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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35) (135/232)

135화

‘이렇게도 기회가 오다니!’

나는 눈을 반짝 빛냈다.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헤어졌거든요. 고작 일주일가량 만에 이별한 셈이지요. 제 사랑이 이렇게나 짧습니다. 전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 만큼 말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말도 슬쩍 덧붙였다.

“그런데 아무 사이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좋은 친구가 되기로 해서요. 제가 감정 정리를 너무 잘해서 말입니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걸 칼릭스가 어떻게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세계의 주인공이라는 사실 하나로 납득 완료다. 원래 주인공은 다재다능한 법.

무심코 확인한 시계는 벌써 아홉 시 삼십여 분을 알리고 있었다.

‘끙.’

리엔타 공작이라면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거 아침 식사를 거르시게 한 건 아닌지 걱정이었다.

‘기력도 달리는데 밥이라도 든든히 먹여야 해.’

칼릭스도 바쁠 테니 잽싸게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슬쩍 손을 빼냈다. 그대로 스르르 빠져나오던 손은 끝에서 잡혔다.

마치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내리뜬 눈꺼풀이 보였다.

“마음을 정리하고, 친구로 지낸다고.”

“바로 그렇습니다. 마치 전하와 제 사이처럼요.”

피곤해서 죽은 눈을 빛내고 있는데, 칼릭스가 문득 웃었다.

“아.”

그건 탄식 같기도 했다.

나는 이 틈에 잡힌 손을 마저 빼내었다.

이만 가보겠다는 말을 하려던 차, 칼릭스가 돌연 질문했다.

“그럼 세냑 영식과도 오래도록 보고 지내겠어.”

“예. 맞습니다!”

“종종 만나기도 하고.”

‘……그,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였어?’

귀찮은데. 아드리안도 떨떠름해 할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그건 아닙니다.’ 했다가 사샤와 일 년에 한 번 만나게 될 수 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끄덕이긴 했는데, 양심에 찔렸다.

거짓임을 간파한 듯한 저 눈 때문인지도 몰랐다.

‘종종 만날게요. 그러면 되잖아요…….’

비통한 심정으로 결심했다.

“꼭 우리처럼?”

“예.”

나는 다시 힘을 얻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음.”

칼릭스가 낮게 웃었다.

“다르다고 해 줘.”

“예. 다릅니다.”

사실이라서 냉큼 말했더니 칼릭스가 손으로 하관을 가렸다.

‘성의 없는 거 아닌데, 진짜라서 빨랐을 뿐인데.’

나는 다시 말했다.

“아드리안과 전하는 다릅니다.”

“맞아. 달라.”

칼릭스가 애석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우선은 나는 아직도 그렇게 불리니까. ‘전하’라고 말이야.”

푸른 눈이 부드럽게 물었다.

“이제는 내 이름을 부르기 싫어?”

“그건 아니지만…….”

나는 힐끗 칼릭스를 보며 생각했다.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칼릭스는 어쩌면 단란한 가정을 이룰 생각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엄청나게 오래 짝사랑하고, 약혼녀까지 됐다가, 이제는 친구라며 저택 드나드는 사람이 남편을 이름으로 부르기까지 하는데 어느 귀부인이 마음 앓이 안 하겠냐고…….’

남은 평생을 누군가에게 미움받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잠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단 말이다. 그건 건강에 좋지 않다.

가뜩이나 비루먹은 몸뚱이인데…….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제 건강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다행이네.”

칼릭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공녀는 그런 데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거든.”

‘전혀 아닌데요!’

“신관을 만나보는 건 어때? 게릭이 그렇게 보여도 실력은 상당해. 다른 의사도 소용없을 테니 신관을 만나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기절의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신성력과 관련되어 있으니 신전에 답이 있을 것도 같지만, 어디 털어놓을 수도 없으니 의미 없는 걸음만 될 터다.

