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야외 행사 당일.
그날은 날씨부터 구렸다.
“구름 덕택에 고되지 않겠습니다!”
손바닥 열심히 비비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기분이다.
저번, 불미스러운 일이 있던 연회홀의 참석객과 지금이 같다는 것을 아는 귀족들의 절찬 아부쇼가 펼쳐지고 있었다.
‘황제가 없는데도 이러니 그 앞에서는 더하겠군.’
한겨울의 야외 행사이다 보니 13세 미만 아이들의 불참은 허가했지만, 이 뜬금없는 행사 자체가 그쪽으로도―연회홀에서의 일은 역시나 수상하고, 그래서 그때 자리한 너희를 의심하고 있으며 지켜본다― 해석되는 탓이다.
‘황제 자식, 살판나겠어.’
뚱하니 허공을 노려봤다. 갑자기 주변에서 “힉!”하는 소리가 터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샤를리즈가 워낙 험악한 인상인 탓에 저런 한 음절은 샤를리즈 주변에 사람이 지나가고 있다는 신호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미참석에 사샤와 루카스는 예외였다.
‘못된 황제 같으니라고.’
별로 옷을 껴입히지도 않았는데 동글동글해진 아이는 칼릭스와 함께 행사 시작 직전에 도착할 예정이다.
순순히 황제의 명을 따른 데는 신수의 의견이 한몫했다.
[―호오. 마침 잘 됐구나. 당장 가시적으로 개화 속도에 영향이 있지는 않아도 분명 도움이 될 테다.]
황제는 벌써 칼릭스에게 날을 세우고 있다. 사샤를 위해서라도 얼른 신성력이 완벽히 개화해야만 한다고, 칼릭스도 나도 생각이 같았다.
‘이건 원작을 아는 나보다도 칼릭스가 더 잘 알겠지.’
세상에 완벽한 보호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제국민의 경애와 정치적 기반도 상당했던 형을 그렇게 잃었으니까.
리엔타 일행을 기다리며 주변을 슬쩍슬쩍 둘러보았다.
‘……아드리안은 없나.’
저번에 연애 종료를 말하러 간 김에 연락용 마도구를 쥐여 주려 했더니 아드리안은 거절했다.
[이런 값비싼 마도구를 들키기라도 한다면 상황이 더 복잡해질 겁니다. 대신 서신이나 전서구를 이용하겠습니다.]
‘합숙 생활을 하나 봐.’
저 말인즉슨 아드리안이 먼저 접근하지 않으면 내가 닿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모친이 관계되어 있으니 오긴 할 테지.’
어제, 머리가 깨져라 두 가지 버전 원작 모두를 복기했지만 마땅히 소득은 없었다.
정정하겠다.
머리가 깨질 뻔했던 건 저거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군데?]
‘……흠.’
나는 코밑을 슥 훔쳤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저 때는 코피 터졌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지.’
하도 시각적 자극이 강렬했던지라 나는 내가 흉한 꼴을 보이리라고 확신했다.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며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나갔고, 방에 도착하자마자 기어코 코피가 터졌다.
대충 막고 잤다가 이튿날 레아가 흐느끼며 깨우는 소리에 머쓱하게 일어났던 게 어제 일이다.
‘옷 갈아입고 세수하자마자 게릭이 와서 진료를 봤었고.’
[짐작 가시는 부분이나 통증이 있으셨습니까?]
‘심장이 아팠어. 눈이 부셨지.’
차마 그 말은 할 수 없어 모르겠다고 했다가 온종일 침대에서 요양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렇게 저 대화는 흐지부지 일단락됐다.
“샤를!”
리엔타의 인장이 새겨진 마차에서 공작이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역시 토끼…….’
“날이 추운데 어째서 외투는 한 벌만 입은 게냐! 목도리도 두르지 않고.”
리엔타 공작이 엄하게 꾸짖고는 제 목도리를 나한테 칭칭 둘렀다.
‘어, 간지럽다.’
결국 재채기를 하자, 공작은 “샤르을!”하고 울먹였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사람들이 많았다.
‘일 났다.’
