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감히 그 누구도 크게 숨 쉬지 못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저 제 가문에 불티가 튀지 않기만을 바라며 숨죽이고 있는 수많은 이들 사이로 허겁지겁 뛰어오는 시종은, 그랬기에 눈에 띄었다.
“황제 폐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안토니오 황제는 마뜩잖다는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시종을 노려보다 귀를 기울였다.
‘엄청 긴 인사도 생략할 만큼 중요한 말이 뭘까.’
최대한 기감을 끌어 올려 훔쳐 들으려다가 지금 나한테 그런 좋은 기술은 없단 걸 깨달았다…….
별수 없이 황제라도 슬쩍 주시했는데, 의외로 이쪽에서 수확이 있었다.
‘눈빛이 이상해.’
직전까지 잔뜩 차올라 넘실거리던 분노는 씻은 듯 사라지고 돌연 침착해진 것이다.
“어서 가봐야겠군. 그대들도 이만 귀택하게. 그리고 포르테 경, 자세한 이야기는 명일 정리해 보고하도록.”
부들부들 떨며 뺨이라도 올려붙일 기세던 황제는 한순간 여유로운 연장자가 됐다.
갑자기 이성적으로 변한 것도 모자라 칼릭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축하 인사를 그리도 하고 싶었더냐? 말보다는 앞으로 행동으로 보여 주기를 기대해 보마. 이 아이도 네 조카이니 말이다.”
‘왜 갑자기 인자한 형님인 척하고 있는 겁니까.’
저 말 뒤에 ‘원, 녀석도 참.’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해괴한 투였다.
알고 있어 의심할 수 있었다.
‘갑작스럽고도 수상한 이 변화. 황후가 손을 미리 써 두었나?’
정황상 특정 단어를 듣게 하면 제어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한 번뿐인지 여러 번 가능한지는 알 수 없어도, 이 추측이 맞다면 과연 ‘피를 타고 이어진다’고 표현할 법한 대단한 수완이었다.
이쯤에서 ‘그럼 황후는 왜 그렇게 죽었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려 봐야 하겠다만, 원작으로 추정되는 게 두 개나 됐다.
‘헷갈리네.’
혹시 헷갈리라고 두 개인 거 아니야?
이마를 빡 구기다 정신 차려 보니 리엔타 공작의 손에 꼭 잡힌 채 공작을 쫄쫄 따라다니고 있었다.
“하나는 자결해 있었고, 하나는 기절, 하나는 생포했네. 모두 무기는 없었어.”
오늘 할당량은 이미 채우고도 남았겠다, 걷는 게 다소 귀찮았지만 아버지 속 썩인 걸 알기에 순순히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그사이 칼릭스는 귀택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살펴 가십시오, 리엔타 공작 각하. 리엔타 공녀님께서도 모쪼록 조심히 귀가하시기를 바랍니다.”
텅 빈 연회홀을 빠져나와 마찬가지로 인적 없는 길이 이어졌지만 이동하는 내내 적막했다.
‘마차 안에서 물어보려고 그러시나.’
황성 안에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기는 하지. 속으로 이런저런 답변을 준비하다가 슬쩍 곁눈으로 공작을 쳐다봤다.
……공작의 어깨는 폭삭 내려가 있었다.
“샤를. 이제 반대하지 않겠다.”
“예?”
“으, 응원하겠다.”
“예?”
“그날에 이 아비도 불러 줄 거지……?”
“예?”
힐끔 원망스럽다는 듯 나를 쳐다본 공작이 다시 생기를 잃고 말했다.
“결혼식 날 말이다……. 아주 먼 날이기를 바랐지만, 그래도 준비한 축사가 있다. 부족할까 봐 걱정은 했어도 참석도 못 하리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
“예?”
이번 ‘예?’는 남달리 길어서인지, 공작은 이제야 의아함을 느낀 눈치였다.
“대공 전하와 결혼하지 않는 게냐?”
“……인생사는 알 수 없는지라…….”
“됐다.”
늘 비슷한 내 대답에 공작도 익숙하게 대꾸했다.
“그럼 혹시 샤를 너는 결혼 생각이 아직 없는데 전하는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게냐?”
‘아버지. 지난 세월을 떠올려보십시오. 그렇겠습니까?!’ 하고 입을 떡 벌리며 되묻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나는 침묵했다.
칼릭스가 그, 그런 단어를 굳이 소리 내어 말한 이유가 있을 테다.
침묵을 긍정이라고 여겼던지 공작은 조금 안도한 기색이었다.
“그래. 그런 게로구나. 흠흠.”
공작의 어깨는 다시 평평해졌다.
‘오늘 불 꺼졌고, 리반이랑 손잡았고, 괴한도 잡았고…….’
저런. 공작은 벌써 세 번이나 세차게 놀랐다. 땅에 떨어진 음식도 3초 안에 주워 먹는데, 토끼 같은 아버지를 네 번 놀라게 하려니 마음이 불편했다.
‘공작비를 왜 불렀는지 알아 두긴 해야 하는데.’
교황은 의식 불명이 아니라 눈만 감고 있는 거였다. 공작을 만난 김에 해치우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으니 내일 아침 식사를 함께하고 물어볼 계획이었다.
공작저에서 자정 종소리가 울리기를 대기하다가 공작의 어깨를 붙들고 묻고 싶다만, 두고 온 사샤가 눈에 밟혔다.
‘리엔타 공작저 가는 길에 대공저가 있으니 대문 앞에 내려달라고 부탁드려 봐야겠다.’
수련에 가까운 운동을 할 것을 생각하니 기운이 쪽 빠졌다.
