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리닉스 공작이 제 딸을 대상으로 선택한 정리라는 표현을 나는 제거로 알아들었다. 그야말로 권력 앞에 가족도 내버릴 수 있는 패륜이었지만 쟤네는 원래 그랬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금은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그 집단과 신전이 관계되었을 가능성은 높고, 그렇다면 신전에서 황족 살해가 일어나진 않겠지.’
고결, 거룩, 신성함. 그런 가치는 단숨에 빛 바라기 마련이다. 작은 실책만으로 무너지지만 쌓아 올리기는 힘드니 신전을 장소로 내어주기 힘들 터.
리닉스 둘이 치고받고 싸우다가 전력이 약해지거나 한쪽이 없어지면 나야 좋은 일이지만 말이다.
회장으로 이동하는 사이에도 빛기둥은 계속해 솟아올랐다.
칼릭스는 내가 가리키는 곳을 연달아 조준했고, 단 한 발도 엇나가지 않았다.
회장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타앙―
나는 아껴 두었던 탄환 한 발을 마저 사용했다. 빛기둥 사이로 손을 뻗어 보물을 쥐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폐하께서는 왜 하필 신전의 숲을 장소로 지정하셨을까요.”
맥락 없이 튀어나온 질문이었지만 칼릭스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사냥감에게는 빠른 다리가 거슬리기 마련이야. 하지만…….”
푸른 눈동자가 언뜻 무상하다 싶을 만큼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크악!”
장총을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 괴한이 쓰러졌다. 주변을 서늘하게 살핀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황후 폐하의 개인적인 선호도도 반영됐을 거야. 신전의 숲을 몹시 좋아하시거든.”
그 선호도에는 흑마법도 꽤나 공헌했을 거다.
나뭇잎으로 칼릭스의 장총을 싹싹 닦으려고 하자, 그가 웃으며 대신 닦았다. 그사이 나는 주변을 탐색했다.
‘이번이 마지막 발이었는데 마찬가지로 한 명.’
그 순간 나는 미간을 좁혔다.
지켜보는 눈이 많아 숲의 외부에서는 하기 다소 어려울 말을 빠르게 읊었다.
“한 명씩 보내는 건 시간을 끌며 우리를 숲에 묶어두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탄환을 모두 다 소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빛기둥이 솟아오르는 건, 그때 우리의 알리바이도 되고요.”
칼릭스는 가만히 내 말을 경청했다.
“실제 총탄과 같으니 남겨 두었다가는 숲에서 귀족 누군가를 살해했다거나 치명상을 입혔다는 일에 휘말릴 것 같았거든요. 누명과 위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차라리 후자가 낫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암살자가 한 명만 나왔다는 말은, 다른 목적이 있다는 뜻이겠죠.”
칼릭스가 다시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숲을 마저 빠져나왔다.
회장은 따분해 보일 만큼 평화로웠다.
나는 칼릭스에게 자세를 낮춰달라는 손짓을 했다. 칼릭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응, 샤를리즈.”
참고로 나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
꼭 머리카락이 엉겨 붙은 것처럼 간지러운 볼을 긁적이며 서둘러 말했다.
“사샤 곁에 계……. 아닙니다. 데리고 와 주세요. 다른 데 가시면 안 됩니다?”
나는 다리를 움직여 칼릭스의 정면에 서서 눈을 사납게 부라렸다.
아까는 내게 암살자가 확실하게 찾아올 예정이었으니 칼릭스를 떼어 둘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행사를 일부러 사냥 형식으로 몰아간 칼릭스를 시방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음.”
칼릭스가 또 고개를 기울여 웃었다. 그런데 그게 꼭…….
‘어, 어라.’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진짜로 그런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내 눈에 보였고, 나도 고개를 같이 기울이게 됐고, 얼굴이 변색됐다.
아마도 불타는 고구마 그 자체였을 내 얼굴을 보고 칼릭스는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다.
“안 지키시면 리반 꼬실 거예요.”
