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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43) (143/232)

143화

“어머. 비가 오려나요?”

곤란하게 되었다는 듯 어느 귀부인이 미간을 좁혔다.

나는 온몸에 힘을 빡 주고 있었다.

‘목이 간질간질한데 예고인지 기분 탓인지 모르겠군.’

내 건수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황제 앞에서 피 토하면 불길하다고 매도당하기 십상.

시종이 황제의 귀에 무어라 속삭이고 있으니 곧 행사가 파할 것이다.

그때, 칼릭스가 움직였다.

눈매를 가늘게 좁힌 채 이름 모를 보석을 바라보고 있던 얼굴에는 어느새 그린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보기 드문 상등품이로군요.”

그리고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듯 멈칫했지만 짧았다.

길고 가지런한 손가락 끝에서 이름 모를 보석이 마치 빛을 반사하는 거울처럼 빛났다.

먹구름이 짙게 낀 하늘 아래, 우중충한 분위기를 가르는 반짝임에 귀족들이 탄성을 흘렸다.

“세상에. 아름다워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칼릭스의 표정 변화에 대해서라면 나는 바로 알 수 있다. 칼릭스의 속눈썹이 몹시도 미세한 각도로 기울어졌다.

그렇다. 영혼에 각인된 숙명적인 기질이 발휘된 것이다…….

보석을 손 안에 그러쥐는 얼굴이 무표정했다. 표정 관리에 능숙한 남자가 순간 내비친 명백한 균열을 눈치챈 이들은 다행스럽게도 없었다.

휘이익―!

한순간 시선을 사로잡아 버린, 더한 상황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 * *

마치 겨울 사냥제로 시간을 돌린 것만 같다.

사방에서 폭음이 이어지고, 비명 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돌이켜보니 겁박 목적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은 이전과 달리 이번은 명백한 공격이 가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도무지 인력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없는 속도였다.

“대열을 유지하라!”

황실 기사들이 엄호하는 뒤로 몸을 숨긴 채 바들바들 떠는 귀족들도 있었고, 일단 화살을 피해 마차로 뛰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카타리나는 혼란 속에서 두 눈을 부릅뜬 채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투명한 황동색이 간악한 색상으로 물든 것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이럴 수는 없을 텐데. 이럴 수가 없을 텐데!’

“황후. 먼저 대피하시오.”

“그럴 수가 있나요. 폐하와 함께 가겠습니다.”

카타리나가 애써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실상은 혼자 남아 표적이 되기 쉬운 상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안토니오 황제가 사망에 이르기를 원치 않으니 황제 옆에 있다면 그녀를 암살하기 까다로워질 터였다.

“황후.”

안토니오 황제가 눈썹을 구기며 퍽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지 마시오. 나보다는 배 속의 황손을 생각해야 하지 않아. 무엇보다도 그대의 안전이 우선이오.”

“폐하…….”

대강 감동받은 목소리를 흘리고, 카타리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화살이 쏟아졌다.’

그들이 운용하는 흑마법의 메커니즘을 카타리나는 잘 알았다. 분명 저 단계를 이어지게 하는 매개체가 있었을 것이다.

짜증스러움이 설핏 튀어 오른 적안에 묘한 이채가 돌았다.

‘선황제의 아들이 공녀의 마지막 상자를 개봉한 때였지.’

카타리나가 이를 악물었다. 기껏해야 귀족들의 여흥을 위함이니 낮은 직급에서 이 일을 담당했겠으나 황성 내부에 그 집단 소속 인물이 있다는 것을 확인받은 셈이다.

더 두리번거릴 것도 없었다.

때마침 단상 바로 아래에서 상자를 개봉하고 있었으니 공녀와 선황자 역시 방패 뒤에서 엄호받고 있을 터였다.

‘폭탄이나 총이 아니라 화살. 즉살이 목표는 아니야.’

매끄럽게 단장한 얼굴이 문득 기묘해졌다.

‘혹시, 그리니티 홀에서도 내가 아니라 저 둘 중 하나를 노린 거였나?’

카타리나의 얼굴이 한층 미묘해졌다. 그들이 목표물로 지정한 사람의 목숨을 보전하게 두려는 이유를 알고 있는 탓이다.

‘그럼 선황자……, 아니지. 조금 전 선황자가 올라온 것은 대공의 즉각적인 선택이었을 터인데.’

붉은 입술이 어느 순간 아주 조금 휘어졌다.

‘잘만 하면 공녀를 완벽히 내 아래로 끌어들이고, 그 집단도 내 힘을 들이지 않고 파훼할 수 있겠어.’

카타리나는 지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네. 폐하의 말씀이 맞아요. 하지만…… 우리의 조카님도 함께 데려가는 게 좋겠습니다.”

황제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을 했다.

이래서 참으로 아쉬웠다. 황손을 생각하라니 뭐니 얼른 대피하라고 한 게 조금 전인데, 제 자리를 위협하는 작은 꼬맹이를 구명하려고 드니 그게 또 못마땅해 당장 알아야만 하겠다는 저 천성이 말이다.

