
연회홀 내부는 잠입한 괴한이 셋이나 됐다. 비록 모두 무기가 없었지만.
“…….”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상황 속에서 상식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한 가지를 깨달은 리엔타 공작의 눈매가 굳었다.
‘협상을 위한 납치인가.’
당장 뛰쳐 나가 소리 높여 샤를리즈를 찾고 싶었으나, 만약 샤를리즈가 대공과 먼저 접선하여 말을 맞췄다면 일을 망치는 셈이 된다.
공작은 칼릭스의 의중을 알아보기 위해 그를 필사적으로 탐색했다.
그사이, 일리든 포르테로부터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 들은 칼릭스가 우미한 눈매를 구겼다.
“저런. 황후 폐하께서는 안전하게 대피하셨습니까?”
“예. 대공 전하.”
“다행이네요. 다른 피해는 없습니까?”
그 질문에는 당시 현장에 없던 일리든 대신 다른 기사가 대답했다.
“안녕하십니까. 대공 전하. 1기사단 소속 기사 제프리 엔터입니다. 사상자는 전무하며, 단순한 사고로 추정되어 황제 폐하께옵서 심문을 생략한 귀가를 허가하셨습니다.”
“음.”
조금 의아하다는 듯 칼릭스가 목을 울렸다.
엘루이든 대공의 등장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귀족들이 반응했다.
‘사고가 아닌 건가?’
‘선황자 전하께서도 자리를 피하셨네.’
‘바이에르 공작 각하도 마찬가지고 말일세.’
‘잠시만. 그러고 보니, 리엔타 공녀도 보이지 않네.’
‘뭐어, 대공가 기사들이 그렇게 따라붙었으니 안전한 장소로 대피한 것 아니겠나?’
‘과연 그렇겠군.’
‘그나저나 사고가 아니라면 누가…….’
“혹, 다른 문제가 있으십니까?”
때마침 제프리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오는 길에 은신해 있던 암살자 몇을 발견했거든.”
“예?”
“다급히 도착해 보니 마차 대기소의 바닥에 피가 흩뿌려져 있더군.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위도 어둡고, 흙바닥이었다 보니 내가 착각했던 모양이지.”
“출혈량을 확인하고 오게.”
일리든의 명에 기사 둘이 뛰어나갔다.
상황을 관전하고만 있던 리엔타 공작이 나선 것은 그때였다.
‘엘루이든 대공은 지금 일을 키우고 있다.’
대공 역시 황제의 속내를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단순한 사고로 일축한다면 후일 황제가 어떤 근거를 만들어 낼지 모르니, 공녀라고는 한들 귀족 영애에 불과한 위치로 할 수 없다고 모두가 납득할 만큼 부풀리는 것이었다.
“흉기를 지참하지 않은 채라 우선은 1기사단장에게만 알릴 생각이었으나, 대공 전하의 말씀을 들으니 그럴 만한 사안이 아닌 것 같군.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 셋이 어둠을 틈타 연회홀로 침투했었네.”
경악한 소리들이 짧게 울렸다.
“생포하셨습니까?”
“하나는 숨이 붙어 있어.”
시선이 일시에 한 곳으로 향했다.
커튼을 툭 치고 나오는 얼굴이 태연했다.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린 샤를리즈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왜 그런 얼굴들이지? 내가 때려눕힌 거 아니야.”
삐뚜름히 웃는 얼굴에서는 어떤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짙은 안도로 떨리는 호흡을 감추기 위해 이를 악문 리엔타 공작의 하관에 턱 근육이 불거졌다.
* * *
‘죽겠다.’
이 허약한 몸뚱이로 마구 달렸더니 머리가 어질거리는 느낌이다.
조금 전의 꿈을 통해 본 비밀 통로는 말을 타고 움직일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중간에 헤어진 영리한 말은 지금쯤 대공저에 도착해 있을 터다.
이렇게 관심을 끌며 등장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슬쩍 연회홀 정문을 통해 있는 듯 없는 듯 들어와 섞이고 싶었는데, 그럼 문제가 있다.
‘일단 내부 상황을 엿들을 수가 없어.’
다행히 그리니티 홀과 연결된 비밀 통로를 통해 빠져나온 진은 곧바로 마차로 이동했다고 한다.
‘진이 황성을 빠져나갔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야.’
그래서 테라스에 진과 함께 숨어 있던 척 말을 맞추기로 한 것이다.
‘인기척도 인기척인데 영 이상해서 이 테라스로 와 봤더니.’
둘이 아니라 셋이었다. 목덜미를 괜히 한번 손으로 쓸어 보며 허공을 째려봤다.
“공녀님.”