적당한 거리에 있던 리반을 보며 말했다. 얼굴이 하얘서 순간 걱정됐는데, 저 체력 약한 자는 원래 낯빛이 저렇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래서 같이 빈둥댈 겁니다.”
일만 하는 사람이라서 협박할 게 이것 말고는 없다니……. 으르렁거리듯 겁박하면서도 눈가가 절로 촉촉해진다.
칼릭스가 손가락으로 턱을 두드리며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그럼 큰일이야.”
“맞습니다. 아주 큰일입니다.”
“공녀와의 약속을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되겠어.”
“그렇습니다. 아주 좋은 자세였어요.”
“그럼…… 나랑도 약속해 줘.”
칼릭스가 자그맣게 웃었다.
진중한 얼굴에서 바로 제비꽃 같은 미소로 변하다니 그 기세란 대단했다. 나는 어지러운 기분이 되어 묵묵히 경청할 준비를 했다.
“공녀의 하루를 내게 줘.”
“아, 외출이요?”
나는 흔쾌히 수긍했다. 그리고 손끝을 모아 칼릭스의 귀에 대고 맹세했다.
“제가 아주 근사한 하루를 만들어 드릴게요. 예행 연습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예행 연습이라면 바나첼 후작인가?”
칼릭스도 손끝을 모아 내게 속삭였다.
‘흠. 간지럽군.’
귀뿐 아니라 온몸이 그랬다. 나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칼릭스는 나를 내려다보며 ‘마치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같이 조금 착잡해 보이는 얼굴을 했다.
“예행 연습은 필요 없어. 뭐든 즐거울 테니까.”
하긴, 수도의 디저트 가게 중 맛없는 곳이 있을 리가 없다.
또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칼릭스가 내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며 눈을 마주했다.
“방금 한 건 질투였어. 나와 하는 걸 후작과 먼저 하려고 하지 마.”
부루퉁한―후일 리반에게 이 순간을 물어보니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뒷걸음질로 내게서 멀어졌다― 표정으로 나를 샐쭉 바라본 칼릭스는 이윽고 평소의 얼굴로 사샤를 데리러 갔다.
그렇게 멍청하니 서 있을 때였다.
“어머. 벌써 다 찾으셨어요?”
분명 영애들과 어울리고 있던 로제타가 언제 왔는지 모르겠다.
“으응. 네 개나 찾았어.”
주머니를 뒤적여 보여 주자 로제타가 “어머나.” 하면서 구경했다.
“안에 무엇이 들었을지 궁금한걸요. 그래도 곧 보물을 모두 찾을 테니 알 수 있겠죠.”
뭐가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상자는 지금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졌다. 아니, 지금이 아니라 아까 전부터였던 것 같기도 했다.
“공녀님은 무엇이 들어 있을 것 같으세요?”
“보석.”
단호한 대답에 로제타가 동조했다.
“그게 가장 무난하긴 하죠.”
“그나저나 로제타는 왜 참여하지 않았지?”
“큰 소리가 싫어요. 걷는 것도 싫고. 옷이 망가지는 것도 싫어서 말이에요.”
“이리안도 같이 있었어?”
“이리안은 숲을 산책하겠대요. 아, 저기 오네요.”
셋이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얼마 되지 않아 마지막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행사의 끝을 알리는 뿔고둥 소리가 크게 울렸으니 곧 모두 빠져나올 것이다.
“샤를 님!”
나는 당장 쪼그려 앉아 사샤에게 보물을 자랑했다.
루카스랑 한바탕 뛰어놀았는지 조금 꼬질꼬질해진 아이가 흥분으로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내었다.
“대단하세요!”
내 어깨가 귀에 닿을락 말락 하게 되었을 무렵. 때마침 다가온 리엔타 공작에게도 구경시켜주고 헛기침했다.
“아버지는 보물 몇 개를 습득하셨습니까?”
“나는 로단테와 산책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눴지.”
설마 아카데미 입학을 앞둔 예비 신입생에게 ‘나 때는’을 시전하셨나 싶어 부랴부랴 로단테의 얼굴을 살폈는데, 그건 아닌 듯했다.