‘하지만 자라나는 아이 옆에 걸핏하면 쓰러지는 인간 있으면 불안감이 높은 성격이 될지도 모르니까 숙부 입장에서는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해.’

사양하는 쪽이 칼릭스로서는 더 성가실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리엔타로 하기에는 아버지께서 걱정하실 것 같아서요. 죄송하지만, 엘루이든으로 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럴게.”

“감사합니다. 그럼 기사를 대동시켜 주시면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바쁠까 봐 그래?”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칼릭스가 목을 울렸다.

“공녀가 일 걱정을 이리도 하게 된 데는 리반의 영향이 크겠지. 하지만, 샤를리즈. 엘루이든의 업무는 그리 많지 않아.”

순간 과거가 눈앞을 스쳤다.

테오도르 바나첼의 검상을 보고 내 감상과 다른 이들의 감상이 달랐던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칼릭스에게만 무리가 아닌가 보다.’

“그래, 내가 함께 가지 않아도 달라질 건 없어. 기사가 엘루이든 소속임을 밝혀야 하니 과정이 아주 조금 길어진다면 모를까. 그것도 오 분도 되지 않으리란 걸 알아.”

칼릭스가 “그런데…….” 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만약 공녀가 생각하는 대로 아주 바쁘다고 해도, 쉴 틈 없이 일해서라도 시간을 마련했을 거야. 나는 공녀에게 때로 비합리적이고 싶어져.”

일상처럼 여상한 어조로 이어지는 말소리 끝에, 칼릭스는 나를 보며 느른하게 웃었다.

“공녀와 함께 있고 싶다는 이야기야.”

* * *

만약 오늘도 함께 외출하고 싶다며 칼릭스가 따라왔다면 내 심장은 짧은 시간 너무도 열심히 일해 수명이 닳았을지도 모르겠다.

[리엔타 공작께서는 오늘 나를 만나고 싶지 않으실 테지.]

‘그러고 보니 칼릭스는 리엔타 공작의 심성을 알고 있을까?’

그 딸이란 작자가 한때 엘루이든에서 가장 요주의 인물이었던 전적이 있으니 조사를 깊이 해뒀을 것 같기도 했다.

리엔타도 한가락 하는 가문인 덕택에 황성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마차는 금세 도착했다.

현관 앞에 쪼르르 서 있던 삼인방이 달려왔다.

“샤를리즈!”

“아가씨!”

“세상에, 얼굴이 상하셨어요!”

마지막, 멜리사 부인의 날카로운 지적에 찔끔했다.

“설마 대공 전하가 소식하는 사람이 좋다고 해 새 모이만큼만 먹고 있는 게야?”

“아닙니다. 많이 먹어요.”

밥시간을 좋아한다고도 작게 소문났다. 바로 사샤에게 말이다.

오늘의 식사가 무엇인지 아이가 삐뚤빼뚤하게 써서 알려 주기까지 할 정도다. 아가는 글씨 연습하고, 나는 일찍부터 행복해지고 일거양득인 훌륭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

“그러엄, 했다.”

“저는 아직인데, 그럼…….”

“사실 엄청 조금만 했다! 같이 들자꾸나.”

만찬 수준의 아침밥을 해치우고, 나는 이번에는 공작의 찻잔이 텅 빌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다.

“아버지.”

“그래, 샤를.”

배가 많이 부른지 공작은 행복해 보였다.

‘좋았어.’

“어머니께서 저를 가지셨을 때 교황 성하께서 독대를 요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어떤 말을 들으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공작이 이번에도 못 들은 척하며 빠져나갈까 봐 퇴로는 한참 전에 확인해놨다.

그러나 공작은 침묵할 뿐,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샤를리즈. 이번이 세 번째로구나. 네가 생각하기에 수상쩍은 부분이 있으니 계속 묻는 것이겠지.”

“아버지의 말씀이 맞습니다.”

