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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34) (134/232)

134화

지지리도 말 안 듣는 혈육 보는 듯한 눈으로 피유피유 한숨을 내쉰 신수가 팔을 얹었다.

―봤다.

“어땠습니까?”

―아주 미약하구나.

“그건 압니다. 조금 전과 달랐습니까?”

―흐음.

신수가 아리송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갸웃거렸다.

깜찍한 모습을 구경하다가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제 신성력이 이 정도 크기인 거, 일주일은 기억하실 수 있으실까요?”

―내가 그것도 못 할 것 같더냐!

쌩하니 뒤돌아서는 몸을 흐린 눈으로 쳐다봤다.

‘확답은 없었다…….’

역시 신수만 믿고 있지 말아야겠다.

더듬더듬 사탕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약의 여운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내 손으로 독을 먹다니.’

이 지독한 뒷맛이 튼튼해지고 있다는 방증인 듯해 오히려 좋아했는데, 지금은 마음을 찢어지게 만들어서다…….

“그나저나 갑자기 왜 오셨어요?”

―그 아이 말고 내가 올 이유가 뭐, 뭐겠어!

그렇군.

‘괜히 신수가 아니기는 한가 보다. 사샤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아채다니.’

아래로 손을 내밀자, 신수가 쫑쫑거리며 올라와 내 어깨에 안착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알랑거리는 목소리를 꾸며 냈다.

“신수님. 사샤가 도마뱀 인형이 아직도 좋은가 봐요. 인형 털이 많이 눌렸지 뭡니까.”

―흐. 흠.

“그래서 말인데요, 교황에 대해 알고 있으신 게 있으십니까?”

신수는 ‘―뭐가 그래서 말인데요, 란 말이냐!’ 하면서도 술술 이야기해 주었다.

‘여우 같고, 속이 시꺼멓게 보이고, 나이는 삼십 대 중반이지만 신성력 때문에 외관은 열 살은 젊어 보일 테고, 눈동자 색은 까먹었고, 머리카락은 백금색이라…….’

……그러니까, 쓸 만한 건 하나도 없었다!

‘혹시, 바지 신수?’

힘도 약하겠다, 물 안에만 있겠다, 아무래도 뒷방 신세처럼 괄시받는 듯했다.

‘나쁜 사람들.’

우리는 어둠처럼 조용히 사샤의 방에 스며들었다. 곤한 잠에 빠진 아이의 얼굴은 평온했다.

―호오.

신수가 쪼르르 내려가 사샤의 볼에 제 팔을 대었다.

―장하다. 벽 하나를 파괴했구나. 곧 제대로 개화할 수 있을 듯하다.

신수가 신난 듯이 떠들었다.

―곧 저 미친놈 말고 너와도 대화할 수 있겠어!

빙글빙글 제 자리를 돌던 신수가 불쑥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이제는 조용하면 겁이 나!

툴툴거리던 신수는 다시 사샤를 보며 즐거워 날뛰었다.

나는 마치 무심코 하는 것처럼 창밖을 응시했다.

* * *

시간은 느린 듯 분명하게 흘러 그 순간은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용은 왕녀의 머리카락에 제 코를 깊이 묻었다.

왕녀가 물었다.

“두려워?”

“첫 번째는 조금 걱정을 했었지.”

“너무 자만하고 있잖아.”

눈을 감은 채 왕녀가 키득거렸다.

용이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네게 다음 생이 없을까 봐 내가 두려워하면 좋겠나?”

“음. 그것도 나쁘진 않네. 네가 무언가를 무서워하는 걸 보고 싶기도 해.”

진지한 척 말하던 왕녀가 빙긋 웃었다.

“아……. 다음에 만나.”

감히 그를 입에 담는 것들은 그의 이름 앞에 모든 고귀한 단어를 점철했다. 그런 남자에게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왕녀에게 다음 생이 허락되지 않을 리가 없다. 더 정확히는 그래서 이대로 영영 끝일 리가 없다.

