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말 안 할래.”
‘고, 공녀님!’
이대로 의상실이 문을 닫는 시간까지 순조롭게 버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이리안의 낯빛이 탈색되듯 하얘졌다.
샤를리즈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 보니 이리안은 전시회 준비로 한창 바쁘지 않아?”
“네? 별…….”
‘안 돼!’
손을 꾹 잡자, 이리안이 샤를리즈의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방싯 웃었다.
“별로 바쁘지 않아요. 설령 바쁘더라도 공녀님과 이클리스 양을 만나기 위한 시간을 뺄 수 있고요.”
‘이리안…….’
샤를리즈가 작게 훌쩍였다.
‘두 시간이기도 하고, 로제타가 쇼핑을 좋아하는데, 피하기만 할 수는 없지요.’
‘이리안…….’
그러나 마담의 바짝 잡힌 기강은 샤를리즈가 당시의 일을 잊은 현재도 유지되고 있었다.
“공녀님의 일행분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바로 문을 닫아걸었을 때부터 참극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비극의 시초였다…….
그렇게 장장 다섯 시간이 넘는 강행군이 시작됐다.
* * *
벌써 꽤 늦은 시간이 됐다.
아직 샤를리즈가 의상실에 있다는 말에 칼릭스는 어린 조카의 침실을 찾은 차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새근새근 자그마한 숨소리가 들렸다.
어린아이치고 늦게 자는 편이었던 사샤의 생활 습관은 이제 완전히 바뀌었다.
[일찍 자야 키가 많이 커.]
그 말을 하는 샤를리즈의 표정이 어찌나 진중했던지, 사샤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잘게요.]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칼릭스는 깊게 잠든 아이의 이마에 가볍게 웃음을 흘리고 방을 나섰다.
[오늘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집무실로 올게요.]
샤를리즈는 한 말을 반드시 지킨다.
지키기 위해 그를 다시 찾으리라는 사실보다도 그런 확신을 얻을 만한 시간을 함께했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집무실에 도착한 칼릭스는 서류를 적절히 분배했다.
[아라스픽스라는 목재가 눈에 자주 띄어서 물어보니 동대륙에서 선호된다고 하더군요.]
책상에 올린 서류는 카타리나 황후가 제 친동생 유르겐 리닉스를 앞세워 하는 여러 사업 중 무역에 관한 보고서였다.
샤를리즈의 말을 듣고, 불현듯 뇌리를 스친 의구심에 곧장 문건을 입수해 검토한 것이다.
“종교적 색채가 담겨 선호하는 물건인데…….”
서늘한 색감의 눈동자가 슬며시 기울어졌다. 그 끝에 있는 종이에는 그 단어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황후의 산하에 있는 상단은 취급하지 않는다. 비단 황후뿐 아니라, 다른 무역상들도 마찬가지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칼릭스는 기꺼이 시선을 옮겼다.
줄곧 단단히 다물려 있던 입술이 느른히 휘어졌다.
“결정했어?”
“예.”
샤를리즈가 고개를 간결하게 끄덕였다.
“해 보죠.”
“너무 비장해…….”
칼릭스가 낮게 웃었다.
한편, 기력이 쪽 빨려 쪼글쪼글해진 샤를리즈는 흐리게 과거를 되짚었다.
세상사란 무릇 알 수 없는 노릇이라는 진리는, 즐겨 읽던 소설 속 악녀로 환생한 시점에 이미 뼈저리게 실감했는데 또 이렇게 알게 되었다.
인생은 정말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까, 모든 건 시곗바늘을 되감아 오늘 이른 오전 시작되었다.
* * *
“그래. 사랑하고 있어.”
“어째서 말입니까!”
꼭 취조하는 기세의 물음 같기도 해서, 나는 조금 더 길게 덧붙였다.
“제가 그렇게 귀찮게 굴었는데, 어떻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품게 되셨는지 신기해서 말이에요.”
“아주 오래전부터. 어쩌면 처음부터라는 생각이 들어.”
칼릭스가 눈을 내리떴다.
“공녀가 나를 사랑하게 되었던 건, 내 감정을 그대가 먼저 눈치챘기 때문이 아닐까.”
저 목소리는 반칙이다. 두 가지 버전의 원작 그럼에도 두 주인공은 그대로인 세계 속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오,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든 거다!
“부끄럽지만 겁이 많았어. 공녀의 곁에 계속 있고 싶어서. 다가가면 멀어질까 봐 머뭇거리고, 성급하게 굴고 싶지 않아서…….”
칼릭스는 드물게도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불현듯 깨달았다.
계속 의심했다. 의심하고 싶었다. 그의 감정이 진짜가 아니라고.
그건 멀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한 달도 가기 힘든 감정 때문에 다시는 보지 못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멀어져도 상관없어서 한 고백이 아니었다.
로제타의 조언이 뇌리를 스친 것은 그때였다.