이러다가 아버지가 눈물을 보이시면 얕보이는 건 시간문제다.
코밑까지 둘둘 말린 목도리의 재질이 천이 아니라 웬 털이라서 이런 것뿐이라고 황급히 해명하려던 나는 멈칫했다.
‘어어?’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두 번째는 의심스럽다. 물기 한 점 없는 공작의 눈을 멍하니 보다가 속닥였다.
“혹시 아버지가 대외 활동을 하기 귀찮을 때 보내는 대역 인형입니까?”
‘뭐?’‘어, 아닙니까?’‘뭐?’‘……맞나 본데?’ 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신비로운 약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런 약도 있다니!”
그렇다면 어딘가에 필시 체력을 증진시키는, 아니, 도움이라도 주는 약이 있을 터.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물었다.
“그거,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글쎄다……. 들은 기억은 있는데 가물가물하구나. 집사가 잘 알고 있을 테다.”
“그렇군요.”
“샤, 샤를?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는 거니…….”
간 작은 아버지를 위해 집념으로 불타는 눈을 서둘러 갈무리했다.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로단테는요?”
“함께 왔다.”
이윽고 공작은 나 못지않게 집념으로 화르륵 불타오르는 눈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끌려 사라졌다.
멀어지는 등에 대고 가볍게 손을 흔들흔들하고는 마차에 들어갔다.
로단테가 반가운 눈을 했다.
“공녀님.”
‘모자. 목도리. 장갑. 복슬복슬 귀마개. 좋았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소리 죽여 말했다.
“로단테. 지금이라도 돌아가도 좋아.”
나는 그때를 반추했다.
로단테에게 네가 아주 커다란 신성력을 갖고 있어서, 원한다면 신전의 가장 높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했던 날 말이다.
소년은 조금 망설이다 물었다.
[제가 신전에 가지 않는다면, 신관의 자질이 있는 사람을 숨겨 줬다는 이유로 공녀님께 피해가 가나요?]
[아니.]
그러자 로단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살고 싶어요.]
[공녀님. 만약 공녀님을 만나지 못하고 교황이 된 제가 어딘가에 있다면, 분명 저를 부러워하고 있을 거예요. 저처럼 되고 싶어서 말이에요.]
로단테가 그때처럼 웃었다.
“아니요. 공녀님의 기쁨이 제 기쁨인걸요.”
“그러지 마. 네 기쁨은 온전히 너의 것으로만 채워.”
마주한 주홍색 눈에 따뜻한 물결이 쳤다.
“그렇다면 아카데미 합격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이럴 수가.”
나는 탄식했다.
“후견인 실격이야.”
“공녀님은 바쁘시니 말씀드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시험 날에 교문 앞에서 응원해 주고 싶었는데…….”
시무룩해 있던 나는 금세 기운을 차렸다.
“입학할 때는 나 꼭 데려가야 해?”
“네. 그럴게요.”
엔젤도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에 나는 손뼉을 짝짝 쳤다.
“그럼 입학식 전에 조촐하게라도 파티를 열자. 사샤도 축하하고 싶어 할 거야.”
나는 이미 한 번 파티를 성공적으로 끝낸 경험자다. 눈을 번뜩이며 구상하다가 시간이 거의 다 됐을 무렵 후다닥 회장에 도착했다.
“이렇게 모두 참석해 주어 고맙네.”
어쩐지 돌려쓰는 것 같은 황제의 축사가 끝나고, 행사 안내가 이어졌다.
“황성 소속 마법사가 아닌가?”
보물찾기이다 보니 어린애 장난 같은 일을 하기 싫었던 고상한 귀족들은 이 자리를 틈타 교분을 다지고자 했겠지만, 상황은 다르게 돌아갔다.
약하게 반짝거리는 보물을 진짜로 사냥하듯 특수한 총으로 갈기면 빛기둥이 하늘로 솟아오르며 앞으로 보물이 몇 개나 남았는지 숫자 표시가 뜬다고 했다.
대신 말은 불허됐다. 말발굽으로 바닥을 마구 파헤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신전의 숲이 훼손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재밌겠어요!”
나도 눈을 빛냈다.
