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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39) (139/232)

139화

[……죽겠다고.]

본래 죽을 작정이었음에도 대가처럼 제의했지만 죄책감은 없다.

어차피 저 남자는 그녀가 죽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왜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모두 두고 죽겠다고.]

칼릭스는 분노가 선연한 얼굴로 짓씹듯 중얼거렸다.

[네겐 모두 쉽군. 감정도, 거래도, 목숨도.]

샤를리즈가 이를 악물었다.

[빈정댈 생각이라면 돌아가겠어.]

[대가를 바꾸지.]

칼릭스가 감은 눈꺼풀 위를 손으로 덮었다.

[살아. 이왕이면 나보다 오래 사는 게 좋겠어.]

[그거 알아?]

선연한 푸른 눈에 대고 샤를리즈는 비웃었다.

살아서 모든 걸 감당하고 괴로워하라는 뜻이 분명한 말에 이런 대응을 한 이유는 빈정대기 위함이 맞았다.

[너 지금 사랑하는 연인이 죽을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굴고 있어.]

마치 할 짓 없는 신의 장난이라도 되는 듯했다. 찰나라고 불러야 마땅한 짧은 순간. 드러난 동요를 샤를리즈는 목도했다.

손가락 사이로 얼핏 드러난 벽안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그러니까, 또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이야기다.

* * *

“흠.”

‘꼭 사랑하는 것처럼 구는 면모에 속지 말라고 부르짖는 것 같군.’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사사건건 방해하고, 괴롭히고, 위협하다가 저 편하게 먼저 저세상 가겠다고 한다면 아무리 천사 같은 성격이라고 한들 약이 바짝 오르기 마련.

지금은 농락할 이유가 없으니 거짓은 아닐 터였다.

‘……그러게?’

나는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일어선 채 깡총 뛰는 단계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겠다.

하도 반복되어 익숙해졌다 보니 꿈에 대한 소회부터 시작해 버렸다.

후다닥 둘러본 결과, 여긴 내 방이었다.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칼릭스도, 레아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꿈이었나?’

생각해 보니 그럴듯했다.

십 년 가까이 샤를리즈가 기웃거릴 때도 무심했던 마음이다.

게다가 설령 진짜라고 해도 이상하다.

‘흠. 착각 아닐까.’

샤를리즈가 보인 감정은 그야말로 강렬했다. 그러니까 강렬한 감정은 사랑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아, 죄책감.”

여자 주인공으로부터 받은 몽글몽글 부드러운 감정이 사랑이라고, 원작의 칼릭스는 알았다.

‘……알았나?’

갑자기 헷갈렸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정원에서 뻗고 그대로 숙면을 취했는지 시간은 벌써 오전 여덟 시였다.

‘오늘은 이리안이랑 로제타 만나기로 했지.’

“라베트는 못 본 지 엄청 오래됐네.”

서신을 보내 봐야겠군. 그렇게 생각 없이 멍하게 세수하고, 환복하고 보니 벌써 아홉 시 십 분 전이었다.

“끙.”

‘칼릭스가 필리엄 백작 일에 신경 써줬으니까 인간 된 도리로 대화 내용을 나눠야지. 그치…….’

습관이란 신비하다.

그냥 잠깐 생각에 잠겼을 뿐인데 어느새 3층 복도에 서 있었다.

흠칫하며 뒷걸음질 치던 중, 리반이 보였다.

나는 당장 달려갔다.

“고, 공녀님.”

이번에는 리반이 뒷걸음질 쳤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들었어.”

그때는 리반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충격이었는데, 때마침 잘 만났다.

“리반 그대는 눈치가 빠르지?”

“예? 예? 아닙니다.”

“……뭐? 그럼 그대도 눈치가 없으면서 나보고 눈치 없다고 한 거야?”

리반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제 너구리가 아니라 더 자그마한 동물을 떠올려야 할 것 같다.

리반은 그야말로 소동물 같았고, 나는 못된 놈 같았다.

‘어째서! 흉 들은 사람은 난데!’

아무튼 놀랄까 봐 얼른 투지를 깎아내며 주변을 둘러보자 리반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대공 전하께서 나를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말이야.”

리반의 얼굴이 순식간에 썩어들었다.

“아, 예.”

“리반도 알았어?”

“직접 물어보시죠.”

“안 돼.”

“왜요?”

“착각한 거면 부끄럽잖아.”

“제겐 부끄럽지 않으시고요?”

“그럼 부끄러운 기억 하나씩 나눠 가진 거지. 나는 리반이 벽에 붙어서 사샤를 훔쳐 보…….”

“진짭니다! 착각 아니에요!”

리반이 부르짖었다.

“언제 보신 겁니까?”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이 적더군.”

“그 발언, 다른 데서는 하지 마십시오. 꼭 세작 같습니다.”

방금 원작을 봐서 그런지 생뚱맞은 생각을 했다. 이것도 원작과 다르군, 하고 말이다.

