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공녀님, 공녀님!”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아기 다람쥐처럼 아리아가 쪼르르 달려왔다.
“황성 연회는 어떠셨어요? 그리니티 연회홀의 외부 조명이 그렇게 대단하다던데 궁금해요!”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리는데, 아름답긴 하더군.”
“그렇지요? 할아버지도 가셔서 이야기해 주시면 좋았을 텐데.”
필리엄 백작은 불참했다. 대외적인 이유로는 기적적으로 깨어난 손녀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몸을 사리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었다.
‘저 나이에 이 추운 날 바깥을 돌아다니면 심장이 얼어붙을지도 몰라.’
그때, 아리아가 손을 모으며 초롱초롱한 시선을 허공에 던졌다.
“아, 저도 언제 저의 남자 주인공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어, 어?”
이렇게 갑자기? 샤를리즈는 떨리는 눈으로 아리아의 시선이 닿는 허공을 허겁지겁 뒤졌다.
‘혹시 그 독, 깨어나면 무언가 깨달음을 주는 그런 건가?’
먼저 깨어난 사람은 로나터스 후작이지만 그를 만날 일이 없기는 했다. 가문의 내실을 다지는 데 힘쓰고 있기 때문이다.
라베트는 쓸모없는 연장자인 에리히를 제치고 당당히 차기 가주로 발돋움해 옆에서 부친을 돕고 있었다.
“아직 가정교사가 정해지지 않았기도 하고, 친구들도 어려워져서 주로 책을 읽고 있는데요.”
아리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 책이란 건, 로제타의 취미 속 그 책과 같은 종류인 모양이다.
“그랬군…….”
“저도 그런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싶어요.”
“할 수 있을 거야. 사람은 살아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거든.”
“그 말, 이상해요. 꼭 곧 죽을 사람 같아!”
‘비슷해…….’
속으로 흑흑 눈물을 훔치느라 힘이 쪽 빠져 샤를리즈는 등받이에 깊이 몸을 묻었다.
“공녀님, 공녀님도 사랑을 해 보셨죠?”
그 물음이 참으로 낯설었다. 샤를리즈에게 사랑에 관해 언급할 수 있는 간 큰 인간은 매우 희귀종인 덕택이다.
“해 봤지.”
“어땠어요?”
“잔잔한 물살 같았어.”
“심심해!”
그러더니 또 들썩거리며 묻는다.
“공녀님도 운명적이고, 열정적이고, 정열적인 사랑 하고 싶지 않아요?”
제 자리에 버티는 것만도 힘든 실정이었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강한 물결은 바라지 않았다.
“별로…….”
“심심해!”
뾰로통하게 고개를 휙 돌린 아리아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도.”
발랄하게 움직이는 발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샤를리즈는 고개를 기울였다.
“공녀님은 꼭 하게 될 거예요.”
아리아가 배시시 웃었다.
“왜냐하면 대공 전하께서 엄청나게 미남이시니까요!”
샤를리즈가 눈을 크게 떴다.
“그대, 통찰력이 대단…….”
“아리아, 여기 있었구나.”
“할아버지!”
벌떡 일어난 아리아가 강아지처럼 쫑쫑 달려가 조부의 품에 안겼다.
“또 공녀님을 귀찮게 하고 있었느냐?”
“아니에요! 공녀님, 저랑 이야기하는 거 즐거우셨죠?”
그렇다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이자 아리아가 샐쭉 눈을 좁히고는 응접실 문에 매달려 “할아버지랑 대화 끝나시면 저랑도 하셔야 해요!”하고는 문을 닫았다.
“다름 아니라 승선 물품과 하선 물품을 대조하다 의아한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샤를리즈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중차대한 용건이 있어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샤를리즈의 말을 듣던 필리엄 백작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녀의 말을 통해 리닉스 공작이 자신을 두고 본 이유는 2대에 이어진 저주에 무력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밀항을 겸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확인하셨습니까?”
