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왕녀는 익숙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생은 조금 피곤했지.’
그래서 다채로워 즐겁기도 했다.
용에게는 즐겁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나도 내 취향이 벽안인지 지금 알았어.]
[여기 당장 네 취향이라는 거, 다 적어.]
금안을 가진 용이 으르렁거렸다.
그게 꼭 불퉁하게 토라진 어린애의 심술 같아서, 왕녀는 피식피식 웃으며 나름대로 열심히 작성했다.
다 됐다며 종이를 흔들거리자 용이 순식간에 낚아채 맹렬하게 읽어나갔다.
그러고는 조금 한심스럽게 왕녀를 쳐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이 좋다고?]
[그래. 항상 같이 있을 테니 심심하진 않잖아.]
그리고 그게 바로 네가 아니겠냐고 덧붙이려던 때, 용은 뒤돌아 방을 나갔다.
만물의 영장은 과연 제멋대로였으므로 왕녀는 어깨만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그날의 기억을 끝냈다.
[준비해. 갈 곳이 있어.]
청개구리가 될 속셈으로 종이를 받아 간 것이었는지, 작은 영지만 한 거대한 저택에서 게으름을 피우던 용은 온갖 숲과 바다로 왕녀를 데려갔다.
때로는 함께 있었고, 때로는 혼자 있었다.
그러나 그건 언제나 그랬다.
‘음, 즐거웠네.’
왕녀는 키득거렸다.
그러다 보니 익숙한 촉감이 이마에 와닿지 않았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알았다.
왕녀가 물었다.
지난 몇 번의 경험상 그가 어떤 답을 할지 알면서도 하는 이것은 일종의 선문답과도 비슷했다.
“두려워?”
그랬는데.
“그래, 두려워.”
왕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니까 다음에는 일찍 와.”
“아니.”
용이 왕녀의 보드라운 손등에 깊게 입을 맞췄다.
“이제는 함께 해.”
이윽고 왕녀는 유난히 번거로웠던 이번 생의 목적을 깨달았다.
손을 뒤집어 용의 턱을 깊게 쓸었다.
타고나길 느긋하고 여유로워 장난기 많던 사람이 맹세하듯 약속했다.
“그래. 이번에는 내가 너를 먼저 찾아.”
* * *
그는 습관적으로 눈동자를 가렸다.
휘몰아치는 기억의 격랑이 그를 집어삼키려 들었으나 휩쓸리지 않았다. 동공 주변의 금색 불티가 선명하게 빛났지만 결국은 푸른색이었다.
칼릭스 엘루이든은 느긋한 동작으로 앞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흩어지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쓰러지는 황후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오직 그것만이 목표였다는 듯 쏟아지던 화살이 멎었다.
“당장 황후를 살펴라! 당장!”
숲의 소동을 전해 듣고 다급히 이쪽을 향하던 성기사 무리와 신관 몇몇이 황제의 노호에 신속하게 대처했다.
‘마법사들까지 데려왔는데 무용지물이 되었군.’
황후는 어쩌면 이 사달을 예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건 여전히 칼릭스의 관심 밖이었으므로, 그는 무심히 눈을 돌렸다.
아이들이 참상을 두 눈에 담지 못하도록 제 등 뒤로 보낸 사람의 옆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칼릭스는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감각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계속해 이어지던 그들의 인연 속에서, 그것이 기다림이 아니라 수십 번의 이별이었음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알게 되어 두려워졌다.
하지만 그 두려움마저도 이 곁에 있어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영원토록 두렵기를 바랐다.
* * *
흑마법의 대가로 사용되는 가장 흔한 것이란 단연 영혼이다. 안식도, 다음 기회도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그 대가로 사용되게 생긴 한 사람이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다.
‘자기들 영혼이나 바치든가!’
악마와 거래하는 인간들은 본인이 망가지던데 저놈들은 다른 사람 목숨 갖고 허세나 부리고 있다.
속으로 ‘말세군, 말세야.’ 하고 분개하던 나는 문득 카타리나 황후를 떠올렸다.
‘리닉스 공작은 왜 본인의 딸을 해치려고 한 걸까.’