“우리 아이의 하나뿐인 사촌 형제가 될 아이 아니에요.”

“뭐, 황후의 뜻이 그렇다면 그리하시오.”

대공의 총애를 받는 선황자의 호감을 일찍부터 사는 것보다도 이김에 죽으면 더 좋겠다는 속내가 여실히 보이는 표정이었다.

카타리나는 가타부타 덧붙이는 대신 뒤돌았다.

‘공녀가 목숨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지금이 적기야.’

바로 단상 밑으로 카타리나가 드레스 자락을 사뿐하게 잡고 달려갔다.

“……황후 폐하.”

자그마한 어깨를 잡자 파드득 뒤돌아본 푸른 눈이 커졌다. 카타리나는 온후하게 웃으며 공녀를 응시했다.

“함께 대피하자는 말을 하고자 왔네. 우리는 곧 가족이 될 사이가 아닌가.”

이윽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치 상태가 이어진다면 지치기만 할 터. 절반으로 나누어 안전한 장소로 엄호하게.”

“예. 황후 폐하.”

기다리고 있던 명령이 드디어 떨어졌다. 일리든 포르테의 노련한 지휘 아래 기사들이 대열을 재정비했다.

“그럼 우리도 가세나.”

“황후 폐하의 깊은 은덕에 감사드리지만, 감히 폐하와 함께 수호받을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리엔타 공녀.”

본래라면 그렇다니 알겠다며 물러난 후 적당한 때 서신을 보내 약속을 잡았을 터였다.

그러나 줄곧 거슬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분명 이 거대한 제국의 황후이며, 황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일한 사람이건만 그 간교한 흑주술을 사용하는 천박한 술사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러니까, 그녀의 지고한 위치에 걸맞지 않은 감정을 당장 버리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사실은 공녀에게 긴히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어. 오래 붙잡지는 않겠네.”

그사이 대열은 나누어져 이동하고 있었고, 삼분지 이의 기사들 뒤로 남은 사람들은 기껏해야 엘루이든 대공 일행과 리엔타 공작 일행 정도였다.

“아이가 듣기에는 다소 걸맞지 않은 이야기라네.”

샤를리즈는 예의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천천히 내려 두었다. 다시 상체를 세우자마자 카타리나는 성큼 다가가 그 귀에 대고 바람 소리보다도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사실, 들려도 상관없었다.

리엔타 공작이라면 제 목숨을 바쳐서더라도 제 딸을 위협하는 자들을 소탕하려고 들 테니까.

“파악한 경로는 후일 자세히 이야기해 주겠어. 흑마법사가 그대를 노리고 있네.”

카타리나는 텀을 두지 않고 계속해 말했다. 샤를리즈를 몰아붙여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도록 흔들어야 한다.

“저번 그리니티 홀에서의 일, 기억하고 있나? 그때도 그대를 노린 것이었어. 공녀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수도 없도록 하려 들고 있네.”

목표물을 곧장 죽이지 않는 이유는 흑주술의 대가로 삼으려는 것 말고는 없다.

생각만 하고 있는 것과 실제로 말을 하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다.

‘……그렇지. 그런데 왜.’

굳이 죽이지 않고 대가로 삼으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카타리나는 순간 의아해졌으나 의문을 삼켰다. 공녀는 어디서든 척지고 다녔으니, 그 많고 많은 적 중 그 집단에 의탁한 흑주술사 하나가 있다고 해도 아주 이상하지만은 않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숨을 몰아쉰다거나 파르르 떠는 기색이 없었다. 왜인지 초조해져 카타리나는 특정한 단어에 묘한 강세를 주었다.

“단독적인 행동이 아니야. 마치 이교도들처럼 맹목적으로 충성하고 있지.”

그 말에 샤를리즈가 고개를 틀어 그녀를 응시했다. 짙은 녹음을 닮은 눈이 뱀의 비늘처럼 미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신전의 숲을 선택하셨던 겁니까?”

“그래. 그들이 공녀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했건만 때는 이미 야외 행사가 확정된 후였네. 하여, 이렇게나마 공녀를 보호하고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군.”

카타리나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모두 거짓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군. 곧 초대장을 보내겠네.”

“예. 폐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이쪽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던 아이는 대화가 끝난 기색을 기민하게 알아챘는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영민해.’

속으로는 여러 계획을 짜면서 카타리나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조카에게 자애로운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뒤돌아서 다시 황제에게 향했다.

단상을 막 오른 순간이었다.

타아앙―!

단 한 발의 총탄이 표적을 꿰뚫었다.

“황후. 황후!”

달려오는 멍청한 황제를 보며, 카타리나는 그보다 더 멍청한 얼굴로 눈을 부릅뜬 채 기울어졌다.

‘어째서…….’

허겁지겁 가슴을 틀어막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유수처럼 밀려 나오는 뜨거운 감각마저 점차 멀어졌다.

* * *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것을 기억한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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