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테오도르와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기분이 이상했다.
[공녀님께서도 최근 가짜 애인을 만들기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외도 같은 오명은 걱정하지 않았다. 여타 귀족들은 ‘질투 작전’으로 생각할 걸 알고 행동한 게 맞았다.
그런데 진짜 그렇다니. 심지어 테오도르 바나첼마저 그렇다니!
‘몇 명을 사랑하고 금세 정리하고 친구로 지내고. 이거 영 쓸모없을 것 같은데.’
돌고 돌아 원점인 꼴이나 될 것 같다.
뚝 떨어진 자신감처럼 어깨도 축 내려갔다. 체력 낭비만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냥 얼른 파혼하고 튀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랬는데…….
“오늘 테오도르 바나첼은 무사히 만났어?”
내 핫초코에 마시멜로를 더 넣어주며 칼릭스가 물었다. 나는 우울하게 핫초코를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는 도저히 거리가 멀어질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디저트 카페 친구로 지낼까 합니다.”
테오도르는 얼떨떨한 얼굴이었지만, 곧 디저트 세계를 정복하다 보면 그도 진심으로 흠뻑 빠질 게 틀림없다.
내 사감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는 비겁한 변명을 하진 않겠다. 아주 매우 몹시 많이 첨가된 게 맞았다.
잔을 쥔 커다란 손이 눈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그를 경계하는 황제 때문에 검술을 제대로 연마하지 못하는 손은 일견 매끄러웠다.
‘아, 그러고 보니.’
“전하. 총성을 줄여주는 마도구를 저도 구할 수 있을까요? 총은 아무래도 소리가 단점이니 말입니다.”
칼릭스는 잔을 내려놓았다.
나쁜 놈 몰래 혼내겠다는 말을 너무 노골적으로 했나 싶었다.
“총기를 사용해 본 적이 있어?”
“사냥제를 위해 연습을 많이 해 보았습니다.”
슬쩍 시선을 피하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눈치 빠른 남자가 이 이면에 담긴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됐다.
칼릭스가 나직하게 웃었다.
“날이 괜찮은데, 오랜만에 연습해보는 건 어때?”
“좋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한 번도 안 쓴 새 총도 잊지 않고 챙겼다.
‘오늘은 계속 걷네.’
그래도 몇 번 체력의 한계를 경험했다고 견딜 만했다.
겨울이라서 바싹 말라붙었을 줄 알았던 초록의 풀은 여전했다. 바람은 차가워졌지만, 발목을 간지럽히는 살랑거림은 그대로였다.
그 사이, 칼릭스는 마도구를 조절했다.
“이제 해도 돼.”
타앙.
총성은 확연히 작았다.
과녁을 조준한 총탄은 정중앙에서 크게 벗어났다.
“사냥은 장총 위주이니 처음에는 조금 헷갈릴 테지.”
칼릭스가 내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차갑게 생긴 남자의 손은 의외로 언제나 따뜻했다.
순간 흠칫해서 돌아봤는데, 과녁을 응시하는 칼릭스의 눈은 그저 무심해 보였다.
“지금이야.”
“…….”
“당겨.”
방아쇠를 당겼다.
정중앙을 꿰뚫은 총탄을 보고 잘했다며 다정하게 웃는 얼굴보다 와닿은 온기가 더 선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주군!”
처음 보는 기사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칼릭스는 자연스럽게 속삭였다.
“파커라고 부르면 돼.”
“리엔타 공녀님, 정식으로 처음 인사드립니다. 검은밤 소속 파커 르웬틴이라고 합니다.”
유들유들한 성격의 두 검은밤 기사와는 달리 그야말로 기사의 전형 같았다.
파커가 빠르게 보고했다.
“사냥제 형식으로 행사가 열릴 예정입니다. 당시 그리니티 홀에 있던 귀족들이 초대 대상입니다.”
보고를 마친 파커는 깍듯하게 인사하고 사라졌다.
칼릭스가 나직하게 웃었다.
“연습했는데, 마침 실전에 들어갈 수 있겠어. 샤를리즈.”
“사냥제로 몰아가신 거죠?”
“응, 맞아.”
칼릭스는 순순히 대답했다. 나는 총의 몸체를 꾹 쥐었다.
“설마 어디 다칠 생각 하고 계신 겁니까?”
“음.”
칼릭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과녁을 응시하는 눈이 깊었다.
“내가 걱정돼?”
“당연히 걱정됩니다.”
“왜, 우리가 친밀한 사이라서?”
얼굴은 심상하고, 목소리는 담담한데 어쩐지 비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마치 순간의 착각인 듯했다.
왜냐하면, 나를 돌아본 눈이…….
“나나 공녀 둘 중 한 명이 대가를 내걸어야 한다면 내가 하는 게 나아.”
동공을 둘러싼 금색 불티가 선명했다.
“왜냐하면, 공녀가 나를 걱정하는 것보다 내가 더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
입술을 달싹였다. 아마도 어째서 그러느냐 따위의 질문을 한 것 같았다.
“글쎄. 그저 친밀한 관계에서 걱정하는 게 아니기 때문 아닐까.”
세상의 많은 것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일어나고, 진행되고, 끝난다.
모든 변화는 앎에서 시작된다.
지금 알아챘을 뿐, 싹튼 순간은 달랐을 것이다.