“네가 피후견인을 잘 알아봤더구나.”
“제가 원래 잘 봅니다.”
“맞아. 샤를 너는 예전부터 그랬지. 모조품과 진품을 알아보는 건 예삿일이었어.”
‘예?’
그것 말고는 없는데요……?
또 딸을 너무 좋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물어보려던 차, 황제놈의 폐회사가 하여튼 낄 데 안 낄 데 모르고 시작됐다.
“갑작스러운 행사에 모두 참석해 주어…….”로 시작한 말은 이렇게 끝났다.
“……이제 보물을 개봉할 차례로군. 습득한 이들은 모두 앞으로 나오게나.”
나는 칼릭스의 옆얼굴을 슬며시 훔쳐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살짝 돌린 칼릭스가 여상히 웃었다.
“사샤. 상자를 여는 것을 도와줄 수 있겠니?”
사샤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커다란 손 아래 아이의 작고 하얀 얼굴이 발긋했다.
먼저 달려간 이들이 있어 벌써 상자는 까지고 있었다.
‘역시 보석이군.’
돈 좀 많이 쓰지 복불복이 심했다!
“폐하. 제 보물은 조카가 개봉해도 되겠습니까?”
황제는 얇은 입술을 가까스로 올렸는데, 특정한 목표가 있어 저런다기보다는 매사 칼릭스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연장선에 가까운 듯했다.
“그리하여라.”
“덕분에 아이가 즐거운 추억을 갖게 되었군요.”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안토니오 황제는 입술을 씰룩여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사샤가 작은 손으로 리본을 꼼꼼하게 풀었다. 상자 뚜껑을 열고 그대로 기울여 사람들을 향해 내부를 보이고는 상자에서 보석을 꺼내 제대로 한 번 더 보여 주는 극강의 야무지고 똘똘하고 영민한 면모까지 선보였다.
“어머. 귀여우셔라.”
나는 그런 탄성들을 야무지게 귀에 담았다.
‘나중에 사샤한테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고 깜찍했는지 말해 줘야지.’
칼릭스의 것은 사파이어 한 개와 오팔 세 개였다.
“사샤. 고맙구나.”
사샤가 희미하게 웃었다.
“내 것도 부탁해도 될까?”
“네.”
그새 숙련된 사샤의 손길 아래 내 상자들도 속속들이 개봉됐다.
“어머.”
“세상에…….”
“역시 공녀는…….”
‘대, 대박이잖아!’
나는 눈을 번뜩였다.
사파이어, 에메랄드, 루비. 귀족들이 선호하는 보석들이 고루고루 나온 것이다.
무심코 고개를 틀었는데, 시야에 리엔타 공작이 걸렸다.
특별히 내가 가족을 잘 알아봐서는 아니고, 놀란 얼굴의 귀족들 사이에서 지극히 당연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게 컸다.
‘알고 보니 나, 기억 못 할 만큼 어렸을 때 상단이 둘 중 무엇을 더 취급하면 재산 축적에 더 도움 될지 기막히게 골랐다거나?’
그래서 상단이 더 부흥했다거나?
그럼 나도 부자가 될 수 있다거나!
속으로 히히 웃고 있던 때. 마지막 상자의 리본이 사르륵거리며 떨어졌다.
“응?”
귀족들의 얼굴이 아리송해졌다.
그건 그들보다 내부를 조금 일찍 볼 수 있던 나도 그랬다.
‘……저게 뭐지?’
투명한데 다이아몬드는 아니었고, 마치 햇빛을 받은 스테인드글라스 같지만 오팔의 일종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다만, 위화감이 들었다.
나는 보석에 가까워지는 작은 손을 붙잡았고, 칼릭스는 상자를 본인 쪽으로 당겨 사샤와 멀어지게 했다.
그건 정말로 동시였다.
시선이 맞닿은 순간은 찰나였으나, 분명한 감정 한 가지를 우리는 공유했다.
그리고 의아함이 번져도 나를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 아이의 유순한 푸른 눈과 마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하늘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