터덜터덜 도착한 곳에서 나는 뜻밖의 것을 발견했다.
눈을 깜빡여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나한테 화난 것 아니었나?’
“샤를, 무엇을 보, 아아.”
공작은 무언가 두려운 사람처럼 후다닥 마차에 올랐다.
“샤를. 대공저로 가느냐?”
“그래야죠.”
공작이 마차 창문만 빼꼼 열어 애달프게 손을 뻗었다. 엉겁결에 그것을 꼭 잡으니 공작의 눈이―.
‘또 속지 않겠, 어어.’
―촉촉했다…….
“조심해서 가거라.”
“예에. 아버지도 조심해서 가세요.”
“그래…….”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마차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어쩐지 휙 지나가 버린 마차 꽁무니를 쫓으며 묘한 감회에 젖어 있던 순간이었다.
“공녀님.”
피곤에 절은 연약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리, ……반.”
실로 휴식 시간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 다운 눈이었다…….
터덜터덜 걸어가면 형형한 눈빛에 꿰뚫릴 것만 같아 찔끔 눈물을 훔치며 속도를 내 달렸다.
보람도 없이 리반은 마차 안에 쏙 들어간 뒤였다.
“샤를리즈. 손을 잡아.”
엉겁결에 손을 얹었다.
빈틈없이 착용하고 있던 장갑이 벗겨진 커다란 손은 따뜻했다.
그제야 내가 맨손임을 깨달았다. 장갑을 챙겨 올 정신도 없이 달려왔더니 이 꼴이었다.
머쓱한 기분은 금세 사라지고 핼쑥해졌다.
‘어어.’
길고 가지런한 손에 내 잇자국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신성력 닿으면 금세 사라지겠지?’
레아에게 시도해 보았을 때처럼 무참히 실패할 수도 있지만 성공하면 피로 회복까지 가능할 테니 밑져야 본전이다.
손끝에 힘을 조금 실었다.
‘……이게 되네.’
뜨거운 물에 담근 것처럼 손끝이 뜨끈해졌다. 다행이라고 되뇌며 흰자로 확인한 칼릭스는 이전과 같이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다.
조용히 구석에 처박혔다.
돌아가는 마차 안은 고요했다.
리반은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고, 나는 분명 넉넉한 내부에도 왜인지 끼여 가는 느낌을 받는 중이었으며, 칼릭스는 눈을 감았다.
그저 눈꺼풀만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수마에 잠긴 것 같기도 했다.
칼릭스의 눈매가 설핏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마치 아픈 기억 속에 있듯이.
* * *
마차는 금세 대공저에 도착했다.
리반은 쏜살같이 내려 금세 사라졌다.
‘리반, 책상에만 앉아 있는 허약한 일꾼 아니었어?’
리반은 아무래도 가장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일을 아직 찾지 못한 것 같다.
얼떨떨하게 생각하던 나는 끼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흠.”
표정이 온화했다면 마차가 편한가 보다 하고 나도 잽싸게 튀었을 텐데 미간이 좁혀진 채였다.
‘저러다 주름이 금방 생기면 어떡하지.’
내가 전전긍긍하는 이유가 있다. 저 본판은 주름으로 훼손될 얼굴이 아니다. 예민미가 더해져 색다른 매력이 될 게 분명했다.
‘성격 나쁜 미남, 내 취향이라서 위험한데.’
금세 끝나도 새로운 매력을 보면 또 사랑에 빠질지도 몰랐다.
나는 미래의 나를 구하는 심정으로 칼릭스의 어깨에 검지를 얹었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원작 버전은 비록 두 개지만 아무튼 어디서고 남자 주인공인 사람이었다. 타인의 손끝만 닿아도 번쩍 눈을 뜨며 쳐낼 것 같았는데, 눈꺼풀은 미동 없이 잠잠했다.
“엘루이든 대공 전하.”
어깨를 어설프게 살살 흔들자 칼릭스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이어진 한 단어 같았던 그것은, 귀에 닿기 전 바람 소리처럼 흩어져 알 수 없었다.
깨우는 것은 포기하고 덩치 좋은 하인을 불러올 생각으로 상체를 뒤로 빼려던 때였다.
불현듯 눈꺼풀이 올라갔다.
하나의 세계가 완전히 사그라들기 전, 그 찰나를 목격한 듯했다. 손을 뻗으면 금세라도 잡을 수 있을 듯한 기묘한 위화감이 파도처럼 덮쳐왔다.
묘하게 달뜬 듯했던 벽안은 눈꺼풀에 다시 한번 가려졌다 드러나는 것만으로 완벽하게 갈무리되었지만, 순간은 뇌리에 선명히 남았다.
“샤를리즈?”
말소리의 형체가 느껴질 만큼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눈을 한 번 깜빡인 직후, 나는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이상해. 이상했어!’
저는 전하가 잠든 틈을 노려 ‘입’으로 시작해 ‘맞’을 지나 ‘춤’으로 끝나는 그것을 절대 훔쳐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이래서 사람은 원래 행실을 제대로 하고 살아야 하나 보다.
마차 벽과 혼연일체가 될 기세인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칼릭스는 시선을 돌렸다.
“도착했나 보군.”
“예. 그래서 제가 전하를 깨우려고 했는데요.”
“응. 고마워.”
“네. 그래서 흔들려고 가까이 갔는데요.”
“샤를리즈. 내리자.”
“예. 그래서 같이 내리려고 그랬던 거였는데요.”
“응.”
바람이 불었다.
보기 좋게 흐트러진 흑발이 흔들렸다. 그 아래 얼굴도 흔들리는 꽃처럼 이지러졌다.
칼릭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마치 오래간 찾아 헤매던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