백작저 내부의 세작이 어느 정도일지를 짐작하지 못했다. 당장 솎아낼 수 없어 방치하고만 있는 실정이다.
샤를리즈에게 승하선 기록을 넘겨주는 것은 공녀가 대가로 말했을 뿐이라고 그 속내까지는 모른다며 잡아뗄 수 있다. 능구렁이 같은 리닉스 공작은 분명 의심은 할 테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백작이 직접 기록을 점검하는 것은 의미가 달랐다. 그랬기에 손을 놓고 있어 마음이 무거웠다.
샤를리즈는 고개를 저었다.
“아라스픽스 원목을 자주 취급하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줄곧 굳어 있던 백작의 얼굴이 탁 풀렸다.
“아, 공녀님께는 다소 낯선 품목이겠군요. 동대륙에서 선호하는 상품입니다.”
“동대륙에서 선호한다면 제국의 귀족 중에도 무작정 따라 취급하려는 자들이 적지 않을 텐데요.”
“내구성이 약하고, 가구로 만들기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동대륙에서는 특정한 의미 때문에 선호한다고 하더군요.”
샤를리즈는 물었다. 그 특정한 의미가 무엇이냐고.
잠시 기억을 되짚듯 미간을 찌푸린 백작이 이윽고 대답했다.
“동대륙어와 제국어는 다릅니다만, 종종 발음이 비슷한 단어가 있습니다. 요컨대 아라스픽스가 아라스팃사와 그러하지요.”
“아라스팃사.”
“예. 그 뜻이 ‘신에게로 한 걸음’이라고 합니다.”
* * *
나는 기운이 쪽 빠져 마차에서 내렸다.
[물약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주기적으로 치료사와 신관에게 돈을 지불해 아리아의 다리가 굳지 않도록 하였지요.]
‘다음 생에는 서점의 직원에게 의무가 있는 세계에서 태어나게 해주세요. 만약 이 책에 빙의하게 된다면 얼마나 골치 아픈 삶을 살게 될지 아냐고, 그런데도 읽을 거냐고 꼭 물어봐야 하는 의무 말입니다.’
이번 생은 밝고, 순수하고, 맑은 동화책 위주로 읽고 있어 걱정이 덜하지만 벌써 다다음 생이 걱정이었다.
나는 기어코 고개를 푹 숙였다.
‘이렇게 되면……. 신전도 살펴야 하는 거로군.’
그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성력과 접하면 사사건건 기절했던 여러 날과 미래의 조각을 볼 수 있는 시간은 해가 뜬 동안뿐이라는 사실. 난데없는 신성력까지.
이쯤 되면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책으로 본 원작의 신전은 사샤의 신성력이 확실히 개화하기 전까지 간을 보기는 했어도 협조하는 느낌이었는데.’
돌이켜보니 그것도 수상쩍다.
이 망하지 말아야 하는 망할 세계에서 신전이 썩지 않았다니 믿을 수 없다!
‘혹시 꿈속의 나, 신전 손에 죽은 겁니까.’
죽으면서 간절히 바란 소망의 발현이 지금일 수도 있겠다.
나는 행여나 똑같이 죽을까 봐 열심히 피해 다니겠지만, 이전 생을 기억하기 전의 ‘샤를리즈’라면 이를 갈며 너네 다 죽여버리겠다고 하고도 남았다.
샤를리즈의 독기는 미쳤기 때문이다.
터덜터덜 힘없이 걷던 발이 종착지에 도착해 멈췄다.
적당한 흙을 찾아 눈을 날카롭게 벼린 나는 곧 어리둥절해졌다.
‘……보슬보슬.’
혹시 이거 흙이 아니라 비료나 거름은 아닐까.
‘그럼 눈으로는 알 수 없는데.’
슬프게 바라보고 있던 순간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샤를리즈.”