보물은 찾는 사람의 소유로 허가하겠다는 대목을 들은 시점에서였다.
‘보석이겠지?’
암시장에 팔아서 비자금 창고 채워둬야지. 음흉하게 웃던 때, 종달새처럼 순수한 심성을 가진 친우가 얼핏 보였다.
“공녀님. 함께…….”
“쉿. 이리 와요.”
이리안은 아차 하더니 로제타를 따라 뒤돌기 전, 작게 웃었다.
‘……흐뭇한 미소?’
알쏭달쏭한 기분이 되어 있던 순간은 짧았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샤를리즈. 여기 있어.”
칼릭스가 장총 하나를 건넸다. 특수 장치가 되어 있다 보니 지급받아야 했는데, 덕택에 시간을 줄였다.
히히 웃으며 감사하다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입술 밑의 작은 점이 뚜렷하게 보일 만큼 말이다.
뻣뻣하게 굳어 있는데, 칼릭스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샤는 따로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장총을 확인해 봐, 샤를리즈.”
얼굴 공격에 무력화되었던 나는 금세 정신을 챙기고 장총을 구경하는 척 확인해 보았다.
‘그러게. 조금 수상해.’
탄환이 네 발 들어 있었다.
‘한 명이 보물을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게 이런 거였군.’
무게로 보아하니 진짜 탄환이라는 점을 생각하자면 과연 저 용도만을 위함인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결의에 찼다.
‘이걸로 파티 자금 대고 만다. 그리고 황후가 참석하기는 했지만, 혹시 모를 일이니까 칼릭스랑은 이만 안녕해야겠어.’
눈치 빠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얼굴 근육을 가다듬은 때였다.
“또 그 얼굴이네.”
칼릭스가 중얼거렸다.
“공녀 혼자만 감수하겠다는 얼굴.”
모양 좋은 입술이 마치 웃듯 벌어지고,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함께 하기로 했잖아.”
분명 두 생을 통틀어 처음 들었는데도.
어딘지 그리운 저 말을 나는 아주 오래도록 기다린 것 같았다.
* * *
미래의 조각에서 읽어 예상한 아주 나쁘고 못된 짓거리는 당연하게도 숲에서 벌어졌다.
“크헉!”
‘벌써 두 번째로군.’
칼릭스가 손쉽게 정리했다지만, 음습한 의지가 느껴진다. 나는 차오르는 분노를 건설적으로 발산했다.
“축하해.”
칼릭스가 예쁘게 웃었다.
‘……보석 하나는 칼릭스에게 선물하는 것도 괜찮겠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다.
“벌써 두 개나 찾다니, 대단해.”
“아닙니다.”
나는 뿌듯하게 어깨를 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세 번째를 쟁취하고 암살자를 또 만났다.
“흐음.”
칼릭스가 묘한 숨을 흘렸다.
나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되게 허술하잖아.’
포획은 할 수 없도록 바로 자결해 심문은 불가하지만 저것 말고는 대체로 허접했다.
일단 여러 명이 한꺼번에 에워싸는 게 아니라 한 명씩만 깔짝거리고 있는 게 이상하다.
‘그래, 리닉스 공작은…….’
[황후가 참석한다면 정리하고, 참석하지 않는다면 공녀를…… 납치해야 하니까.]
‘리닉스 공작이 보낸 암살자들이 아니거나, 아니면 황후가 참석해 나한테 총력을 다하지 않았거나.’
그렇다면 후자는 어떤 상황에 해당하는 걸까. 몇 가지 가능성은 금세 알 수 있었다.
탄환 한 발은 남겨둬야 한다.
나는 또 한바탕 이불을 만끽하게 만든 일 때문에 애써 떠올리고 있지 않았던 어제를 기억했다.
은근슬쩍 지칭하지 않고 있던 주어를 마침내 입에 담았다.
“칼릭스. 저기.”
칼릭스가 흔들리는 꽃처럼 하늘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희미한 빛을 저격하는 데 시간은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다.
동시에 허공으로 빛기둥이 솟아오르고, 나는 서둘러 보물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칼릭스의 손을 잡고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