리엔타 공작의 눈이 어두워졌다.

“샤를. 어쩌면 내가 네 첫 번째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않았던 게 문제 같다. 그래, 나는 놀랐다. 두 가지 부분에서였지.”

나는 손을 뻗어 공작의 손등을 덮었다.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던 공작이 희미하게 웃었다.

“하나는 교황 성하께서 그런 요청을 하셨다는 사실을 네가 알았다는 것이었어. 굉장히, 비밀스럽게 서신이 도착했었거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샤를이 오해할까 봐. 그게 사실이라고.”

“저를 낳은 게 어머니가 가지신 지병의 악화에 결정적인 이유였다는 것 말인가요?”

“그래.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공작이 절박하게 말했다.

“아이리스는 원래 몸이 약했고, 본래 스물을 넘기 힘들다는 소견을 들었어. 그러니 오히려 의사들의 예상보다 오래 산 셈이지.”

‘그래서 공작비는 스물다섯에 결혼했던 걸까.’

평범한 귀족 영애들은 이십 대 초반에 혼사를 치른다. 연정을 나누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꽤나 늦다고 할 수 있었다.

“교황 성하의 부름은 임신이 아이리스의 몸에 부담이 됐기 때문이 아니라 네가 연약했기 때문이란다. 성하께서 축복을 내려 주신 덕택에 샤를리즈가 이 세상에 무사히 태어났는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리엔타 공작은……. 교황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게는 의아한 부분이 공작에게는 어째서 의아하지 않은지 그것이 이상해서, 나는 재차 질문했다.

“비밀스럽게 만나야 했던 이유가 있습니까?”

“아무래도 당시 상황상 축복의 대상이 뱃속 아기라며 여러 말이 오갈 수도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교황이 아니라 신전의 선택이라며 반란의 씨앗으로 확대해석될 수도 있고 말이다. 황족이 아닌 귀족에게 행하는 첫 번째 축복이란 무게가 남다른 법이지.”

질문한 의미도 없이 의아해졌다. 첫 번째라고 했다.

“당시의 교황과 지금의 교황이 동일 인물입니까?”

나는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신수가 교황의 나이를 삼십 대 중반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작에게 질문할 생각은 여전했다.

[궁금해한 것 모두 이야기해 줄게. 일어나기만 한다면 모두 말해 주마. 정말로 모두……. 그럴 수 있다. 제발. 그러니, 제발.]

[네가 막 우리에게 선물처럼 다가와 주었을 때. 교황이 나를 찾았었다.]

공작은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까.

“샤를…….”

공작이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얼굴을 했다.

‘아, 역시 아닌…….’

“당연히 같은 분이시란다.”

“기껏해야 십 대 중반 소년을 말입니까?”

“교황의 자리는 신성력의 크기로 승계된다. 나이도, 성별도, 신분도 상관없지. 하지만 차기 교황의 나이가 대체로 십 대 중반이기는 하단다.”

“그때 신전에 주로 들어오니까요?”

“그래, 맞다.”

“그럼…….”

대답이 꼭 필요한 의문이 아니라는 자각은 있었다. 내가 먹는 약의 출처가 어딘지가 차라리 더 중요했다.

그러나 눈앞의 사람은 한정된 짧은 시간만 독대할 수 있어 질문을 고르고 골라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아버지였다.

“신성력이 당대의 교황보다 강하다면 바로 교황이 되나요?”

“그건 아니다. 배워야 할 게 많으니 이 년여 정도는 신관의 위치에 있단다.”

“그 신관의 위치란 게, 수석 신관입니까.”

“그래.”

공작은 갑자기 왜 모르고 있던 것처럼 굴었냐며 웃었다.

나는 성축일도 잊어버릴 정도로 신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거라곤 거의 없지만, 저 수석 신관이라는 단어는 알고 있다.

로단테를 통해 처음 본 미래의 조각 속에서, 소년의 지위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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