내가 가리킨 곳을 확인하고자 다가오는 일리든의 눈이 걱정으로 흐렸다.
“괜찮으십니까?”
“보다시피.”
“다행입니다.”
작게 소곤거려 짧은 대화를 마친 후, 내부를 확인한 일리든이 손짓해 기사들을 불렀다.
칼릭스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기사들과 함께 괴한을 쳐다보고 있는데, 공작이 나를 불렀다.
“샤를리즈.”
“아버지.”
‘어, 리반이다.’
리반은 리엔타 공작 곁에 딱 붙어 있었다. 잘했다는 뜻으로 눈썹을 씰룩이자, 그는 고개를 휙 돌렸다.
‘어엇.’
―가 다시 돌려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고는 한숨을 폭 쉬었다.
‘다행입니다.’
그렇게 입 모양으로 작게 중얼거리고는 말이다.
멋쩍은 기분이 되어 볼을 매만지다가, 나는 정신을 차렸다.
‘우리의 유대감, 믿습니까?’
“샤를. 춥지는 않았느냐?”
“예. 괜찮았습니다. 진 경이 겉옷을 빌려주어 입고 있기도 해서 말입니다.”
“그래도 추웠을 터인데, 어서 들어오지 그랬느냐.”
‘믿습니다!’
“소리만 지르기 바쁜 사람들 사이에서, 아버지께서 친히 생포하신 놈들이 도망칠까 봐 염려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샤를…….”
공작의 눈은―.
몹시도 메말라 있었다!
‘다행인데?’
혹시 촉촉해져 있다가 주룩 눈물이 흐르면 가뜩이나 없는 위엄 더 사라질까 봐 걱정이었는데, 모쪼록 잘 되기는 했는데 말입니다…….
얼떨떨한 와중이었다.
“그래서 저들을 감시하고 있으라고 진은 떼어두어 홀로 있던 거였군.”
칼릭스가 비스듬히 웃었다.
“그…….”
1옥타브는 높아진 것 같았던 외마디를 끝으로 숨을 고른 공작이 다시 입을 뗐다.
“그렇게까지 염려하진 않아도 됐는데 말이다. 나는 샤를 네가 위험한 상황이 되는 것이 더 싫구나.”
“장인어른의 말씀에 나도 동의해, 샤를리즈.”
다행인 것은 리엔타 공작이 귀족들을 등지고 있었다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공작의 얼굴이 충격에 휩싸였다.
“샤, 샤를.”
미약하게 중얼거린 공작이 크게 휘청했다. 다급히 공작을 부축하며 나는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아버지께서 저놈들을 생포하시느라 얼마나 고되셨으면…….”
속으로 ‘미안합니다.’하고 되뇌며 죄 없는 귀족들을 노려보았다. 재밌는 광경을 관람하듯 흥미진진한 낯을 하고 있던 그들이 흠칫했다.
그런데 일리든의 명을 받아 나갔다가 허겁지겁 들어오던 기사 둘도 왜 흠칫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간이 되게 작나?’
리엔타의 사람들도 되게 쪼끄만데. 어쩐지 그리운 기분이 되어 얼떨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순간.
허리를 뻣뻣하게 세운 채 기사가 빠릿하게 외쳤다.
“대공 전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혈흔이 확실합니다. 부상이 꽤나 깊었던 듯 양도 상당했습니다.”
‘……어.’
그것을 별것 아닌 자상이라고 치부했던 나는 테오도르 바나첼에게 미안함을 표하는 시간을 잠시 가졌다.
일리든이 질문했다.
“공녀님. 공녀님께서도 외부에 계셨다니 혹 목격하신 사항이 있으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정해둔 것은 황성에 다시 돌아오기도 전이다. 미래의 조각을 통해 읽었던 길을 걸었던 때였다.
그런데 지금 그 시간 속의 샤를리즈가 불현듯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우연처럼 시선이 마주칠 수 있었던 것은, 실은 그가 나를 줄곧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임을 알았다.
칼릭스가 입술을 달싹인, 그 순간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목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 안토니오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귀족들이 예를 차리려고 했으나, 황제는 손을 들어 올려 막았다. 권위 의식이 대단한 사람의 뜻밖의 선택에 불길한 기류가 감돌았다.
안토니오 황제가 짓씹듯 말했다.
“대공. 짐이 분명 말하지 않았던가. 한데, 어째서 여기 있지?”
“아우로서 형님께 축하 말씀 하나 드리지 않는다니 마음이 쓰이더군요.”
“그래서 황명을 무시했다?”
“황명이었던가요?”
칼릭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엷게 웃었다. 그러나 나는 푸른 눈동자에 화염처럼 번진 선명한 감정을 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