그리고 카타리나 황후는 저 사실을 알았던 것 같기도 했다. 장소를 신전으로 설정하고, 마법사들을 데려온 것으로 보아 말이다.
흑마법사 집단과 신전이 연관되어 있는데, 신전이 허락한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혹시 신전이 아니라 특정 사람이라거나, 아니면 감수할 만큼 더 크게 얻을 게 있었다거나.”
흠.
줄곧 딴생각하고 있었지만 나는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주전자를 세웠다. 버릇이 금세 배는 몸이 이것도 벌써 익숙해진 것이다.
딱 물이 넘치기 직전까지 차오른 그릇을 보며 빌었다.
“오늘은 꿈을 꾸게 해 주세요.”
당신에게 양심이 있다고 믿는 어린 양이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신은 과연 화답했다.
* * *
‘양심이 없었어. 그래, 없을 것 같았어!’
나는 적진으로 향하는 장군처럼 분기탱천하여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칼릭스를 발견했다.
조금 놀란 듯 커진 눈이 이윽고 휘어졌다.
저 정도로 생각하는 것을 끝으로 나는 마음의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위험하다.’
툭 치면 줄줄 나올 것만 같은 찬사를 막느라 입을 닫고 있을 뿐인데, 말하기 싫다고 느꼈는지 칼릭스는 그저 고요히 웃었다.
나는 이번에는 기어이 고개를 돌리고야 말았다. 말없이 손가락으로 집무실 방향을 가리키며 저기 가자고 몸으로 말했다.
‘커튼 치고 어둑하게 대화해야겠군.’
그러나 칼릭스는 다리 대신 손을 움직였다.
“오늘 날씨가 좋던데, 정원에서 이야기하는 건 어때?”
그래서 안에서 이야기하자고 한 건데요…….
용기 내어 눈빛을 보내자 칼릭스가 알았다는 듯 사르르 웃었다.
“공녀도 역시 좋지?”
한 번 사는 인생, 좋은 것 보면서 사는 게 좋지.
태세 전환이 아니다. 그저 만고의 진리를 지금 되새겼을 뿐이다.
나는 척척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유리 온실이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밝은 햇살 아래에서, 어느 때보다 선명한 미래를 보았다.
나는 조금 웃었다.
‘이놈들이…….’
“샤를리즈?”
칼릭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일이야?”
이제 나는 암살 예고에 떨지 않는 강인한 심장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내 주변 사람을 대상으로 삼다니, 이건 또 기분이 아주 색달랐다.
“로단테라고, 어제 보셨죠? 금발에 주홍색 눈을 가진 아이요.”
“아.”
칼릭스가 문득 웃었다.
“응, 보았어.”
“나쁜 놈들이랑 접하면 안 되는데, 큰일 났습니다.”
말하고 나니 새삼 비통해져 고개를 푹 숙였다.
흑막의 자질을 어떻게 꺾었는데, 괜히 나쁜 놈을 접했다가 훌륭한 흑막으로 자라날까 봐 이것도 걱정이었다.
“그들이 로단테라는 아이를 암살하려고 하는 건가?”
나는 조금 전 목격한 편린을 떠올렸다.
“……카타리나 그것이 기어이 공녀에게 쓸데없는 말을 흘렸군요.”
“오히려 알고 있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지요. 위협을 알면 꼭꼭 숨어 있을 테니 한동안은 잠잠하지 않겠어요?”
“그리하시면…….”
눈치를 보는 리닉스 공작에게 남자가 아쉽게 되었다는 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어차피 공녀가 신성력을 소유했는지 확인하지 못하기도 했고 말이에요. 마침 그 옆에, 신성력을 가진 아이를 달고 왔더군요.”
“예에, 그랬습니다만.”
리닉스 공작은 공녀에게 신성력이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며 떨떠름한 얼굴을 고개 숙여 가렸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요.”
남자는 그것을 예상한 듯 창문 너머 흰 물결을 응시했다.
“하지만…….”
날카롭게 좁혀진 눈동자가 선득했다.
“그런 예감이 듭니다.”