그저 유난히 내 취향인 얼굴을 본 날이었을 수도 있고, 이전 생의 기억이 질긴 매듭처럼 나를 속박할 때 그가 기꺼이 매듭을 끊어 준 날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로 별것 아닌 순간이었을 수도 있겠다.
몰랐더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 있는 일은 관찰한 순간 몸을 집어삼킬 만큼 커다란 파도가 되기도 한다.
방아쇠는 당겨진 지 오래였다.
어떠한 예감이 그렇듯 선득하게 뇌리를 스쳤다.
“전하.”
“응.”
머리를 아프게 하는 학문에 매료된 현자처럼 무표정하던 칼릭스의 얼굴이 일순 기울어졌다.
“아…….”
부풀어 있던 동공이 이내 가늘게 휘어졌다.
“알았어?”
그 순간 든 생각 한 가지는, 안도였다. 극적인 상황이 아니라 일상적인 순간 속이라서 다행이라고.
금세 접어야 할 감정에 섬광과도 같은 깨달음이 동반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왜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굴었어? 왜 나밖에 안 보이는 것처럼 바라봤어. 왜 나만 있으면 된다는 듯 붙잡았어!]
대단하다는 착각은 이전의 ‘샤를리즈’가 질리도록 했던 것이므로.
* * *
리반은 서류 너머로 힐끔 쳐다봤다.
샤를리즈는 평소와 다를 것 없었고, 주군은 어째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번 행사에 로단테를 데려가려고 해요.”
“로단테라면, 타티스 후작가의 그 소년이던가.”
“예. 같이 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샤를리즈의 얼굴이 걱정으로 조금 흐려졌다.
‘저거 저거, 기분 꼬이셨네.’
리반은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샤를리즈가 나간 후, 리반은 과장되게 한숨을 폭 쉬었다. 상사를 슬슬 긁을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야 없다.
“이제 열네 살 아닙니까. 지금 아이에게 질투하십니까?”
“그 꼬맹이에게 질투한 것 아니야.”
칼릭스가 피식 웃으며 턱을 깊이 괴었다.
“안 그래도 작은데, 나눠 갖고 싶지 않더군.”
“…….”
무슨 생각으로 이 대화를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리반은 오늘은 딴짓하지 않고 기필코 일찍 침대에 누워 숙면을 취하기로 다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책을 쓴 저자의 위치를 파악했다고 합니다. 잡아 올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왜요?”
“샤를리즈가 알았거든.”
“무엇을요?”
“듣고 싶어, 리반?”
“아니요. 전혀. 전혀 듣고 싶지 않습니다!”
후다닥 리반이 튀어나오기 전, 칼릭스가 웃음기 어린 어조로 말했다.
“내 감정의 분류.”
약이 오른 리반이 와락 내질렀다.
“직접 들으셨습니까? 직접 안 들어봤으면 모르는 겁니다. 공녀가 생긴 거랑 다르게 얼마나 둔한지 아세요?”
소년 시절 만나 멋모르던 시기 이후, 굉장히 오랜만에 하는 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리반은 귀를 탈탈 털며 안정을 찾아 복도로 빠져나왔다.
차라리 완벽한 상하 관계였다면 제이와 늦바람이 무섭다며 수군거릴 텐데, 친구인 듯 친구 아닌 친구 같은 상대라서 그런지 몸이 배배 꼬였다.
‘나는 연애도 못 하게 만들고. 혼자만 그러고.’
창가에 달라붙은 리반이 서글프게 정원을 응시했다.
‘공녀님?’
리반은 눈을 비볐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어깨를 옹송그리며 떨었다.
‘서, 설마 내가 본인 보고 둔하다고 했던 거 들었나?’
샤를리즈는 정원에서 땅을 열심히 파고 있었다…….
* * *
삽은 사치다.
내겐 삽은 필요 없다.
그 단어가 주는 이중적인 의미 때문에 손끝만 닿아도 안 됐다!
꽝꽝 언 땅에 손을 찔러넣다가 상처가 나서 감염되면 안 되므로 보드라운 곳을 찾았다.
파바박 맨손으로 열심히 땅을 파헤쳤다.
그리고 왼쪽 흉부에서 무언가를 꺼내듯 허공을 쥐고 그대로 구멍에 손바닥을 퍽 내리눌렀다.
“좋았어.”
일종의 의식이었다.
다시 열심히 복구시키고,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파혼하고 엘루이든을 떠나게 될 때 여기 모두 두고 갈 계획이었다.
그리고 오늘 본 미래의 조각을 복기했다.
‘정체에 다가갈수록 해금되는 것 같아.’
저번에도 이번에도 모두 ‘리닉스 공작’이라고 문장이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사냥 대회?”
“엄밀히는 아니지만, 총기를 지참하는 행사는 맞습니다.”
리닉스 공작이 턱을 쓸었다.
“꼭 함정 같군. 누군가를 제거하기 너무도 적절하잖나.”
“지켜볼까요?”
“일단 준비는 해 둬. 황후가 참석한다면 정리하고, 참석하지 않는다면 공녀를…….”
못마땅하다는 듯 눈매를 찌푸린 공작이 시가 연기와 함께 말을 뱉어냈다.
“납치해야 하니까.”
고신이 동반되어도 괜찮을 것이다.
어차피 공녀는 멀쩡히 살아나갈 수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