‘리반 리히트는 어쩌면 칼릭스보다도 나를 엄청 의심하고, 경계했는데.’

리반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왜 그런 얼굴로 보십니까?”

“아니야.”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집무실로 끙끙 걸어갔다.

* * *

카타리나는 강박적으로 손을, 정확히는 손으로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물체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게 못내 짜증스러워 사납게 입술을 짓씹었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

안토니오 황제를 살살 들쑤시는 사람의 존재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카타리나는 이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야외 행사는 신전의 동쪽 숲에서 열리도록 적절히 몰아갔다. 거긴, 카타리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장소였다.

흑주술과 상충되는 힘이니 사술을 준비해도 펼치는 데 힘이 더 소요될 것이다.

‘도박 중독은 연기였나. 아니지. 연기할 이유가 없잖아.’

그럼 도대체 누가 감히 제국의 황후에게 사술을 펼치려고 드느냐는 말인가! 카타리나는 손이 으스러져라 주먹을 쥔 것도 잠시.

천으로 고정해 부풀린 배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회임한 와중에도 직접 참석한다면 의아하게 보일 테지만…….’

흑마법의 존재를 알 수만 있지 대비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도구.

큰 효용 가치가 없음에도 누구에게 맡기기는 꺼림칙했다. 잃어버릴 것만 같다.

이 도구도, 제 위치도.

* * *

그리고, 비슷한 때.

누군가의 입술이 달싹였다.

“어차피 스러질 숨, 조금 일찍 회수한다고 하여 문제 될 게 있겠습니까.”

오만한 비소였다.

* * *

오후 두 시 경.

한겨울치고는 제법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바깥을 바라보며, 로제타가 한숨을 폭 쉬었다.

“수도의 날씨가 온화하기는 해도 이 계절에 야외 행사라니요.”

이리안의 눈동자는 흔들렸고, 고개를 처박고 열심히 케이크를 먹고 있던 샤를리즈의 어깨가 미세하게 튀어 올랐다.

로제타의 다음 말을 예감한 탓이다.

“어쩔 수 없이 또 겉옷을 사야겠네요.”

이리안이 절박하게 물었다.

“겨울 사냥제에 입은 옷이면 괜찮지 않을까요, 이클리스 양?”

“흐응? 야외 연회는 고작해야 서너 번뿐인데 그때마다 같은 옷을 입다니요.”

로제타가 눈을 번뜩였다.

포식자 앞의 피식자처럼 둘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꼭 맞잡았다.

하지만 로제타는 곧장 일어서는 대신 샤를리즈를 깊게 응시했다.

그리니티 연회홀에서의 일로 말이 많았다.

샤를리즈가 언제 호신술을 익혔냐는 말은 리엔타 공작이라면 딸이 걱정돼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는 말로 금세 관심 외가 됐다.

그랬지만…….

‘공녀님. 질투심 유발 작전, 다음 상대는 못 찾으실 것 같아요.’

엘루이든 대공의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함이 뻔한 샤를리즈의 행동을 대다수 귀족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소비했다.

누구는 공녀의 장단에 맞춰준다면 리엔타 공작이 떡하니 돈을 내어줄 테니 꽤나 구미가 당긴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 성질머리에 퍽 훌륭한 호신술까지 익혔다는 사실이 퍼지자 언제 가벼이 입을 놀렸냐는 듯 딱 다물게 된 것이다.

‘에효.’

로제타는 따뜻한 차를 삼켰다.

이리안이 슬쩍 말했다.

“연회라고는 해도 보물찾기니까 찾아다니다 보면 덥지 않을까요?”

“그래도 그때까진 추울 테잖아요. 앞으로 보름도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야죠.”

‘어, 어떡하죠. 공녀님.’

‘이리안. 이번에는 내가 해 볼게.’

“로제타. 이리안. 묻고 싶은 게 있어.”

직전까지 케이크를 먹었다고는 생각도 못 할 만큼 입술에는 크림 하나 없었다.

그저 크림이 아까워 열심히 입속을 겨냥해 날랐을 뿐이지만 빈틈없어 보이는 무적의 얼굴로 샤를리즈는 고개를 비틀어 창밖을 응시했다.

이것도 그저 로제타를 슬그머니 피한 것에 불과했으나 겉보기로는 차가운 시선에 불과했다.

“내 친구의 일인데 말이야.”

“아하, 공녀님의 친구분 일이요?”

단연 샤를리즈의 일일 터였다. 저번처럼 연회에 가기 싫다는 말일 수도 있지만, 로제타는 다소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로제타가 흥미로워해요!’

이리안이 손을 꼭 잡으며 반색했다.

“내 친구가 누구를 좋아하는데. 그 상대도 내 친구가 좋대.”

“……그래서요?”

로제타는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으니, 저 질문은 이리안의 것이었다.

“그럼 만나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큰 문제가 있어.”

“무엇인데요?”

샤를리즈가 흐린 눈을 했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은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린 특정한 과거. 장소는 자연광이 환하게 들어찬 어느 집무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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