[아무튼 사랑하세요. 표현하세요. 그럼 혼자 품고만 있을 때보다 빨리 질릴 테니 들키고 마세요. 원래 사랑이 그래요.]
이미 시작되어 버렸다.
‘어쩌면 빨리 끝나는 게 나을지도 몰라.’
피할 수 없으면 부딪치는 게 인지상정.
빨리 해치우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는 게 생산적이다.
“사실 저도 그래요.”
나는 눈을 번뜩였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응, 아주 멀지.”
“그리고 많은 길을 돌아왔지만…….”
“맞아. 아주 크게 돌아왔어.”
칼릭스가 내 왼손을 조심스레 쥐었다. 약지 손톱에 닿는 촉감이 폭신했다.
“우리,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자.”
“…….”
한순간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마치 해야만 하는 일을 앞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빨리 해치우려고 했는데.
‘나는 이미 두려워.’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 혼자 두렵지는 않을 거라는 것이다.
“오늘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집무실로 올게요.”
그러니 그 말을 할 때 이미 답은 정해져 있던 셈이다.
* * *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나는 창밖을 멍하니 응시했다.
‘달라진 게 없는데?’
뭐, 당장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고 세상이 달라지진 않지만, 그 당사자들은 달라져야 하지 않나?
나는 마침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아 물었다.
그러자 리반이 썩은 오렌지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말만 친구, 친구지 친구끼리 누가 손깍지 낍니까!”
오랜 세월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던 나는 충격 받았다.
“그러게……. 리반과 손깍지를 낀다니 상상하고 싶지도 않기는 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주시다니 입이 덜 번거로워져 감사하군요.”
“방금 그대가 한 말이 더 길었어.”
“심적 고통은 왜 빼십니까?”
야멸차게 대꾸한 리반이 스르르 사라졌다.
나는 우수에 잠긴 사람처럼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목재를 필리엄 백작이 이미 선점하고 있으니 황후는 시장성이 없다고 생각해 취급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물론 있어.]
‘흠.’
경고 안 들어먹어서 그런가. 신수와 계약한 이후로는 꼭 신성력을 겪고 칼릭스와 마주치지 않아도 꿈을 꿨는데 잠잠하다.
‘모레가 야외 연회니까 오늘 해 보자.’
내일은 안 된다. 체력을 비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 때 아드리안을 만나게 되려나.’
……아드리안의 모친. 꽤 침울한 기분이 되었다.
그야, 저런 자들의 손속을 알고 있는 탓이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 같은데.’
살아 있는 사람은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른다. 모친의 목숨을 목줄 삼아 좌지우지하고 있으니, 모친이 이미 자진했다는 소식이라도 어떻게 보낸다면 대비할 새 없이 꽤 여러 가지를 아는 아드리안을 놓치게 될 터다.
‘……그래도 살아 있을 수도 있지.’
여태까지는 아드리안이 상부의 명으로 내게만 집중할 수 있어 긴박하진 않았으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테오도르 바나첼을 내게 접근시키고 있으니 굳이 두 명이나 붙일 필요는 없는 거다.
‘일단 오늘은 그 꿈, 꿔 보자고.’
시간상 교황이 샤를리즈를 욕하는 장면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신수를 불러 신성력을 조금 받으려다가 절레절레 고개 저었다.
‘또 갑자기 기절하면 놀랄 테니까.’
[리엔타 공작께는 죄송한 마음이 커. 공녀가 아직도 종종 혼절하는데, 감추고 있으니까.]
이대로라면 마음씨 착한 칼릭스가 양심의 가책을 못 이기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럼 지옥의 검진 2탄의 막이 오르게 되는 것이다.
나는 금세 핼쑥해져 후다닥 집무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럼, 내가 봐도 되겠군.”
“예?”
칼릭스가 느슨한 동작으로 턱을 괴었다.
“그런데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니, 꼭 운명 같…….”
“잠시만요!”
진짜 운명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나는 슬쩍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
“어디에 또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한 명은 또 있을 테니까요.”
칼릭스가 일순 묘한 얼굴을 했다.
“그 확신은, 어디서 얻었지?”
“눈을 마주하면 미래가 보이는 거, 다른 사람과도 가능하더군요.”
말하고서 깨달았다.
‘아, 맞다. 이거 칼릭스로만 가능하다고 말했던 적은 없었잖아.’
괜한 말을 꺼내버렸다. 멋쩍어져 있는데, 나직한 물음이 귀에 닿았다.
“누군데?”
* * *
그리고 꼭 이틀 뒤.
나는 그 누구를 내 뒤로 숨기게 된다.
“황후. 황후―!”
안토니오 황제가 울부짖었다. 황제의 품에 안긴 황후는 힘없이 축 처진 채였다.
“도, 돌아가신 거예요?”
“입 조심하거라!”
부친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여식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공녀님.”
로단테가 내 옷자락을 꾹 쥐었다. 나는 그 손등에 내 손을 겹쳐 토닥였다.
퍽 먼 거리였지만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리닉스 공작이 빨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