서류를 내려 두며 칼릭스가 웃었다. 감정을 자각한 후라서 그런지 한결 강렬하게 다가오는 미소였다.
‘큰일 났다.’
금발. 아무튼 화려한 색깔의 눈동자. 싸가지 없는 인성. 솔직한 성격. 살아남기 위해 애쓴 흔적이 가득한 손. 햇살 같은 얼굴. 계산 없는 미소. 목을 살짝만 젖혀도 눈이 마주칠 키 차이. 한량.
난 이제 금발을 질색하게 됐다. 다정의 안락함을 알게 됐고, 비극이라고는 겪어 본 적 없을 것만 같은 남자의 과거를 안다. 다양한 종류의 미소를 목도했고, 본 적 없는 바다를 사랑하게 됐다.
‘그래도 아직 세 개가 남았어…….’
이건 바뀔 수가 없으니 괜찮을 것이다.
과연 작은 테이블에는 서류 탑이 세워져 있었다.
“날이 좋아서 나와 봤어.”
“바깥에서도 일하시다니 과연 부지런하십니다.”
“음. 그보다는 공녀를 가장 먼저 만나고 싶었지.”
칼릭스가 성큼 다가와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비스듬한 각도로 내려앉은 속눈썹에 햇살이 고여 희붐했다.
“지나가다가 우연히 봤는데, 리반이 3층 창문 옆에 달라붙어서 고개만 빼고 정원을 내려다보더군. 뭐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보니 그곳에 공녀가 있었어.”
“예?”
나는 반색했다. 의식을 마친 후, 마음 수련을 위해 정원을 빙글빙글 돌곤 했는데 리반이 그걸 보고 있던 모양이다.
‘심심했는데 잘 됐다.’
그 체력으로 평생 살 생각은 역시 없던 거로군.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칼릭스가 묘하게 불퉁한 표정을 했다.
나는 잽싸게 시선을 돌렸다.
‘위험해. 솔직한 표정, 내게만 한다고 착각하고 만다고.’
그러고 보니 칼릭스는 우리가 친구 사이도 아니랬다.
‘하긴…….’
“샤를리즈. 지금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칼릭스가 비스듬히 웃었다.
“리반이 그러더군. 공녀는 살짝 눈치가 부족하다고. 그래서…….”
칼릭스는 문득 짧게 침묵했다.
“저번에 내가 공녀에게 말한 모든 것들, 친구로서의 의미가 아니라고 했던 말. 기억하고 있어?”
“예.”
“어떤 뜻이었을 것 같아?”
“친구가 아니다.”
칼릭스가 눈매를 접었다.
“조금 더 상세히 이야기해줘.”
“동일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이에 정이 든 동료 아닙니까?”
부드럽게 풀려 있던 미려한 얼굴에 언뜻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나는 쭈굴하게 말을 고쳤다.
“동일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동료입니다.”
“우리 사이가, 단순한 동료라고.”
‘어라?’
묘하게 곱씹는 듯한 말투에 나는 갸웃했다.
칼릭스에게 샤를리즈 리엔타라는 사람은 이유 없이 갑자기 사랑을 고백했고, 십 년을 쫓아다녔고, 그녀를 제외한 인간관계라고는 다 박살 내려고 들었고.
“많이 달라.”
따듯한 햇살에 보드랍게 구워진 흰 빵 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주인공인 칼릭스는 당연히 멀쩡했고, 나는 한순간 시야를 봉인 당했다.
이 또한 익숙하리니. 가만히 있으면 지나가리라. 멀뚱하게 서 있는데,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 그런 거였어.”
섬세한 손길이 와닿았다. 머리카락을 귓바퀴에 꽂아주고 느릿하게 돌아가는 손길은 진득하지 않았으나 확연한 무게감이 있었다.
칼릭스는 웃고 있었다. 즐겁게 반짝이는 벽안에 시선만 빼앗기면 되었을 텐데.
“사랑한다는 말이야.”
그리고 시야가 암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