“그래. 또 만나자.”

대답이 조금 늦었다.

그래서였을까. 이번에는 그가 늦었다.

이전 생의 기억이 왕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그들이 처음 만나고 특정한 시일이 흐른 때다.

아직 이전 생을 기억하지 못해서, 그래서일 거라고 믿고 싶은 얼굴로.

왕녀가 평연하게 말했다.

“과거의 인연은 알겠어. 하지만 나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 어쩔 수 없겠군.”

“시간이 흐르면 사랑이 아니었다고 깨닫게 될 상대가 네게는 나보다 중요한가?”

“뭐가 문제지? 듣자 하니 애초에 너와 나는 연인 사이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친구라면 지금도 해 줄 수 있어. 그러니 내 사람을 건드릴 생각은 하지 말도록 해.”

용은 낯선 감정에 휩싸였다.

“우리는 그렇게 표현할 사이가 아니었어.”

“그럼 뭐였는데?”

왕녀는 대답 없는 용을 무감히 응시하다가 눈을 깜빡였다.

“그래, 몹시 친밀했다고 치자.”

두려움을 알게 됐다.

이제 아주 많은 게 두려워진 남자는 조심스러워졌고, 생각이 많아졌고, 황폐해졌다.

이다음의, 그다음의 왕녀를 만날 때도.

‘다음이 아니야.’

용은 영원을 산다. 그 말은 한 번의 생을 살아 다음이 없다는 것과도 같았다.

‘한 번도 안 돼.’

그때가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 * *

아침은 밝고야 말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레아가 가져다준 물로 폭풍 같은 세수를 마치고 문 앞에 선 채 고민했다.

‘칼릭스를 만나기 싫어서가 아니야. 원래부터 바로 공작저 갈 생각이었단 말이다…….’

책으로 읽은 원작에서, 본격적인 황위 다툼의 시작은 사샤가 보유한 신성력의 크기가 밝혀진 이후부터였다.

‘황후가 사샤를 제거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지.’

카타리나 황후는 흑마법의 존재 여하를 알고 있다. 제 부친과 긴밀하게 얽혀 있으니, 어려서부터 관여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번 무도회에 흑마법이 연루되었다는 것도 눈치챘는지는 몰라도 회임 여부를 확인하려던 건 알았으니 일단 흑마법사 쪽부터 신경 쓸 것 같기는 한데.’

나는 희망 회로를 주먹으로 내리치고는 3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았다.

터벅터벅 힘없이 걸어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복도에 주로 서식하는 누군가를 놀랍게도 마주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고 있나.’

다행인 일이었다. 나는 앞으로 한동안 칼릭스와 삼자대면만 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무실에는 리반이 없었다…….

“리반은 몸살 때문에 오늘 병가를 신청했어.”

인재는 둥지를 제대로 찾아간 게 맞았다.

허약 비실 리반 리히트는 책상에 앉아 있을 만큼의 체력만 갖고 있던 거다.

“당일에 받아주시다니요!”

“샤를리즈. 나는 악덕 상관이 아니야.”

칼릭스가 서운하다는 듯 웃었다.

“오늘 일이 아주 많으시겠군요. 빠르게 말씀드리고 갈 테니 조금만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얼마든지.”

감사하다고 하려는데, 칼릭스가 먼저 말했다.

“십 년째 이 일을 하는데, 리반이 없다고 시간 내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부끄러울 일이지.”

“그렇지만 피곤하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좋아.”

사근사근한 목소리였다.

나는 당장 리반의 손을 잡아끌어 오고 싶은 심정으로 그 앞에 섰다.

왜인지 머뭇거리게 되었다가 이게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나쁠 것 없지. 이 기회에 감히 리닉스가 추락한다고 생각해 얕볼 이들을 솎아낼 수도 있고 말일세.”

공작의 얇은 입술이 올라갔다.

“모든 것은 리닉스를 위하여.”

투명한 유리잔 안의 붉은 액체가 회오리쳤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미래를 예고하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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